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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삼, 아이들 곁에서 주민들 곁으로 – 2

- 고병권(수유너머R)

3. 운동의 우울

그가 나를 가장 먼저 데리고 간 곳은 129호 송전탑이 세워질 자리였다. 현재 새로 가동 중인 신고리 핵발전소 1, 2호기, 그리고 내년의 3호기, 그리고 계속 예정된 4~8호기까지, 거기서 나오는 전기를 전달하기 위해 밀양에는 모두 69개의 송전탑이 세워질 예정이다. 밀양이 한 눈에 보이는 화악산 등성이에 세워질 송전탑.

이: 몸도 몸이지만 어르신들 마음이 무너졌습니다. 그 동안 뭘 요구해본 적도 없는 분들이에요. 이제 아무 것도 요구하지를 않아요. 단지 백지화, 그것 뿐입니다. 그러니 저쪽에서 내놓을 것도 없어요. 저쪽에서 줄 수 있는 거라고는 보상, 즉 돈 밖에 없는데, 그런 걸 바라지도 않으니까요.

고: 교섭은 더 이상 진행되지 않는 건가요?

이: 네. 더 양보할 것도 없고 그쪽에서 줄 수 있는 것도 없으니까요. 이미 밀양을 제외하고는 거의 송전탑이 다 세워졌어요. 새만금에서도 그랬잖아요. 이미 이렇게 진척되었으니 피할 수 없다고. 지금 주민들이 너무 잘 싸워서 신고리 발전소 1, 2호기에서 나온 전력은 기존 선로를 이용하고 있어요. 하지만 내년 3호기, 내후년 4호기, 지금 계획된 8호기까지 가려면 분명 이 선로를 건설해야만 할 겁니다. 참 기가 막혀요. 큰 틀에서 에너지 정책이 탈핵으로 변경되지 않으면 이 싸움은 거의 불가능하죠. 일단 새로운 핵발전소 계획을 포기하고 기존의 것을 줄여가는 식으로 하지 않으면 말이죠. 결국 지금 구도에서는 누구도 물러설 수 없고, 저는 지난 번 이치우 어르신처럼, 어느 어르신이라도 맘을 달리 잡수실까 너무 걱정입니다.

고: 지난 번 <한겨레> 보니, 어르신들이 정말 유서를 써서 가지고 다니시는 것 같더군요. 그나저나 일본 후쿠시마를 보고도 왜 한국에서는 반핵담론이 그렇게 만들어지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일본의 경우 50여개 발전시설이 모두 멈추었고, 얼마전 일본 정부가 몇 개를 재가동하겠다고 선언하면서, 도쿄에 큰 시위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왜 그런 투쟁 담론, 반핵담론은 우리에게 들어오지 못하는 걸가요.

이: 저도 이번 일로 처음 탈핵운동에 나섰는데요. 우리 탈핵운동이 참 약합니다. 정치적으로 나이브한 면도 있고요. 특히 환경운동연합이나 그쪽 일부 사람들에 문제가 많아요. 겁도 많은 것 같고 치열하지도 않은 것 같고. 사진찍고 보도자료 만드는 수준이랄까요. 현장에 뿌리를 내려야 하는데, 그럴려면 현장과 관계를 해야하잖아요. 그런데 정말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그것을 안 해요.

주민집회에서 발언 중인 이계삼 선생님

주민집회에서 발언 중인 이계삼 선생님

고: 환경운동이 중상층에 기반한 세련된 시민운동이 되버린 걸까요?

이: 이번에, 뭐랄까, 참담한 일을 겪었어요. 사실 서울환경운동연합 사람들, 밀양에 단 한 번도 내려오지 않았거든요. 탈핵희망버스 2번 할 동안 한 번도요. 그것만이 아니죠. 제가 ‘핵없는 사회공동행동’ 일을 하면서 서울에 올라가 밀양 일을 알리려 했는데, 참 모욕적인 일을 겪었어요. 참여연대 어느 회의실에서 모임을 가졌는데요, 희의 자료에 제가 보낸 자료들이 들어 있지 않더라고요. 밀양 안건이 없었지요. 그래서 왜 그게 없냐고 했더니, 그때서야 출력해서 복사하고는 돌리더군요. 10시에서 12시까지 회의를 했는데 11시 50분까지 밀양 이야기를 할 틈이 없었어요. 그게 그리 중요한 주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람들이 주로 한 이야기는 총선후보들에게 정책질의서를 보내야 할 텐데 어떻게 돌릴 건지, 그리고 아르바이트생을 쓰면 그 비용을 환경운동연합에서 질 건지 녹색연합에서 질 건지, 그것 가티고 2-30분 이야기하고. 11시 50분이 되어서야 밀양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고: 10분 안에 이야기를 다하라고 하지는 않았겠지요, 설마?

이: 그보다 더 기막혔습니다. 제가 밀양 상황을 설명하려고 하니까 사회 보는 분이 제지를 하면서 시간이 없으니, 12시까지 끝내야 하니, 문건으로 대체를 하자고 하더군요. 게다가 그때 제가 ‘희망버스’를 처음 그 자리서 제안했는데요. 민주노총에서 오신 분이 ‘희망버스’라는 표현을 쓰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하더군요. 지금도 그 논리가 당최 이해가 되지 않는데요. 어떻든 그 분 말에 따르면 희망버스는 지금 희망텐트로, 쌍차로 넘어가 있고, 시민들도 잘 모르고, 일단 희망버스는 시효를 다했고, 희망텐트로 넘어갔으니, 탈핵이라는 이름을 거기에 붙이는 건, 말하자면 글쎄뭐랄까, 물이 흐려진다고 할까 하는 …

고: 네?? 도무지 무슨 말인지.

이: 그래서 제가 화가 나서 물었죠. ‘희망버스’라는 게 무슨 저작권이 있는 것도 아니지 않느냐… 사회보는 분이 제지를 해서 분위기가 조금 그랬는데… 뭐 희망버스는 금속노조에서 다 했던 거고 그 알려지지도 않은 이런 사안을 가지고 희망버스라는 표현을 써서 희망버스라는 담론이 퇴색될 수도 있다는 투로 반발을 하더라고요. 우리는 그래도 1차 희망버스라는 표현을 쓰고 싶다고 했더니 ‘1차’라는 말도 안 썼으면 한다고 하더군요. 이게 성공할지 실패할지도 모르는데. 차후에 1차라는 표현을 쓰게 되면 부담이 된다는 취지였어요.

고: 두물머리에서 들은 이야기가 생각나네요. 거기 농부 한 분이 그러더군요. 많은 단체들이 처음에는 자신들에게 지자체 선거 운동을 열심히 하자고 했대요. 경기도지사가 바뀌면 상황이 달라진다고. 열심히했는데 결국 김문수씨가 당선되고 말았죠. 그 다음에 친수법이 만들어지는 걸 막자고 국회에서 싸우자고 해서 또 열심히 했지만 날치기 통과되었죠. 그 다음에는 총선에서 야당이 과반수 되면 그 법을 다시 바꿀 수 있다고 해서 열심히 싸웠대요. 이제는 그런 답니다. 대선에서 야당이 되면 다 바꿀 수 있다고. 그 말을 하는 농부의 눈시울이 붉어지더군요. 이제는 자기 주위를 보기로 했답니다. 함께 농사를 짓던 분들, 지킴이들… 이제 그들과 농사지으며 싸워나갈 거라고. 어쩌면 우리 주변에는 운동의 선생들이 참 많아요. 운동단체들이 여기저기서 달라붙어서 여러 전략들을 세워주죠.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런 좋은 전략들이, 현장과는 무관한, 운동 공학 같은 느낌이 듭니다. 절박함도 없고, 환호도, 분노도, 슬픔도 없는, 그냥 전략과 전술만 있는….

이: 그러게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아직도 이해가 안 돼요. 왜 민주노총에서 온 그 사람은 제게 희망버스라는 표현을 쓰지 말라고 했는지. 희망버스라는 담론을 오히려 퍼뜨려야 하고 여러가지로 연대해야 하는데… 그런데 회의 석상에서 그걸 쓰지 말라고 하는 결기가 참… 그때 그 참담했던 기분이란…

고: 많은 사람들이 현장에서 싸우다 어떤 벽을 느낍는 것 같습니다. 국책사업이라는 둥, 법이 그렇다는 둥 하고 나오는데다, 기존의 운동 단체들은 현장의 절박함에 귀를 기울이기는커녕 장기판 훈수두듯 하고 있으니, 정말 어찌해야할까 막막한 느낌이 들 것 같습니다.

이: 우울증이 생기는 이유가 거기 있는 것 같습니다.

고: 우리 몸이 파업하는 걸 겁니다. 현실에서는 어찌해볼 도리가 없고, 하지만 그렇다고 물러설 수도 없고. 살아가야하니까요. 원칙이 어떻다, 법이 어떻다, 전략이 어떻다, 이런 건 의식으로는 수긍할지 몰라도, 그래도, 살기 위해서는 억지라도 부려야 한다는 절박함이 있으니. 우울증의 형태로 몸이 굳어지는 거겠죠.

4. 이 싸움에 별 수 없는 제 몫이 있습니다

송전탑 건설을 막기 위해 세운 움막에서 두 분의 할머니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 우리를 배웅하던 할머니는 이계삼 선생에게 웃으며 말을 던졌다. “이제 이 선생 그만두고 우리 떠나면 배신이야, 배신!” 사실 그 말은 할머니들이 스스로에게 했던 말이기도 했다. 우리는 너무 깊이 들어왔다고. 이제는 누구도 여기를 떠날 수 없다고. 이제는 보상도 뭐도 문제가 아니게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할머니들은 이 정부가 국민인 자신들을 배신했다는 것, 정부에 아무 것도 기대는 것 없이 그저 평생 흙을 파며 짓던 농사를 계속 짓게 해주면 그만인 것을, 자신들을 못 살게 만들고 모욕을 준 것에 한 없이 분노했다. 게다가 동네의 젊은이들을 꼬드겨 마을을 갈기갈기 찢어놓은 것에 대해, 이 공동체를 완전히 파괴시키려 드는 것에 대해 할머니들은 분노했다. 그래서 ‘의리’와 ‘배신’이라는 말은 할머니들 나름의 공동체 수호에 대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이: 저도 할머니들과 똑같아요. 너무 깊이 들어왔죠. 저도 제 신상에 닥칠 해랄까, 뭐 그런 걸 각오하고 있어요.

고: 한전이나 경찰도 이제 선생님을 알고 있고 가만히 있진 않겠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저렇게 어르신들이 선생님을 믿고 계시는데… 이 일 때문에 학교를 떠난 게 아니었는데, 결국에는 이 일을 하기 위해서 학교를 떠난 것처럼 되어버렸네요. 아이들 곁에 있다고 마치 이제는 이 어르신들 곁에 있어야 하기에…

송전탑 건설에 반대하는 밀양의 어르신들

송전탑 건설에 반대하는 밀양의 어르신들

이: 네, 어르신들이 저를 많이 의지하시죠. 이치우 할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저 서울에 있었어요. <오늘의 교육> 편집회의가 있어서. 밤샘회의를 하고 1월 17일 새벽이었을 겁니다. 휴대폰을 켜니 저에게 문자가 20개 가까이 들어와 있었죠. 서둘러서 밀양으로 첫 차를 타고 내려오면서 앞으로 저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까 생각했죠. 예광탄 같은 느낌이랄까. 당시 실무자 할 사람도 없었거든요. 지금은 이런 생각도 해봅니다. 이치우 어르신이 저를 다른 어르신들 도와주라고 학교 일을 그렇게 만든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요.

고: 제가 미국으로 떠나기 전 선생님 책을 보내주셨잖아요. 거기서 선생님이 학교에 오래 계시지 못할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선생님이 야자시간 감독을 하는 자신을 ‘간수’라고 묘사하는 걸 보고요.

이: 저는 지금까지 제 삶을 제가 이끌어왔다고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니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저를 끌어온 것 같아요. 어쩔 수 없이 해야할 일에 밀린 거죠. 함석헌 선생은 스스로를 하나님의 발길에 툭 채여서 왔다고 하셨던데, 저는 그렇게 멋있게 표현하지는 못하겠고. 어떻든 학교도 그만둔 거라기보다는 그만두어진 것 같고, 송전탑도, 밀양에 살기에 밀양에 사는 한 뛰어들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되었고. 백석 시에서처럼 나보다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도 거기에 이끌려온 것 같다고 해야할 것 같아요. 밀양에 살겠다고, 여기 뿌리 내리고 살겠다고 했으니, 그 말 빚을 갚아야죠.

고: 그 말들, 반쯤은 예견하고 뿌려놓은 말들 아닌가요?

이: 이렇게까지 엄중한 상황일지는 몰랐죠. 그러니까 주민들의 목숨까지 담보한 싸움까지 예상하지는 못했어요. 하지만 생각해보면, 이런 싸움은 이 나라 어디에서든지 한 번은 겪게 될 일이 아닐까 싶어요. 이 나라에서는 필연적인 일인 것 같기도 하고.

고: 선생님, 전교조 사진전을 보고 교사가 될 소망을 품을 때 그랬다면서요. “대단한 투사가 될 수는 없겠지만 사랑 때문에 아이들 곁에 있을 수는 있을 것 같다”고. 사랑 때문에 함께 고통받는 사람이 될 수는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해보면 그때는 아이들 곁에 있는 사람이 되고자 했고, 이제는 주민들 곁에 있는 사람이 된 것. 글쎄요. 학교를 떠난 것이 큰 결단인 것은 분명한데, 어찌보면 참 한결 같다는 생각도 드네요. 선생님은 누군가 곁에 서 계시려고, 무슨 힘이 없어도, 그냥 힘든 사람 곁에 서 있으려고 할까, 그곳을 떠나지 못하는 군요. ‘어쩔 수 없다’고 하시면서.

이: 제가 할 수 있는 큰 실천은 없죠, 뭐. 이 싸움에 제 몫이 있다는 건 압니다. 물론 이 엄중한 상황에서 일을 이끌어야 하니 맘이 무겁죠. 아침에 정말 기도합니다.

고: 미국 친구들에게 한국의 운동을 소개해달라는 부탁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1980년부터 한 30년의 운동을 영상과 함께 보여주었는데, 그걸 준비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사람들이 참 몇 년 앞을 보기가 참 힘들구나. 그리고 우리가 역사 앞에서 참 빨리 절망하는 구나 하는 생각이요. 물론 희망도 그렇고요. 참 헛된 희망, 곧 사라질 그런 희망을 품는 것도 많구요. 희망도 필요 이상으로 크고 절망도 필요 이상으로 깊다고 할까요. 묵묵히 한 걸음씩 내딛는 건 참 우리에게 어려운 일인가봐요. 하지만 선생님에게 그런 걸 느낍니다. 그나저나 어떤 인연이 있어 저 할머니들처럼 훌륭한 투쟁의 동지들을 만났는지, 이 선생님이 부럽습니다. (웃음)

이: 그러게요. 밀양의 이 골짜기에서 저런 분들하고… 참 소중한 인연입니다. 이 운동이 저한테 준 기쁨과 저를 일깨워준 것, 어떻게 글을 써야 그런 것들을 표현할 수 있을지. 뭐 일단 지금은, 최소한 연말까지는 비상한 상황이라서 거기에 집중하겠지만요.

고: 네, 부디 몸을 잘 돌보시길. 그리고 저희도 밀양 희망버스에 걸려 있는 희망을 놓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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