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앎에 대하여

- 남창훈(면역학자)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 원리는 사실 간단한 이야기이다. 어떤 입자(또는 물질)를 특정 위치에 고정시키는 순간 그것의 움직임에 대한 표현 가운데 하나인 모멘텀(운동량)을 정확히 알 수 없고 반대로 운동의 모멘텀을 정확히 계산하는 순간 그 물질의 위치를 정확히 알 수가 없다는 얘기이다. 이를 수식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x ∆p ≥ ħ/2 (x는 위치를 p는 운동량을 표현한다.)

하나의 입자에 대한 우리의 물리적 지식이 어떤 한계를 지니고 있는지 설명하고 있는 원리이다. 그런데 하나의 입자가 아니라 두 개의 입자가 서로 상호 작용하면서 움직이는 것을 계산하는 것은 하나의 입자의 경우와 비교해볼 때 그 복잡성이 비약적으로 상승하게 된다. 더 나아가 세 개, 네 개 여러 개의 입자들이 존재하는 어떤 계에서 입자들의 움직임을 계산하는 것은 현대 물리학의 한계를 초과하는 일이 된다. 이 경우는 오로지 확률적으로 계산할 수 있을 따름이다.

약물(화학적 제재) 개발이나 백신 개발이 1990년대 이후 주춤하고 있는 현상을 두고 프랑스의 한 생물학자가 이는 현대 생물학(특히 분자 생물학)이 보이고 있는 환원주의의 한계라는 지적을 하는 논문을 읽었다. 환원주의를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물질의 기본 단위는 원자다. 원자들이 모여 분자가 되고 그 분자들이 모여 눈에 보이는 물질이 된다. 따라서 원자나 분자의 속성을 정확히 이해하고 이를 조정하거나 변모시키면 물질의 물성에 계산된 변화를 줄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이러한 주장을 조금 더 극단으로 몰고 가면 원자나 분자에 의해 물질의 물성이 결정된다는 것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러한 주장을 환원주의라 할 수 있다. 생물의 경우 생명현상을 결정하는 것은 다름아닌 생물체의 기본 단위인 유전자라는 주장이 바로 이에 해당한다. 문제는 이러한 주장이 현대 분자 세포 생물학의 대세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앞서 물질에 대한 물리적 측정의 한계와 다입자 물질계에 대한 측정의 난해함을 언급하였다. 그런데 생물학이 다루는 생명체에는 다입자 수준의 복잡성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복잡성이 내재해 있다. 하나의 세포 안에는 수십만가지 유기 무기 분자들이 서로 복잡다단한 네트워크와 컴플렉스를 구성하여 어떤 기능을 발휘한다. 네트워크와 컴플렉스를 구성하는 방식 또한 주어진 상황이 어떠한지에 따라 달라진다. 생체 안에는 다양한 종류의 세포들이 엄격한 질서를 통해 공존하고 세포와 세포가 연결되고 어떤 구조체를 만드는 방식 역시 헤아리기 힘들만치 다양하다. 이러한 생명체를 이해하고 여기에 어떤 조치를 취하거나 변화를 주고자 하는 요구가 있다. 이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현대 생물학은 생명체 속의 세포, 세포 속의 분자에 주목하였다. 세포 속에는 어떤 분자들이 있는가? 그 분자들의 모양새는 어떠한가? ‘가’라는 분자는 어떤 다른 물질들과 반응하는가? 그 분자를 없애거나 변형시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러한 질문들에 답하는 것이 실험의 주된 주제였고, 학과의 내용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접근법으로 생명체와 생명현상을 이해한다는 것은 마치 어느 행성이나 그 행성이 속한 행성계를 통해 은하계의 원리를 미뤄 짐작하는 것 만큼이나 무모한 것이었다. 물론 이러한 주장이 현대 분자 생물학, 세포 생물학, 생화학의 성과에 대하여 의미가 없다고 통박하는 것은 아니다. 과학(연구)가 어떤 한계를 지녔다고 해서 어느 시점 시대에서 그 연구가 지니고 있는 유의미성이 소거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이러한 한계를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더 강하게 밀고 나가는데 있다. 한계를 직시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그것을 뛰어 넘는 시도가 더할 나위 없이 값진 일이겠지만 한계를 무시하거나 인정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아주 큰 족쇄로 작용하는 법이다. 현대 생물학의 주류는 이러한 한계에 대하여 무척 소극적으로 대응한다. 나는 그러한 소극성의 가장 큰 이유를 과학을 잠식한 이데올로기에 두고 있다. 바로 현대 생물학이 빠져 있는 환원주의가 그 원인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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