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꼼

‘말하는 입’이 되고자 하는 그녀들

- 황진미

<내 아내의 모든 것>의 관객이 4백만을 넘어섰다. 로멘틱 코미디로서 기록적인 흥행이다. 흥행요소가 뭘까? 아내와 헤어지기 위해 카사노바를 고용하였으나 다시 아내를 사랑하게 된다는 줄거리는 새롭지 않다. 카사노바로 등장한 류승룡의 연기가 코믹하긴 하지만 참신한 건 아니다. <내 아내의 모든 것>에서 가장 새롭고 주목할 만한 점은 연정인(임수정) 캐릭터이다. 그녀는 한 번도 재현된 적 없는 ‘말하는 여성’이다. ‘말하는 여성’이 재현된 적 없다니, 언제나 여성은 수다스러운 존재 아니었나? 맞다. 언제나 여성의 말은 수다일 뿐이다. 어떤 내용을 말하든, 잔소리이거나 바가지이다. 법원이나 회의장 같은 공적 자리에서 여성의 발화는 내용 이전에 참을 수 없는 소음으로 간주된다. 여성이 공적으로 발화하기 위해선 최대한 자신의 육성을 버리고 남성의 언어를 구사해야 한다.

연정인의 말은 ‘수다와 ‘사회적 발언’의 경계에 서있다. 남편은 ‘투덜거림’이라 말하고 자신은 ‘콤플레인’이라 말하는 그녀의 말은 신경질적이면서 한편으론 비판의식이 있다. 신문 배달부가 ‘아줌마’라 칭하고 남편이 말을 끊었을 때, 그녀는 은근한 비하와 침묵이 강요되는 상황에 히스테리적으로 반발한다. 그녀의 말에는 타자에 대한 배려가 없다. 냉소적이고 자기중심적이다. ‘자기 할 말 다하는 여자’인 게 문제가 아니라, ‘자기 할 말만 하는 여자’인 게 문제이다. 그러나 이런 문제점들은 라디오방송이라는 사회적 출구를 찾으면서 순화된다. 그녀의 발언은 미시정치 혹은 감수성에 관한 것들이다. 그녀의 발언이 “저런 여자랑 사는 남편이 불쌍하다”는 반응에서 “시원하다”는 공감을 얻게 되었을 때, 그녀의 말은 ‘독설’로 인정된다. 그녀가 쏟아낸 말들은 일종의 인정투쟁이었다(“외로워서 그랬던 거야”). 그녀가 사회적 인정을 얻게 되자 타자에 대한 이해심도 열린다. 택시기사에게 백 원을 더 받겠다고 궤변을 펴던 그녀가 최저시급을 운운하며 식당종업원에게 관대해진 것을 보라.

연정인은 인구사회학적 분석을 요하는 징후적인 캐릭터이다. 그녀는 중산층 가정의 외동딸로, 신춘문예에 당선되었을 만큼 재능이 있지만 글쓰기로는 생활이 되진 않는다는 충고를 받아들여, 일본에 요리유학을 갔다가 그녀의 미모에 반한 전문직 남성과 결혼했다. 고학력에 문화적 감수성과 진보적 비판의식을 지녔지만, 취업할 곳은 마땅치 않다. 가부장적이고 수직적인 직장문화에 맞지도 않고, 경제적인 절박함도 없기 때문이다. 요리도 잘하고, 행복한 가정에 대한 욕망도 있는 그녀는 전업주부가 된다. 하지만 문제는 불임이라는 것. “아이 없는 전업주부”라는 정체성은 비웃음거리이다. 전업주부의 핵심 업무가 자녀교육이기 때문이다. 고학력 중산층 여성이 자아실현의 통로를 찾지 못하고 전업주부가 되었을 때, 모든 사회적 욕망은 자녀교육에 투입된다. 화장실까지 쫓아와 남편에게 녹즙을 먹이는 그녀 역시, 불임이 아니었던들 자녀교육에 몰입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녀의 불임은 중산층 전업주부로서의 정체성을 불완전하게 만든다. 아이가 매개하는 사회적 관계에도 끼지 못한 그녀는 히스테리적인 언어로 리비도를 분출한다. 영화는 카사노바를 투입하는 등 그녀의 성적 욕망을 떡밥으로 던지지만, 그녀에게 필요했던 것은 그녀를 말하게 하고, 그녀의 말을 듣고, 그녀를 인정하고, 그녀가 놓일 자리를 만드는 일이었다. 그녀는 운 좋게 사회적 발언의 통로를 찾는다. 그러나 기회를 얻지 못한 비슷한 인구군의 수많은 여성들이 있다. 가부장적 질서에 완전히 안착되진 않으면서, 참을 수 없는 말하기의 욕망을 지닌 채, 문화소비나 사이버 상에서의 말하기로 욕망을 해소하는 까다로운 여성주체들이 늘고 있다.

<러브픽션>의 희진(공효진) 역시 기존의 텍스트에서 재현된 적이 없는 문제적 캐릭터이다. 그녀는 알래스카에서 청소년기를 보냈고, 한국의 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했다. 중산층 남자와 결혼하였지만 이혼하였고, 영화수입 일을 하며 취미로 사진을 찍는다. 그녀는 세련되고 글로벌한 안목을 지니고 있으며 연애에 스스럼이 없다. <러브픽션>은 영화전체가 말하기의 욕망으로 가득 차 있다. 그 말은 대부분 소설가인 주월(하정우)의 머릿속 내레이션이다. 예술가적 자의식이 넘치는 주월은 희진을 ‘뮤즈’라 생각한다. 그녀의 매력에 반해 그녀의 신체적 특징으로 소설을 써나가던 주월은 치명적인 추문을 듣는다. 그녀가 대학시절 “이놈 저놈 다 올라탄 스쿨버스”였다는 것. 이들의 사랑은 어찌될 것인가? 영화는 진보적인 성의식을 보여준다. 첫째, 영화는 그녀의 겨드랑이 털을 하나의 개성으로 인정한다. 여성의 신체를 남성의 입맛대로 재단하지 않고, 독자적인 자기세계로 인정하며 성관계에 앞서 대화케 한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서 남자가 여자의 다리털을 보고 ‘더럽다’며 떠난 것과 비교하면 얼마나 개방적인가. 둘째, 그녀가 다른 남자와 잤는지 의심하는 남성의 심리를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며, 여성은 추문을 오해라며 변명하지 않는다. 남성의 의심이 갈등의 핵이었던 <시라노-연애조작단>, <건축학개론>과 비교하면 얼마나 진보적인가. 셋째, 그녀를 ‘뮤즈’로 생각하며 소설을 쓰던 주월에게 그녀 역시 좋은 사진을 찍기 위해 남자와 자는 것이 뭐가 문제냐며 반문한다. ‘남성작가-여성뮤즈’라는 유구한 성적 구도는 <음란서생>등에서도 반복되었으며, 남성의 예술적 대상화에 여성이 상처받는 것으로 그려졌다. 그러나 <러브픽션>은 이를 뒤집는다. 남성작가와 여성뮤즈로 출발하는 듯하다가, 여성작가(사진가)와 남성뮤즈(누드모델)이라는 역전된 구도를 보여주며, ‘와이 낫?’하고 묻는 것이다. 주월은 “너는 내 31번째 남자야”라고 말하며 떠난 희진을 잊지 못해 알래스카까지 찾아 간다. 희진은 자신의 몸과 사랑과 예술에 대한 발언권을 지닌 여성이며, 뮤즈가 아닌 작가가 되려는 욕망을 지닌 다.

최근 TV <짝>은 한명의 매력적인 여성을 보여주었다. 29기의 여자 5호로 명명된 그녀는 자유분방한 감성으로 자신의 생각을 발언하였다. 그녀의 발언은 일관된 철학이 있었으며, 문화적 콘텐츠도 풍부했다. 예술적이고 글로벌한 매력으로 출연자와 시청자들을 단박에 압도하며, 기존에 여성을 고르는 기준이 얼마나 진부한지를 여실히 느끼게 해주었다.

그동안 여성들의 입은 언제나 ‘먹는 입’이었다. 소비하는 입이자, 섹스하는 입이었다. 그러나 그녀들이 ‘말하는 입’이 되려한다. 그녀들의 말을 들을 귀가 준비되지 않은 남성들은 그녀들을 ‘더 고급한 것을 먹으려는 입’(‘된장녀’)이라며 헐뜯는다. 소통할 수도, 충족시킬 수도 없는 절망감에 원한을 담아 투사한 표현이다. 그러나 그녀들이 원하는 것은 발기된 남근이 아니라 열린 귀이다. 카사노바에게는 있고, 당신에게는 없는 바로 그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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