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두 개의 문>을 본 용산참사의 유족이자 활동가이신 정영신씨와의 인터뷰

- 박정수(수유너머R)

<두개의 문> 관람객이 4만을 돌파했다. 반가운 일이다. 그런데 마음 한 구석에 어떤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더 이상 가해자와 피해자를 따지지 말고 고통의 공감을 통해 모두 화해하자는 두루뭉술한 결론으로 영화가 읽히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 <두개의 문>을 본 일선 경찰들의 느낌을 듣고 싶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철거민 쪽 유가족들의 솔직한 생각을 듣고 싶었다. 경찰 쪽에는 선이 안 닿아서 지난 1월에 인터뷰했던 정영신 씨에게 연락했다. 토요일마다 안양교도소에 수감된 남편, 이충연씨 면회를 간다고 해서 그 길에 동행했다.

# 쥐들이 들끓어서….

안양교도소에는 작년에 재소자 인문학 할 때 와 봤던 곳이다.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교도소라 건물이 많이 낡았다. 정문을 지나면서 이충연씨의 수감생활에 대해 질문하자 영신씨가 뼈있는 농담을 했다.

감방에 쥐가 출몰해서 잠을 잘 수 없었대요. 안팎으로 쥐 때문에 고생이 많죠. 교도소 차원에서 쥐 소탕 행사를 했다고 하던데, 바깥에 있는 쥐도 좀 소탕했으면 좋겠어요.

면회실에서 만난 이충연씨는 뜻밖에도 인상이 너무 선하고 장난꾸러기처럼 보였다. 용산4구역 철거대책 위원장으로 철거반대 싸움을 이끈 전사의 풍모는 전혀 볼 수 없었다. 그는 한강로 토박이다. 용산 4구역 철거 용역으로 용산참사 현장에서 폴리스 방패를 들고 경찰들을 옹위했던 한강로 토박이 ‘양아치’들과는 친구, 선후배 호칭을 나누던 사람이다. 참사 전 철거 용역들의 횡포가 극에 달했을 때, 그 토박이 깡패들은 영신씨에게 “충연이 관뚜껑 덮기 전에, 충연이보고 빨리 떠나자고 설득하라” 협박했다고 한다. 충연씨를 너무 잘 알고 있던 터라 그들은 충연씨와 ‘레아’ 호프만 치면 나머진 다 무너지게 되어 있다고 여겼다 한다. 그런 얘기를 들으니 느와르 영화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난 참 가부장적인 사람이었는데….

처음 수감되고 나서 충연씨는 한 동안 시도 때도 없이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을 수 없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불타 죽고 자신과 동료들은 살인자로 몰려 감옥에 갇힌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 테니까. 지금은 마음을 안정을 되찾고 자기 대신 용산참사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싸우는 아내 정영신씨를 응원하고 있다고 한다. 불쑥 짓궂게 물었다. “영신씨에게 미안하지 않으세요?”

“미안하죠. 고맙고. 참… 고마워요.”

“나오시면 잘 해주셔야겠어요.”

“전 원래 가부장적인 남자로 자랐어요. 가사노동은 일절 안 해 버릇했죠. 여기서 깨달은 게 많아요. 이 싸움은 철거반대 싸움만이 아니라 사회구조 전체를 바꾸는 싸움임을 알았어요. 남녀관계, 부부관계에 대해서도 생각이 많이 바뀐 것 같아요. 여기서 청소하고 밥하는 습관도 길렀고요.”

“<두 개의 문> 관객 수가 4만을 돌파했습니다. 어떠세요? 얼마까지 갔으면 좋겠어요?”

“덕분에 용산참사의 진실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졌으면 좋겠습니다. 한 100만?”

충연씨는 밝게 웃었다. 그곳에서 신문이나 시사주간지 등을 많이 읽으면서 검사장 임명 등 최근의 시사정세에도 빠삭했다. 6년간 연애하다가 결혼하여 함께 운영해보려고 손수 꾸민 레아호프에 재개발계고장과 용역이 밀어닥치고 결혼 8개월 만에 끔찍한 참사로 헤어지게 된 신혼부부의 안타까운 사연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다만 “토요일마다 충연씨 면회에 올 때는 일부러 더 예쁘고 화려하게 입고 와요. 내 얼굴이 어두어보이면 충연씨가 몹시 걱정하고, 어머니에게 예쁜 옷 좀 사주라고 난리친다”는 영신씨의 말 속에 속 깊은 부부의 정이 느껴졌다.

# 처음 <두개의 문>을 보았을 때 당황했지만, 경찰의 고통을 처음으로 생각하게 되었어요.

12분간의 짧은 면회를 마치고 나와 서울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두 개의 문>에 대한 영신씨의 생각을 물었다. “처음 <두 개의 문>을 본 게 언제인가요? 그때 느낌은?”

“지난 5월 달에 DMZ국제다큐멘터리 영화제에서 처음 봤어요. 그 때는 지금보다 철거민의 입장은 더 적게 편집된 상태였어요. 많이 당황했어요. ‘레아’에서 같이 싸운 감독들인데, 우리 얘기보다는 경찰 측 시선을 더 많이 담은 것 같아서.”

“사실 지금 개봉된 것도 철거민이 망루 농성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도 없고, 다짜고짜 화염병 던지고 새총 쏘는 모습만 비춰져서 당황하는 사람들이 많던데…”

“유가족 중에 저보다 좀 어린 동생이 있어요. 같은 처지라서 전부터 속내를 터놓고 지내던 사이인데, <두 개의 문> 보러 갔다가 30분도 안돼서 뛰쳐나왔다면서 화난 목소리로 전화를 했어요. ‘감독들 도대체 뭐냐고. 우리들 말은 하나도 안 넣고, 화염병 던지는 장면만 반복해서 보여주면 어떤 사람이 강제진압이 부당했다고 생각하겠냐’고. 그래서 제가 그랬죠. 제발 영화 다 보고 나서 말해달라고. 며칠 후 영화를 다시 봤다면서, 아쉽지만 그래도 용산사태를 잊지 않게 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하더군요.”

“영신씨 경우에는 게스트초청 단체 관람 등으로 여러 차례 영화를 봤을 텐데, 어떠세요?”

“솔직히 2009년 1월 9일 그때의 상황을 화면으로 반복해서 보는 게 너무 힘들어요. 그래서 어머니들께는 보지 말라고 말씀드렸어요. 그런데 영화를 몇 번 보면서, 전에는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걸 깨달았어요. 유독가스와 화염에 싸인 망루 안에서, 사람들이 불에 타 죽는 걸 본 경찰들의 마음이 어땠을까? 그들은 그 트라우마를 어떻게 감당하고 살고 있을까? 나도 힘든데, 나도 그 때의 충격으로 시시각각 올라오는 우울증적인 감정에 시달리는데, 그 ‘생지옥’ 같은 현장에서 살아남은 경찰들은 얼마나 그때의 고통과 살아남은 자의 죄의식에 시달릴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됐어요. 정말이지 처음이에요. 이 영화 보기 전에는 한 번도 경찰에 대해 그런 생각 가진 적 없거든요.”

# 말단 경찰의 고통을 이해한다는 것이지, 국가폭력을 이해하고 용서한다는 뜻이 아니다

“경찰들도 <두개의 문>을 단체관람을 하기도 하고, 일각에선 영화가 경찰의 고통을 말하고 있는 듯 이해되기도 하는데….”

“경찰의 고통을 이해한다는 뜻은 저희가 받은 고통의 크기만큼, 딱 그만큼 간신히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이지, 그 이상의 의미는 아니에요. 경찰의 입장을 이해한다거나 그들도 어쩔 수 없었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어요. 최근에 모 일간지 기자가 전화를 걸어서는 <두개의 문>을 보고 어땠냐, 김석기 전 서울경찰청장을 전화 인터뷰했는데, 철거민, 경찰들 모두 희생자라면서, 죽은 자들의 명복을 비는 천도제도 지냈다던데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더군요. 그래서 제가 그랬죠. 그건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천도제는 예전에 김남훈 경사를 위한 거였지 죽은 철거민을 위한 건 아니었어요. 지난 총선 때 경주에서 출마한 김석기에게 항의 방문하러 간 유가족들을 외면하고 심지어 선거법 위반으로 고소까지 해서, 지금 경찰에서 계속 소환장이 날아오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의 말을 어떻게 믿냐고 쏘아댔죠. 그랬더니 그 기자가 “아직까지 경찰에 대해 미워하는 감정이 남아 있군요”라고 하더군요. 기가 막혔어요. 저희가 받은 고통만큼 살아남은 말단경찰의 트라우마도 이해한다는 것이지, 그들을 생지옥으로 몰아넣은 경찰 수뇌부와 통치권자를 이해하고 용서하고 화해하자는 것은 아닌데, 어떻게 그 뜻이 그렇게 이해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또 다른 언론사 기자는 김남훈 경사 아버지님과 함께 영화를 볼 생각은 없냐 고 묻더군요. 그분이든 일선경찰이든 철거민을 테러리스트로 규정하고 끔찍한 국가폭력을 휘두른 것이 명백하게 잘못된 행위였다는 생각이 없는 사람들과는 나란히 앉아 화해의 포즈를 취하기는 싫습니다. 행여 유가족 어머니들에게 그런 제의를 하지는 않을까, 그러면 우리 어머니들은 정말 못 참고 폭발하실 텐데 싶어 걱정이죠.”

# 더 심각한 상처로 남은 부상자들. 그분들을 위해서라도 구속자 사면이 이루어져야

“당시 망루에 밥해주러 올라갔다가 화재 후 경찰에 끌려나온 여자 분이 계세요. 지금도 그때의 충격으로 집밖을 못 나오고 계세요. 전화도 안 받고. 또 기소된 사람들 중 두 명은 거듭된 재수술 끝에 장애인이 됐지만 1심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고 항소심을 기다리고 있어요. 신체적 고통도 고통이지만, 정신적 상처와 원한 때문에 용산의 ‘용’자도 입에 담지 못하고, 용산 쪽은 쳐다보지도 못해요. 경찰만 봐도 패닉상태에 빠지신대요.”

“그 분과는 연락 하시나요?”

“연락이 잘 안되요. 저희는 물론이고 사회와 관계를 끊은 채 고립되어 계세요. 계속 그때 죽었어야 한다는 생각만 하고 계시지요. 이번에 경향신문에 기사화된 용산참사 부상자 인터뷰가 사건 후 처음이에요. 지금 형을 살고 있는 사람보다, 수술과 장애로 지금껏 고립되어 지내시다 이제 다시 항소심이 재개되어 구속이 되면 얼마나 더 괴로우시겠어요. 그동안 구속된 8명에 대한 사면을 포기하다시피 했는데, 그분들을 생각하면 반드시 사면복권 되어야 해요. 안 그러면 그분들은 구속자와의 형평성 때문에 항소심 재판과 동시에 구속되어 4년을 감옥에서 살아야 해요. 용산참사는 이미 많은 사람들의 기억속에서도 잊히고 있는데, 장애의 몸으로 징역을 살아야 한다니, 그분들 마음이 어떻겠어요.”

# 다시 켜지는 남일당 자리의 추모의 촛불들. 7월 20일 1277개의 촛불로 다시 만나길…

“일전에 진보신당에서 용산 CGV를 대관해서 <두개의 문>을 단체관람하고 남일당 자리에서 추모행사를 가졌죠? 그때 뵈었을 때는 매우 착잡해 보이시던데… ”

“처음엔 좀 껄끄러웠어요. 용산CGV 6층 복도에서 밖을 내다보면 참사가 벌어졌던 용산 4구역과 지금도 싸우고 있는 용산 3구역 일대가 다 보여요. 기분이 참 묘하더라고요. 2010년 철거 후 공터가 된 남일당 자리에 들어간 건 그때가 처음이었어요. 지난 1월, 3주기 때 기자회견하면서 그 앞에 간 것이 전부였죠. 많은 사람들이 손에 촛불과 국화를 들고 용산 CGV에서 남일당 터까지 꾸역꾸역 걸어오는 데, 그걸 보면서 마음속에 맺힌 뭔가가 풀어지는 느낌이었어요. ‘아, 많은 사람들이 용산참사를 기억하고 있고, 애도하려고 하는데, 내가 회피하면 안 되겠구나’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래, 남일당을 망각하려 하지 말자. 사람들과 함께 남일당 자리에 서서 추모의 촛불을 켜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그래서 이번 금요일(7월 20일)에 추모행사를 가지려고 합니다. 그날이 용산참사 1277일째 되는 날 이예요. 그날 남일당 자리에서 1277개의 촛불이 켜지는 걸 보고 싶어요. 단 한 사람이 오더라도 남일당에 서린 죽음의 기억을 되살리고 싶어요.”

버스는 영신씨와 나를 함께 대한문 앞에서 열리고 있는 쌍용차 집회장으로 데려다 주었다.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는 와중에 백 여 명의 사람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영신씨를 알아보는 활동가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무대에선 문정현 신부님이 발언을 하고, 멋진 춤사위를 보여준 필리핀에서 온 이주노동자의 발언이 이어졌다. 돌아보면 다 친구 같은 정겨운 얼굴들. 촛불과 국화꽃으로 서로의 마음을 쓰다듬는 고마운 사람들. 가슴에 덴 흉터처럼 남은 남일당 공터에서 1277개의 촛불로 다시 만나게 되기를…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