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지가 쓰는 편지

하버지의 행복론 (2)

- 윤석원(전 전교조교사)

3. 선악과 행복

하버지, 천사와 악마는 욕구가 다르니까 만족한 상태 즉 추구하는 행복이 다르잖아. 인간은 어느 쪽의 욕구를 가지고 어느 쪽의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야. 천사와 악마가 없을지 몰라도 천사나 악마 닮은 인간은 있지. 악한 인간들의 이미지를 모아서 악마를 만들고 선한 인간들의 이미지를 모아서 천사를 만들었으니까 그 원형이 될 만한 인간들은 있게 마련이야. 남의 행복을 자기의 행복으로 느끼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남의 불행을 자기의 행복으로 느끼는 사람들도 있어. 어떤 사이코패스는 남몰래 상대방을 괴롭힐 수 있는 자신의 능력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대. 그런 사람이 있다면 우리가 상상해낸 악마와 같은 사람도 실제로 존재한다는 거야.

그런데, 지극히 선하지도 지극히 악하지도 않은 어중간한 인간들은 어느 쪽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쉽고 편안할까? 자유를 가진 인간이니까 형편에 따라서 선하게 살면서 선한 열매를 즐길 수도 있고 악하게 살면서 악한 열매를 즐길 수도 있지. 그런데 주요한 인간의 가능성 가운데 하나인 공감 능력이 문제야. 왜냐하면 공감능력은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을 공감하면 함께 행복해질 수 있는 능력이니까. 공감능력이 더 중요한 것은 인간이 사랑하는 사람의 괴로움도 공감할 수 있다는 거야. 괴로움에 공감하면 당연히 공감하는 자신도 괴로워지지.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하게 마련이야. 우린 그런 노력을 사랑이라 불러.

함께 노력하여 괴로움에서 벗어났을 때에 서로의 해방감을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공감으로 주고받으면 훨씬 더 큰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게 문제야. 인간은 남의 괴로움에 공감할 수 있기 때문에 함께 벗어나려고 힘을 모아서 괴로움을 물리치는 바로 그 사랑으로 행복을 추구하도록 되어 있어. 공감 능력이라는 인간성을 가졌다면 인간은 선한 행복을 추구하게 되어 있지.

아무리 많은 돈이나 높은 지위보다도 사랑하는 사람의 기쁨이 더 큰 기쁨을 줄 수 있다는 인간의 공감능력을 우리는 부인할 수가 없어. 그리고 인간은 이 공감능력에서 오는 행복 때문에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고. 만약에 공감능력에 따른 사랑이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오는 것이라면, 그리고 사랑이 모든 선을 대표하는 덕목이라면 인간은 공감능력에 따른 사랑으로 선한 행복을 추구할 수밖에 없지.

인간이 나 잘 살자고 서로를 못살게 하면 결국 나를 포함하여 모두가 불행해진다는 사실을 깨달은 진화적인 증거가 공감능력이야. 인간의 공감 능력에 대한 진화 속도가 4만 년 전부터 가속되기 시작했다지만 유감스럽게 아직 가족이나 씨족 단위를 넘어서지는 못한 것 같아. 문명 발전의 원동력 가운데 중요한 하나가 공감능력이지만 그러나 지구촌이 하나의 공동체가 된 오늘날인데도 공감능력은 전 인류나 다른 생명체에게 미치지 못하고 있어.

그러나 일찍이 공감능력이 특별한 사람들이 가족이나 씨족을 넘어 전 인류와 다른 생명체들까지를 품에 안고 인간은 누구나 거기까지 공감능력을 넓힐 수 있고 넓혀야 됨을 보여주었어. 그들은 수천 년 전부터 인간은 서로를 잘 살리려고 노력함으로써 다 같이 행복해질 수 있다고 가르쳤어. 그들은 인간의 공감능력을 믿었어. 그리고 이를 키우기 위해 본보기로써 자신의 일생을 받친 거야. 인간의 공감 능력과 그들의 가르침을 믿는다면 인간이 서로를 행복하게 함으로써 다 같이 행복해질 수 있다는 그들의 가르침대로 선한 행복을 추구해야 돼.

선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진화와 인간성이 가리키는 방향이라고 하버지는 믿고 있어. 그렇다고 성선설을 믿는 것은 아니야. 인간이 자유를 가졌음을 인정한다면 양쪽 가능성 인정해야 되니까. 다만 인간이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다 같이 선한 행복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적인 귀결을 말할 뿐이야. 인간이 나 잘살자고 남 못살게 하려들면 다 같이 못살 수밖에 없다는 것, 즉 인간이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이라는 진화의 한계를 가장 깊이 깨달은 존재라는 것과 이를 깨닫는데 실로 오랜 세월이 걸렸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을 뿐 거야.

하버지는 자꾸 선한 행복과 악한 행복을 따지는데 대체 선과 악이 뭐야? 동양에서는 하늘이 정해 놓은 삶의 이치(天理)에 따르면 선하고 거스르면 악하다고 말해. 하늘이 삶의 이치를 정해놨다고? 하늘은 또 뭐야? 어떤 사람은 자연을 가리키고 다른 사람은 조물주를 가리키므로 말하는 사람마다 하늘의 뜻이 조금씩 달라서 하버지도 잘 몰라. 아무튼 하늘이 자연의 이치를 정했는지는 몰라도 인간의 행동의 이치를 어떻게 정해놓았는지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이제까지 하나도 없었어. 만약에 하늘이 인간이 행동하게 될, 또는 해야 될 이치를 정해놨다면 스피노자의 논리대로 인간은 자연스럽게 그 이치대로 행동했을 테니 이치를 따르라 말라 말할 것이 없어. 또 성선설이나 성악설로 논쟁할 필요도 없고.

서양 기독교에서는 절대자의 의지에 순종하는 행동은 선하다고 하고 거역하는 행동은 악하다고 하지. 문제는 신의 의지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다는 거야. 그래서 선악 판단이 신의 의지를 해석하는 사람의 의지에 따른 판단이 되고 마는 거야. 그래서 똑같은 행동이라도 신의 의지나 하늘의 이치를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선이 되기도 하고 악이 되기도 해.

그럼 하버지, 선악을 판단할 수 있는 하버지의 기준이 뭐야. 대개 윤리나 종교에서는 일반적으로 남에게 이익이 되는 행위는 선하다 하고 손해를 끼치는 행위는 악하다하여 행위마다 미리 선과 악의 딱지를 붙여놨어. 이를테면 상황과 상관없이 배고픈 사람을 먹이는 행위는 이익을 주는 행위니까 선하고 살인이나 도둑질하는 행위는 손해를 끼치니까 악하다고 규정해놨어.

그러나 하버지는 어떤 행위가 선한지 악한지는 그 행위가 이루어진 상황에 맞는지 어긋났는지 따져봐야 알 수 있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선악이라는 것이 주어진 상황 속에서 행위자와 상대방의 이해관계를 떠나서 어디에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봐. 어떤 행위가 주어진 상황에 딱 들어맞아서 행위자나 상대방에게 이익이 되면 선이고 상황에 어긋나서 누군가에게 손해를 끼치면 악이지. 그러므로 하버지는 살인이나 도둑질이 상황에 따라서는 선이 될 수도 있고 악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 그래서 살인이나 도둑질은 언제나 악이니 하지 말라고 미리 규정해 놓는 것에 반대할 수밖에 없어.

하버지는 어떤 행위가 이루어진 그 상황 속에서 남에게 끼친 손익을 정확히 계산했을 때만 그 결과에 따라 선악을 판단할 수 있다고 믿고 있어. 이를테면 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킨 히틀러를 암살하려던 독일의 본 휘퍼라는 목사의 행위는 살인이지만 하버지는 선하다고 보는 거야. 왜냐하면 히틀러를 암살하는 것은 히틀러의 생명에 절대적인 해악를 끼치므로 악하지만 그 작은 악이 수많은 인간을 살려 훨씬 더 큰 악을 막고 훨씬 더 큰 선을 이룰 수 있으니까.

살인 행위라도 상황이 악을 선으로 만들 수 있다고 보는 거야. 극약이나 심지어 독약도 처방에 따라서는 사람을 살리는 약을 만드는데 쓰일 수가 있지. 인간이 살아가는 데는 필요악이 있어야 선을 이룰 수 있는 비극적인 상황이 얼마든지 있을 수가 있어. 그래서 상황을 떠나서 어떤 행위의 선악을 미리 규정해둘 수가 없다는 거야.

하버지의 선악의 기준은 신의 의지나 하늘의 이치나 행위의 특성이나 행위의 의도에 있는 것이 아니야. 오로지 어떤 행위의 결과가 상황에 적절하여 남에게 이로웠다면 이익당사자에게는 선이고 부적절하여 남에게 해를 끼쳤다면 손해당사자에게는 악이라고 믿고 있어. 그러므로 지금 여기의 상황에서 자기가 의도한 행위가 상대방에게 어떤 손익을 가져올지 정확하게 계산할 책임이 행위자에게 있다고 보는 거야. 대개의 인간은 그럴 만한 공감능력과 추리능력이 있다고 봐. 만약에 그 결과를 정확하게 추리·상상할 수 없다면 당연히 의도한 행위를 보류해야 되지.

그래서 홍아야, 동양 특히 유교에서는 상황에 알맞게 행동하는 것을 뭐랬지? 몰라. 중용(中庸)이랬어. 중용이란 말은 행동이 상황에 어긋나서도 안 되고 지나치거나 모자라서도 안 되고 딱 들어맞게 행동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뜻해. 아무리 선을 의도했어도 상황에 알맞지 않아서 해악을 끼치면 안 된다는 것이 중용의 뜻이야. 그래서 하버지의 선악 개념은 상황에 따른 이해관계라는 순전히 인간적이고 관계적이고 상황적인 개념이야.

그런데 남과의 이해관계를 떠나서 자신만을 위한 행동이라면 누구든 언제나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므로 자신을 위한 행동은 자신에게 선하기만 하지. 그러나 남과는 이해관계가 엇갈리니까 악한 행동을 하게 돼.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이익을 보려고 남에게 손해를 끼치는 행동을 서슴지 않기 때문이야. 그래서 살아가다보면 이해관계로 갈등에 부딪쳐 선악을 따지게 돼있어.

그렇다면 어떤 기준이나 근거를 가지고 선악을 따져야 싑게 판단할 수 있어? 아직도 아까 물은 말에 대답을 안 내놨어. ‘하늘의 이치’나 ‘신의 의지’나 ‘행위의 특성’ ‘행위의 의도’ 따위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개념이나 이론 또는 교리에 비추어서 어떤 행위의 선악을 판단하려하면 결국 확실한 기준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돼.

그러니까 어떤 행위의 선악을 쉽게 판단을 하려면 선악의 원래의 개념을 들이대야 돼. 선과 악의 원래의 뜻은 ‘잘함과 잘못함’ 또는 ‘좋음과 나쁨’이었어. 그러니까 “네가 나에게 한 행위가 나에게 이익을 주었으니 좋은 짓이고 잘 한 짓이므로 네 행위는 나에게 선하다. 또는 손해를 끼쳤으니 나쁜 짓이고 잘못한 짓이므로 네 행위는 나에게 악하다”라고 판단해야 돼.

결국 선악 개념을 상황에 따른 손익 개념으로 판단하는 거야. 물론 상황을 떠나서는 손익을 따질 수가 없고, 상황 속에서 따진다 해도 눈앞에 보이는 결과만으로 손익 계산이 가능한 것은 아니야 그러나 아무리 손익 계산과 판단이 힘들어도 선악의 판단 기준은 ‘상황에 따른 손익’인 것만은 분명해.

그렇다면 하버지, 다시 행복 얘기로 돌아가서 우리가 추구하려는 행복이 남들에게 이익이나 손해를 끼치는 선하거나 악한 행복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행복도 있을 수도 있잖아. 그리고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한 행복은 있을 수 없나?

홍아야, 만약에 네가 들꽃 한송이의 향기에 흠뻑 잠겨서 잠시라도 행복했다면 네 행위가 너에게는 선했지만 남에게는 선도 악도 아니야. 너는 남에게는 무해무덕(無害無德)하지만 네게는 선인 행복을 누릴 수 있어. 홍아야, 하버지가 네게 힘주어 말하고 싶은 것은 네 원하기만 한다면 남에게 무해무덕한 행복을 남의 눈치 보지 말고 많이~많이 누리라는 거야. 너만 좋고 행복하다면 남들이 아무리 저속하다고 비웃어도 상관하지 말고 즐기라고 권하는 거야.

다음으로 네가 마지막에 말한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한 행복은 논리상으로 존재할 수 없단다. 빛과 어둠이 함께할 수 없듯이 한 사물 안에서 서로의 존재를 부정하는 모순된 두 특성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지. 그러나 선한 의도로 한 행동이 악한 결과를 가져 올 수는 있어. 이는 처음부터 상황을 잘못 판단했거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상황이 바뀌었기 때문이야. 의도했던 그 행동을 다른 행동으로 바꾼 것은 아니야. 그러나 정말이지, 좋은 의도로 한 일이니까 결과도 좋겠지 하고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행동했다가 큰 낭패를 보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

그러면 하버지, 남을 돕고 싶지만 결과를 확신할 수 없는 행동은 해야 돼 말아야 돼? 네 질문은 의도는 좋았지만 결과가 나빴다면 책임을 져야하느냐 말아야 하느냐하는 문제와 같구나. 인간이 모든 것을 내다보고 정확하게 행동할 수는 없단다. 그래서 행위의 결과가 이익을 줄 가능성이 훨씬 많으나 손해를 끼칠 가능성이 아주 없지 않은 행동을 하고 싶을 때도 생길 수가 있지. 이를테면 원자력 발전 같은 경우는 이익을 손쉽게 계산할 수 있으나 잘못됐을 때 치명적인 손실은 쉽게 계산되지 않으므로 유혹이 매우 커.

만약에 결과를 확신할 수 없는 행동을 하고 싶더라도 특정 상황에서 특정 행위가 가져올 이해득실을 가능한 범위 안에서 정확하게 따져봐야 결정할 수 있어. 병이 났을 때 먹는 약도 병이 난 부분에는 좋지만 다른 부분에 반드시 원하지 않는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야. 그래서 약을 만들거나 조제할 때 이해득실을 따지게 되. 마찬가지로 네 행위가 가져올 이해득실을 정확하게 따져봐야만 네 행위가 선한지 악한지 알 수가 있어.

재판에서도 그럴 의도는 없었으나 잘못하여 죽게 하거나 다치게 했다면 행위의 진실성이나 성실성 그리고 상황의 긴박성이나 방법의 실효성 등을 따져서 책임을 지운단다. 이렇게 따져보고 형량을 결정하는 것을 정상 참작이라 해. 선한 의도와 악한 결과를 종합하여 형량을 판단하는 거지.

그러나 최악을 피하기 위해 차악이라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 인간이라면 시행착오를 완전하게 피할 수는 없어. 만약에 행동의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변수들이 거의 모두 드러났다면 부작용을 최소화하면서 약을 조제하듯이 그 행동의 손실을 최소화하면서 이익을 극대화하는 행동계획을 세울 거야. 그래서 만약에 자기 행동의 결과가 최악으로 나타났을 때 법정에서 얼마나 정상을 참작해줄 것인지를 염두에 두고 행동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할 수도 있지. 그리고 그런 정도는 책임질 각오를 가지고 행동해야 돼.

자기 행동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결과를 더 확실하게 내다볼 수 있을 때까지 행동을 보류할 수 도 있다. 반대로 상황을 외면하고 이해득실을 깊이 따져보지도 않고 어떤 행동의 당위성만 주장한다면 그는 이미 자신의 행위의 결과에 대한 책임을 행위의 당위성에 떠넘겼기 때문에 무책임한 행동을 하려는 것이다. 어떤 행동이 상황과 상관없이 손해보다 이익을 더 많이 낼 수 있으니까 해야 된다는 일반적인 판단은 불가능하단다. 그래서 하버지의 결론은 상황과 행동을 특정했을 때만 그 상황에서 그 행동을 해야 될지 말아야 될지 따져보는 것이 가능하다는 거야. 그렇지 않다면 한마디도 말할 것이 없어.

하버지 그럼, 네 가지 행복 중에 내가 누릴 수 있는 것은 어떤 행복이야? 아! 그래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을 묻는구나. 당연히 악마가 추구하는 악한 행복은 안 되고 천사가 추구하는 선한 행복을 추구해야 되겠지. 그리고 남에게는 무해무덕한 행복이지만 너만 좋다면 그것이네게 선이니까 얼마든지 즐길 수 있고.

그러나 홍아야, 남에게 이익을 주지는 못할망정 조금이라도 손해만 끼칠 것이 확실한 행동은 네게 아무리 큰 만족과 행복을 가져와도 안 돼. 남에게 이익을 주는 것보다 손해를 끼치지 않는 것이 훨씬 더 쉽기 때문만이 아니야. 내가 강조하는 더 큰 이유는 이익 둘로도 하나의 손해를 원상으로 완전하게 회복시킬 수가 없기 때문이야. 어떤 일든지 완전하게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너도 잘 알겠지? 용서를 받으니까 죄값이 사라지는 거지 완전한 상태로 원상을 회복하여 죄값을 치르는 것은 누구나 영원히 불가능하단다.

자, 홍아야, 이번에는 하버지가 물을 께. 우리는 인간이니까 무엇을 실현해야 행복해질까? 인간성. 또는 인간의 가능성. 선악으로 볼 때 우리가 추구할 수 없는 행복은? 악한 행복. 추구해도 좋은 행복은? 선한 행복과 무해무덕한 행복. 그래, 그럼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행복은? 그 행복은 추구할 건지 말 건지는 상황 속에서 행동이 가져올 손익을 잘 따져봐야 돼. 와~, 우리 홍아가 어려운 서술형 문제에도 만점이네. 내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운 손녀야, 잘 들어줘서 정말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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