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실에서

감각의 마비와 싸우기

- 유일환(수유너머N 회원)

지난 주 예비군 훈련을 다녀왔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지루하고 소모적이기 짝이 없는 시간이었습니다. 무기력하게 이리저리 훈련장 순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문뜩 잊고 있었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폭약 냄새에 관한 기억입니다.

군에 입대 후 훈련소에서 처음 사격을 했을 때일 겁니다. 실탄이 든 총을 쏘면 고막이 찢어 질듯 한 굉음과 함께 매쾌한 폭약 냄새가 나는데, 그 냄새가 참 묘합니다. 사람들을 묘하게 흥분시킵니다. 첫 사격을 마치고 내무반에 복귀했을 때, 저는 훈련소 전체가 이상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는 걸 봤습니다. 다들 기분이 붕 떠있는 상태였다고 할까요. 마치 집단적으로 환각상태에 빠져있는 것 같았습니다. 아마도 제가 목격한 이러한 흥분은 누군가를 아무렇지 않게 살상하게 하는 힘일 것이며, 우리를 전쟁 속으로 휘말려들게 하는 어떠한 원동력일 것 입니다. 저는 이후에도 몇 번 사격을 했고, 그때마다 폭약 냄새를 맡았고, 사람들 주위를 휘감고 있는 흥분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살육에 이르게 하는 흥분의 기운. 저는 이것을 경계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폭약 냄새를 맡지 못하게 됐습니다. 더 이상 사람들을 휘감고 있는 흥분의 기운을 지각할 수 없게 된 거지요. 아마 사격이 매년 반복되는 익숙한 일이 되었을 때 즈음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귀청을 울리는 굉음은 여전히 들리지만 그 냄새의 감각은 꽤 오랫동안 잊고 있었습니다. 아니, 잊었다기보다는 오히려 제가 그 냄새에 너무 익숙해져서 감각이 무덤덤해졌다고 봐야 할 겁니다. 사격은 마치 ‘눈 치우는 일’처럼 매년 의당해야 하는 일이 되었고, 이 지독한 익숙함은 제 감각을 빼앗아 갔습니다.

지독한 익숙함. 그것은 우리의 감각을 마비시킵니다. 그것은 우리를 잘 듣지 못하게 하고, 잘 보지 못하게 합니다. 단지 냄새에 대한 감각만 마비시키는 게 아닙니다. 어떠한 부조리한 일이 벌어져도 그에 반응하지 못하게 합니다. 지금 우리사회가 그렇습니다. 국가권력이 최소한의 생존권마저 무자비하게 짓밟아도 웬만해선 분노하지 않습니다. 그게 언제라도 우리의 일로 닥쳐올 수 있음에도 불안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방송 매체에서 4대강 공사하는 꼴을 봐도, 공권력과 용역의 폭력을 봐도 혈압이 오르지 않고, 뒷골이 땡기지 않습니다. ‘이명박이 그렇지 뭐~’하고 그러려니 합니다. 웬만한 일은 그렇게 넘깁니다. 지독한 익숙함. 그것은 괴물입니다. 나의 이웃의 외침까지도 삼켜버리는 무서운 괴물입니다.

예고했듯이 <위클리 수유너머> 이번호에서는 밀양 송전탑 공사 반대 투쟁을 다뤘습니다. 직접 밀양을 방문해서 그곳 어르신들이 7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어떻게 투쟁해왔는지를 살펴보며 거기서 감지되는 전쟁의 기운을 담아봤습니다. 세운, 이경, 로자는 <밀양의 전쟁- 밀양 송전탑 투쟁현장 방문기>에서 구체적인 현장과 투쟁 상황을 담아냈으며, 이경은 <핵발전소는 왜 필요할까요?>에서 밀양 투쟁의 근본적인 사안인 핵발전소 문제를 짚어봤습니다. 그리고 고병권은 <밀양은 패배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패배하지 말아야 한다>에서 밀양 어르신들이 투쟁을 통해 지키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질문해봤습니다.

이렇게 각각의 기사들은 밀양의 농민들의 투쟁이야기를 여러 측면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 기사들이 공통적으로 밀양의 얘기를 함과 동시에 (명시적이든 그렇지 않든)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결국 모든 투쟁은 외침이기 때문입니다. 내 목소리 좀 들어달라는 외침이기 때문입니다. 그 외침은 우리를 향하고 있으며, 우리의 관심과 반응을 기다립니다. 밀양 송전탑 반대 투쟁은 7년 동안의 외로운 외침 끝에 이제 조금씩 우리와 만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송전탑 공사 강행이 임박해오는 지금 무엇보다 우리의 힘을 필요합니다. 겨우 ‘나’ 하나가 밀양에 관심을 갖는다고 해서 혹은 직접 투쟁 현장을 방문한다고 해서 당장 투쟁의 결과를 좌우하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모든 투쟁은 거기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가 있어야 여럿이 있을 수 있습니다. 자그마한 힘이나마 밀양 농민들에게 힘을 보태는 것. 이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이라도 내 이웃의 외침에 관심을 갖고, 반응했으면 합니다. 그것이 단지 당신들의 외침이 아니라, 오히려 그 외침은 언제라도 나의 것이 될 수 있는, 나의 외침임을 인식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끝으로 그동안 코너를 연재주신 AA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84호부터 소개해준 깨알 같은 일드의 세계는 이것으로 일단락 하게 됐습니다. 참고로 그동안 연재된 는 홈피 좌측 메뉴의 지난 코너 보기를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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