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지가 쓰는 편지

하버지의 행복론 (3)

- 윤석원(전 전교조교사)

4. 공감능력과 선악

그러면 하버지, 악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은 왜 그런 거야?  아~, 그건 공감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란다. 그래?

공감 능력을 가진 사람들은 남의 괴로움을 느끼면 자신도 괴로워지기 때문에 당사자와 힘을 모아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려고 애쓰게 마련이야. 이 마음과 노력을 가리켜서 사랑이나 자비 또는 인(仁)이라고 문화권마다 달리 부른다고 하버지는 생각해. 남의 괴로움을 안타까이 여기는 사랑과 불쌍히 여기는 자비와 측은히 여기는 인은 문화권마다 다른 말이지만 ‘공감한다’는 공통된 뜻이 들어있다고 봐.

이 말들은 남의 괴로움을 안타까이, 불쌍히 또는 측은히 여기는 인간의 공감능력이 문화권을 넘어서서 공통된 것임을 뜻해. 공감은 언제 어디서든지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중요하고도 필요한 인간의 본성이라는 뜻이지. 이 중요하고도 필요한 인간성이 풍부하다면 남을 괴롭히려 했을 때 자기가 먼저 괴로워야 되니까 남을 괴롭힐 수 없게 되는 거지. 거꾸로 부족하다면 남의 괴로움을 괴로워할 수 없기 때문에 나 잘 살자고 너 못살게 할 수가 있어. 공감이 이 잘 안되니까 악이 나타나고 사람 사이의 갈등이 생긴다고 봐.

그런데 홍아야, 문화권마다 즐거움이 아니고 왜 괴로움에 대한 공감을 강조했지? 괴로움에 공감하면 마음이 어떻겠니? 당연히 괴롭지. 누구든지 괴로우면 어떻게 하지? 괴로움에서 벗어나려고 애쓰겠지. 누구와 함께? 당사자와 함께. 그러한 마음이나 노력을 각 문화권은 뭐라고 말했지?  사랑, 자비, 인. 그럼, 문화권마다 즐거움보다 괴로움에 공감해야 됨을 강조했던 까닭은? 인간이 사랑이나 자비나 인한 마음을 가질 수 있고, 더 많이 가져야 함을 강조하려고. 홍아야, 넌 어찌 그리도 똑똑할 수 있니. 하버지 손녀니까.

그런데 남의 괴로움에 대한 공감으로 생기는 사랑과 자비와 인을 ‘바람직한’ 인간성이라고 하자. ‘바람직하다’ 말로 미루어 본다면 공감능력으로 생기는 사랑과 자비와 인의 크기가 사람마다 같다는 거니 다르다는 거니? 잘 모르겠니? 아, 다르다는 뜻이야. 그러니까 공감 능력이 없거나 부족해서 사랑이나 자비나 인한 마음을 갖기가 어려우니까 그것이 바람직한 능력이 되는 거지. 그렇고말고. 그런데 바로 그 공감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이 남의 이해관계를 무시하고 자신의 잇속만 챙기려드는 것은 남의 괴로움을 실감하지 못하기 때문이야.

홍아야, 지금 하버지가 공감능력이 부족하니까 남의 이해관계를 무시한다고 말했는데 ‘공감능력 부족과’과 ‘남의 이해관계 무시’는 무슨 상관이지? 하버지가 지금 공감능력이 부족한 사람은 손해를 당한 사람의 괴로움을 공감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 잇속만 챙기려고 남에게 함부로 손해를 끼치게 된다고 했잖아. 그래 홍아야, 너야말로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 만큼 총명하구나. 오, 이쁜 내 손녀.  

그러면 홍아야, 어떤 사람들이 자기에게 이익이 되기만 한다면 남에게 손해를 끼치는 행동도 마다하지 않는댔지? 공감하기 어려운 사람들. 그럼 그들이 그러는 것은 남들의 손익을 계산하지 못하기 때문이니? 아닐 거야. 그럼, 뭐야? 이성적인 계산과 감성적인 공감과는 다른 능력이잖아. 바로 그거야. 그들도 남들의 손익을 아주 세밀하게 계산할 수 있어. 다만 손익에 따라서 남들이 괴로워하거나 즐거워하는 것이 나의 괴로움이나 즐거움으로 실감 되지 않을 뿐이야. 그래서 남이야 괴롭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자기 잇속만 챙길 수가 있게 되지. 

홍아야, 그런데 공감을 하려면 역지사지(易地思之)와 동일시(同一視)와 감정이입(感情移入)이라는 이 세 가지 공감적인 해석이 동시에 가능해야 된단다. 홍아야, 여기서 해석이란 상대방의 감정을 번역하는 것 즉 나의 말로 바꾸어 놓는 거야. 세 가지를 제대로 바꾸어서 생각해봐야 정확한 번역이 나와.

첫째로 역지사지는 무얼 바꾸어 생각해보자는 거니? 서 있는 자리. 그래 입장이라고도 하고 입지라고도 하는데 주어진 상황을 바꾸어 생각해보자는 거지. 그러면 동일시는 무얼 바꾸어 생각하자는 거 ? 몰라. 아, 역할을 바꾸어 생각해보자는 거야. 내가 네가 되어 네 노릇을 또는 네가 내가 되어 내 노릇을 하며 생각해보자는 거야. 그럼 감정이입은 무얼 바꾸어 생각해보자는 거 ? 감정을 바꾸어 느끼어 보자는 거겠네. 그렇지. 네가 내 감정으로 또는 내가 네 감정으로 느끼고 말하고 행동해보자는 거야. 이 세 가지를 바꾸어서 추리·상상해본 것을 나의 말로 옮긴 것이 이른바 공감적인 해석이야.  

보통 사람은 공감뉴런의 작용으로 이 세 가지 공감적 해석 활동이 동시에 그리고 자연스럽게 일어난단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다는 것이 하버지는 쉽게 믿어지지 않는구나.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실제로 있는데 그들의 전두엽에는 신경 전달 물질인 세라토닌이 잘  분비되지 않아서 공감이 잘 안 된대. 세라토닌이 안 나오면 공감 뉴런이 작동할 수도 그래서 감정을 조절할 수도 없대. 그리고 이들이 이렇게 된 것은 세라토닌 분비 구조에 선천적인 이상이 있거나 뇌손상 때문이래.

그러나 하버지가 공감능력이 부족한 원인을 찾는데 선천적인 장애요인보다 더 중시하는 것은 후천적이고 경험적인 장애 요인이야. 하버지는 어린 시절에 세라토닌을 활발하게 분비하여 공감뉴런을 작동시킬 공감 기회가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감 능력도 충분하게 자랄 수 없어서 공감 장애자가 된 사람들이 더 많을 거라고 보는 거야. 한마디로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과 믿음 즉 공감이 충분하지 않았던 거야. 그래서 어린 시절 세라토닌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기에 그 분비 기능과 아울러 공감능력이 퇴화되어 있을 수도 있어.

그럼 홍아야, 네 어린 시절에 공감 경험이 어때서 지금 너의 공감능력이 어떻다고 생각하니? 하버지, 내 어린 시절에 누구의 사랑을 얼마나 받았는지 그걸 내가 어찌 알아. 그건 하버지가 더 잘 알잖아. 아, 그렀구나. 그리고 어떤 기준도 없이 나의 공감능력이 그 기준보다 많다거나 적다고 말할 수도 없잖아? 그 그렀구나. 

그런데 홍아야, 남의 괴로움을 느끼지 못하면 공감된 괴로움에서 함께 벗어나려는 마음이 생기지 않고 함께 벗어나려는 노력도 할 수 없게 되니까 무엇이 생기지 않는 댔지? 글쌔. 괴로움을 벗어나게 하거나 덜어주려는 노력을 뭐라더라? 아, 알겠어. 공감을 못하면 사랑이나 자비나 인이 생길 수가 없어.

그래, 우리는 먼저 남의 감정을 읽어야만 그 감정에 맞추어 맞장구도 치고 그 감정을 해치지 않도록 조절된 행동을 할 수가 있어. 우리는 주어진 상황 속에서 남의 감정을 읽고 그 감정을 존중하며 그에 알맞은 언행을 하려는 노력을 사랑이나 자비 또는 인이라고 말했어. 그러나 먼저 남의 감정을 읽어내지 못한다면 상황에 맞추어 자신의 감정이나 언행을 조절하지 못하고 이기적인 욕구와 행동만을 앞세우게 된댔어. 

감정 조절의 중추는 뇌의 이마부분인 전두엽이래. 이곳에는 세 가지 정보가 모여서 이를 종합하여 최종 판단을 하게 된대. 먼저 뇌간의 생리적인 욕구와 변연계의 감정적인 욕구가 시상과 전대상회를 거쳐 이곳으로 올라온대. 다음으로 현재 상황에 대하여 감각기관으로 지각한 정보들이 다중 감각 연합에서 이곳으로 올라온대. 마지막으로 측두엽과 두정엽에 저장된 필요한 기억들도 전두엽이 불러들인대. 그리하여 세라토닌만 충분하게 분비되면 전두엽이 활성화 되어 경험에 비추어 지각 내용을 판단하고 공감으로 감정을 조절한 다음에 상황에 들어맞는 행동을 판단한다는 거야. 너는 전두엽에서 공감으로 종합적인 판단을 한다고만 알아 뒤.

그런데 전두엽이라는 기계적인 장치에 이상이 없지만 공감뉴런을 작동시키는 세라토닌이란 신경전달 물질의 분비가 부족하게 되면 공감으로 감정을 조절하지 못한 언행을 하게 된대. 그러면 뇌간의 생리적인 욕구에만 지배된 전두엽은 감정적인 색깔을 지워버리고 오로지 계산된 이기심에 따라서 작동될 뿐이래. 전기가 흐르는 도체가 있고 부도체가 있듯이 공감 장애인 사람들은 부도체와 같아서 남의 감정에 거의 반응하지 못하는 차디찬 사람이 된다는 거야.

 양심 또는 초자아라는 것은 어린 시절에 사랑하는 사람을 역할 모델로 삼아서 ‘나도 저렇게 돼야지’하고 닮아 있는 나야. 그런데 어린 시절에 공감할 만한 사랑을 받지 못했다면 그 누구도 닮으려고 하지 않았을 테고, 그만큼 양심 즉 초자아의 발달이 지체되어 있을 거야. 그래서 그들의 마음속에는 도덕적인 기준을 제시하고 이를 어기는 이기적인 자아를 꾸짖을 만큼 영향력이 있는 양심 또는 초자아가 제대로 자라지 못했을 거야. 그래서 양심이 희미한 사람들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자기 이익만 추구하며 거리낌 없이 나쁜 짓을 할 수 있게 된대. 이 모두가 어린 시절 공감할 만한 사랑이 부족해서 그래.

홍아야, 하버지는 네 엄마처럼 엄마노릇을 잘하는 엄마를 본 일이 없어. 그리고 네가 네 살 때는 인형들을 네 딸이라고 부르고 엄마노릇을 하며 먹여주고 입혀주고 고쳐주고 재워주었단다. 그렇다면 이론만으로는 네 초자아가 어떠해야 하겠니? 엄마 닮아 있어야겠지. 그런데 엄마가 나를 진심으로 사랑했겠지만 나는 엄마처럼 양심적이고 헌신적인 초자아를 가지진 못한 거 같아. 그리고 꼭 그래야 좋은 건지도 모르겠어.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는 나는 모르게 죽을 때까지 엄마를 닮으려고 할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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