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두+개의+문

- 변성찬(수유너머 N)

<두 개의 문>은 극장 개봉 이후 하나의 ‘사건’이 되었다. 작게는 독립영화계의 사건이고(<워낭소리> 이후 최단기간 2만 돌파), 크게는 한국사회 전체의 사건이다. 연일 단체관람과 매진행렬이 계속되고 있고, 각계 유명인사의 관람 독려와 ‘번개’와 GV 참여가 이어지고 있다. 어떻게 이런 사건이 가능했고, 또 이 사건은 이후 어떻게 전개되어 나갈까? 이후 전개에 대해서는 쉽게 예측하기 힘들지만, 이 사건을 낳은 몇 가지 이유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두 개의 문>은 ‘용산참사’발생 당시와 이후에 그 현장을 지켰던 수많은 카메라와 감독-활동가의 ‘연대’, 성적소수자 활동단체이자 독립다큐멘터리 제작집단인 ‘성적소수문화 환경 모임-연분홍치마’의 남다르게 예민한 ‘소수적 윤리감각’, 그리고 이제 ‘망각의 깊은 잠’에서 깨어난 우리 모두의 각성, 적어도 이 세 가지 특이점이 한 데 만나 일으킨 ‘대사건’이다.

<두 개의 문>은 지난 3년 간 만들어진 10 번째 ‘용산다큐멘터리’다. 앞 선 9편의 작품이 없었다면, <두 개의 문>은 만들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다른 작품들과 마찬 가지로 칼라 TV와 촛불방송국 레아를 비롯한 많은 미디어 활동가들의 기록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라는 점에서 그렇고, 앞 선 영화들이 그 참사의 당사자(철거민과 활동가)의 말을 충분히 전달하고 있었기에 출발할 수 있었던 영화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두 개의 문>은 그 참사 당사자의 하나인 ‘경찰특공대원’의 이야기다. 영화는 그들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어떤 놀라움과 공감에서 출발한 영화다. 그들이 법정 진술에서 드러낸 공포의 기억에 대한 놀라움, 그리고 어느 순간 그들이 어쩔 수 없이 드러내는 미세한 주저와 망설임의 징후에 대한 예민한 포착, 이것이 이 영화의 본격적인 출발점이다. 그 예민함, 그것은 연분홍치마가 그동안 보여준 윤리감각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현장에 있던 경찰특공대원 역시 가해자이기 이전에 피해자라는 건, 어찌 보면 자명한 사실일 수도 있다. 하지만 천박하다 싶을 만큼 뻔뻔했던 체제의 재판에 맞서 용산참사에 대한 ‘영화적 재판’을 수행하면서, 그들을 심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려는 태도를 끝까지 견지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영화는 이제 참사의 상징이 된 어떤 이미지(불타는 망루의 이미지)에서 시작하고, 오랜 우회로를 거쳐 다시 그 이미지로 돌아간다. 그 우회로에는 거의 30년의 시간이 담겨 있다. 물론 그 긴 우회로(또는 시간의 거듭되는 순환)는 용산참사를 통해 드러난 체제의 폭력의 논리와 그때 그곳에 오를 수밖에 없었던 철거민의 삶의 논리를 뚜렷하게 맞대면시키고자 하는 이성적 전략의 산물이지만, 그것은 또한 그때 그곳의 진실에 조금씩 힘들게 다가갈 수밖에 없었던 고통스러운 심정의 표현이기도 하다. <두 개의 문>은 이렇듯 ‘두 개의 언어(물처럼 차가운 언어와 불처럼 뜨거운 언어)’로 이루어진 영화이며, 그 언어는 ‘물과 불로 인해 생지옥’이었던 그 현장을 올바르게 재현해내는 최선의 언어이다.

감독에 따르면, 이 영화의 출발점에는 ‘복잡하고 복합적인 감정’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 날 함께 지키지 못했던 것에 대한 미안함, 참사 이후 현장을 지켰던 많은 미디어 활동가의 수고에 대한 고마움, 현장에서 활동하는 미디어 활동가로서의 자긍심, 그러나 그 미디어 활동의 산물이 철거민들을 심판하기 위한 재판에서 1차적인 증거로 사용되고 있는 현실에 대한 자괴감, 그러나 무엇보다 어느 순간 마주치게 된 또 다른 무력감과 답답함 등이 그 복잡하고 복합적인 감정의 결들이다. 시급한 현장속보의 역할을 하기에 다큐멘터리 카메라는 너무 느렸다. 또는, 그 역할은 다른 매체들(현장에 있던 많은 사람들의 핸드폰 영상과 디지털 카메라, 인터넷TV와 레아방송국의 생중계)이 더 잘 수행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 무력감과 답답함은 투쟁현장에서 다큐멘터리의 역할은 무엇일까라는 물음을 낳았고, 영화적이고 정치적이며 윤리적이기도 한 그 물음이, 마침내 <두 개의 문>을 낳은 것이다. 용산 참사의 상징이 된 어떤 이미지, 9편의 용산다큐멘터리는 그 이미지를 단순히 반복 재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거듭 새롭게 의미화하고 있다. 10번째 작품인 <두 개의 문> 은 앞선 작품들의 성과를 공유하며 다시 한 번 새롭게 어떤 문턱을 넘어섰다. 아직도 남아 있는 또 하나의 문턱이 있다면, 그것은 모든 용산다큐멘터리에 반드시 등장하고 있는, 그러나 어떤 작품도 충분히 그 실체를 드러내지 못하고 있는 참사 현장 당사자 중 하나인 ‘용역의 진실’을 드러내는 일일 것이다. 어째서 그 진실은 경찰의 진실이나 사법의 진실보다 더 접근하기 어려운 것일까? 그 이면에는 법과 경찰보다 더 힘이 센 건설 자본의 힘이 있다. 요즘 뜨고 있는 드라마(<유령>과 <추적자>)를 보고 있노라면, 그 용역의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왠지 목숨을 걸어야 할 것 같은 불길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쨌든 그 용역의 진실이 밝혀질 때 비로소 용산의 진실은 온전히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그 진실을 드러내는 것, 무엇보다 용역들 또한 가해자이면서 동시에 근본적인 피해자 중의 하나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 이것이 아직 풀지 못한 용산다큐멘터리의 숙제일 것이다. 그리고 연분홍치마가 <두 개의 문>에서 보여준 ‘소수적 윤리감각’은 그 새로운 문턱을 넘기 위한 출발점 또는 일종의 필요조건일 것이다.

얼마 전, 광화문 인디스페이스 앞에서 단체관람 무대인사 차 온 홍지유 감독을 만났다. 연일 계속되는 단체관람과 매진행렬에 대해 축하의 말을 건넸더니, “좋기도 하고 걱정도 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자리에서, “잘 되고 있는 데 무슨 걱정이야?”라는 말과 “원래 모든 일에 걱정이 많은 게 얘네 특징이지(무슨 일에든 신중하고 생각이 많은 게 연분홍치마의 색깔이지)”라는 말이 거의 동시에 쏟아졌다. 나중에 다른 자리에서 배급사 직원을 통해서 그 걱정이 어떤 걱정인지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두 개의 문>의 감독들이 가장 걱정하고 있는 것은, 영화는 성공하고 용산투쟁은 실패하는 것이란다. 최소한 구속 철거민들의 ‘8.15 특사’라도 성사되어야 그들의 걱정이 조금이라도 해소될 것 같다. 공은 우리에게, 즉 <두 개의 문>이 ‘목격자’이자 ‘방청객’으로 초대한 우리 모두에게 던져졌다. <두 개의 문>의 극장개봉이 진정한 ‘사건’이 되기 위해서는, 여전히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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