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뒤, 남은 사람들

길선주, 구원과 역사가 만나는 방식 (1)

- 권보드래

3·1 운동이 결코 우연한 사건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어느 모로나 명백하다.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1·2년 전부터 ‘세계 개조’의 논의가 본격화된 그 직후까지, 민족 독립의 호기를 맞았다고 생각하고 선언이나 시위를 계획한 것은 한두 사람이나 두어 단체에 그치지 않았다. 천도교 일각에서는 이미 1916년부터 독립운동 논의가 있었으며, 서울과 평양의 기독교 일파에서도 독립선언을 준비하고 있었고, 1918년 말에는 중국 길림성에서 ‘무오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다. 1919년 초에 이르면 천도교와 기독교, 그리고 서울지역 학생들이 각기 독립운동을 준비하고 있었으니 3·1 운동은 이들 자생적 흐름을 조직하고 통합함으로써 비로소 현실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사회 각 분야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독립운동이 준비되고 있었지만, 1910년대에 존재할 수 있었던 유일한 조직이 종교 조직이었던 만큼 3·1 운동에서의 ‘민족대표 33인’은 순전히 종교계 인사로 구성되었다. 다른 분야, 교육·산업·문화 등에서의 가능성이 포괄되지 못했던 까닭에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자면 33인의 고유명사 낱낱은 대부분 낯설게 보인다. 만해와 용성이라는 불교 승려 두 명은 그래도 이름 난 축이지만, 나머지 천도교계 15인과 기독교계 16인 가운데 귀에 익은 이름은 손병희와 이승훈 정도이기 쉽다.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밖에 권동진·이종일·최린 등 천도교계 인사 중에서 몇 명의 이름은 알아볼 수 있겠지만, 기독교계 인사로는 박희도의 이름 정도가 긴가민가할까, 대개 처음 보는 이름일 것이다.

지분이라고 표현한다면 어떨지 모르지만, 3·1 운동에 대해 기독교가 대체로 소극적 태도로 일관해 온 까닭은 그 밖에도 또 있다. 3·1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중 당일 낭독식 때 네 명이 불참했는데 이들은 모두 기독교계 인사였고, 또한 기독교계 인사 대부분은 후일 일제 통치에 뚜렷하게 협력적인 모습을 보였다. 기독교가 자랑하는 항일의 내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3·1 운동과 직결시키기 쉽지 않았던 이유는 이런 내력에 있다. 허나, ‘민족대표’라는 이름에는 어긋날지 모르지만 기억할 만한 생애를 산, 3·1 운동과 민족주의를 풍부하게 읽기 위해서라도 기록해 둘 법한 인물은 33인 중에서도 여럿이다. 한국 기독교회의 역사에 뚜렷한 자취를 남긴 영계(靈溪) 길선주는 그 중 대표적인 경우라 하겠다.

1869년생인 길선주는 본래 ‘장생’을 목표로 선도(仙道)를 연마하던 청년이었다. 야은 길재의 후손으로 태어나 본래 경전과 시문을 익히며 살았으나, 17세 때 동네 소악배들이 길선주의 집을 습격해 온 중에 죽을 고비를 넘기고, 이후 삶과 구제라는 문제를 골똘히 마주하게 된 것 같다. 재능 있고 정력까지 갖춘 실천가 타입이었던 듯, 관성교(關聖敎)를 거쳐 도교의 세계에 입문한 후에는 산중에서 일심수련, 몇 년 되지 않아 ‘길 도인’으로서 명성을 떨쳤다고 한다. 지금은 변두리 쇼 레퍼토리 정도로나 남아 있는 차력(借力)이란 본래 도교에서 연원한바 천지의 기운을 빌어 육체적 능력을 최고도로 끌어올리는 기술이었는데, 길선주는 특히 각종 차력에 능숙한 것으로 소문났었다고 전한다.

길선주가 기독교에 접한 것은 20대 막바지이다. 함께 도교 수련을 했던 친구가 먼저 기독교를 접한 후 책자 등을 들고 와 길선주를 설복하려 했던 것이다. 미심쩍어하던 길선주가 기독교에 귀의한 것은 “길선주야, 길선주야, 길선주야.”라는 세 번의 부름이 하늘에서 들려온 이후였다고 한다. 마치 사무엘을 불렀던 세 번의 목소리처럼, 조선의 ‘하늘’이 기독교의 ‘하나님’으로서 길선주를 호명했던 것이다. 이후 길선주의 삶은 오롯이 기독교에 바친 것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길선주는 새벽 기도회를 창시하는 등 목사 안수 이전에도 정력적인 선교 활동을 펼쳤으며, 평양 장로 신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장대현 교회에 부임하여 서북 지방의 기독교 열풍을 이끌었다. 1907년, 일본의 조선 침탈이 가열되어 가는 한편 저항도 그치지 않아, 도회지에서는 교육·계몽 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고 남쪽 지방에서는 의병 항쟁이 계속되고 있을 무렵이었다.

조선시대 내내 기호나 삼남(三南)과 다른 역사를 써 왔던 서북 지방에서는 어떠했을까? 1907년은 평양 대부흥운동의 해였다. 그 얼마 전 교파별로 담당 지역을 할당한 후 기독교는 바야흐로 적극적인 선교 활동을 시작하고 있었는데, 특히 평안도에서 교세의 확장이 놀라웠고, 그 핵심에는 대부흥운동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길선주는 세계적인 대각성운동Great Awakening의 일환이었던 조선 대부흥운동에서 누구보다 핵심적인 인물이었다. 1907년 1월 있었던 최초의 대부흥 집회에 대해서는 인상적인 기록이 여럿 전한다. 그 날 길선주는 ‘죄의 속박’과 ‘회개’라는 주제를 실연하고자 직접 사슬로 온몸을 묶고, 속박된 채 괴로워하다 회개하고 기독교에 귀의함으로써 극적인 해방감을 맛보는 장면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수많은 청중들이 이 장면에 통곡하고 스스로 죄인임을 자백했다. 남편이 첩을 얻은 후 매일같이 첩이 죽기를 기도했다는 사람, 친구의 돈을 떼먹었다는 사람, 이웃을 시샘하고 헐뜯었다는 사람— 이들은 “제가 죄인입니다.” 울부짖으며 만인 앞에 자기 죄를 고백했고 “저 같은 죄인이 용서받을 수 있겠습니까?” 간절히 물었다. 구원에 대한 열망이 집단적으로 폭발한 순간이었다.

응답 1개

  1. tibayo85말하길

    어디서도 들을 수 없는 3.1운동의 속살, 재밌네 재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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