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지가 쓰는 편지

하버지의 행복론 (4)

- 윤석원(전 전교조교사)

5. 역설적인 공감 능력

하버지를 가장 괴롭게 하는 장면은 굶주린 엄마가 굶주려 앙상한 어린것을 안고 바짝 마른 젖을 물리고 있는 신문 기사의 사진과 같은 장면들이란다. 그러나 만약 하버지가 성모에 안긴 성자상처럼 잘 먹어서 포동포동한 아이가 엄마의 품 안에서 엄마 얼굴을 바라보며 방긋 웃는 그림을 보았다면 앞 장면과는 반대로 기쁨에 넘쳤을 거다.

흔히 남의 괴로움에 대한 공감이 우리의 마음을 무겁고 어둡게 만드는 것으로만 보일 수도 있어. 진정한 공감이라면 당사자만큼 괴로워야 되고 당사자보다 괴로움을 더 크게 느낄 수도 있어. 그러나 하버지는 앞 장면에서 비참함을 느낄 수 있었기에 적어도 그 정도만큼은 뒤 장면에서 기쁨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해. 하버지는 이러한 공감 능력을 대비적인 공감 능력이라고 이름 붙였어.

만족한 느낌은 부족한 느낌 즉 결핍의 느낌을 뒤집어놓은 느낌이라고 보는 거야. 하버지는 만족한 느낌은 부족한 느낌에서 오고 부족한 느낌 또한 만족한 느낌에서 오는 대비적인 느낌이라고 믿는 거야. 기쁨과 슬픔, 사랑과 미움, 즐거움과 괴로움이 서로 상극인 것 같지만 서로가 원인되어 서로의 느낌을 발생시키는 대비적인 느낌들이라고 믿는 거야. 이렇게 대비적으로 느끼는 감정의 원리가 공감에도 그대로 작용한다고 보는 거야. 그래서 남의 괴로움을 느끼는 만큼 즐거움을 또는 즐거움을 느끼는 만큼 괴로움을 느낄 수 있다고 믿고 있어.

대비적인 느낌이라는 것은 거꾸로도 그만큼 느끼는 거지. 그러니까 괴로움을 공감할 수 있는 그 만큼 거꾸로 즐거움도 공감할 수 있어야 돼. 그렇다면 홍아야, 괴로움을 거꾸로 그만큼 느끼면 무엇이니? 즐거움. 그럼 즐거움을 거꾸로 그만큼 느끼면? 그야, 괴로움이지. 그럼 홍아야, 남의 괴로움에 공감하지 못한다면 남의 기쁨과 행복에 동참할 수 있겠니 없겠니? 당연히 없어.

모자상의 앞 장면에서 비참함을 느낄 수 있었던 그 만큼 뒤 장면에서 기쁨을 느낄 수 있다면 공감의 대비 능력이야말로 역설적인 능력이야. 그리고 진정한 행복을 느끼기 위해서는 반드시 남의 괴로움에 공감할 수 있어야 된다는 것이 또 하나의 역설이야. 사랑하는 엄마라면 사랑하는 어린것이 괴로움에서 벗어났을 때 자신이 벗어난 것 보다 더 행복할 거야. 자신의 괴로움보다 아이의 괴로움을 더 크게 느꼈고 그래서 더 간절하게 벗어나게 하고 싶었고 그래서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한 엄마야. 그러니까 아이가 괴로움에서 벗어났을 때 그 엄마 마음이 어떻겠니? 하버지는 엄마가 괴로웠던 그만큼 행복을 맛볼 수 있다고 말하고 싶은 거지? 그렇단다.

하버지가 행복에 공짜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특히 너를 기르던 네 엄마를 보면서란다. 엄마가 아이의 욕구를 공감하지 못한다면 아이를 제대로 기를 수가 없을 거야. 대부분의 엄마는 아이의 욕구가 무엇인지 읽어내려고 온통 아이에게만 집중하게 돼. 그러므로 엄마는 자식을 사랑하는 만큼 자식의 고통을 자신의 것보다 더 많이, 더 크게 느낄 거야.

그러나 엄마는 아이의 괴로움에 대한 공감 때문에 언제나 무겁고 괴롭기만 한 것이 결코 아니란다. 아이가 건강하게 무럭무럭 자라며 재롱을 떨고 즐겁게 노는 것을 보고 괴로움에 공감했던 그 만큼 약동하는 생명의 기쁨에 공감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거야. 엄마들에게 이런 기쁨과 행복이 없다면 어떤 엄마가 아이를 키우는 고생을 다할 수 있겠니. 동전의 양면이 언제나 붙어 다니듯이 사랑의 기쁨과 행복에 사랑의 아픔과 괴로움이 대칭적인 짝을 이룬다면 사랑의 기쁨과 행복에 공짜는 없어.

석가가 어린 시절에 석가의 부모는 자식이 행복하기를 바라고 인간의 모든 괴로움을 보지도 듣지도 못하게 하려고 모든 불행으로부터 격리시키고 차단시켜서 기르려고 했었단다. 아파트에서 문명으로 편리와 편안을 누리는 오늘날은 인생의 괴로움으로부터 아이들을 격리하기가 그때보다 더 쉬워졌어. 아이를 거친 세파에도 다치지 않게 기르려고 아파트에 가두어 세상의 거친 물정도 모르게 석가처럼 아니 애완동물처럼 부모들이 많이 있을 것 같구나. 그러나 석가의 부모가 실패했듯이 오늘날에도 그러한 시도는 반드시 실패할 거야. 왜 그럴까? 공감능력의 역설 때문이야. 남들의 괴로움을 공감하지 못하게 했다면 당연히 남들의 행복에 초대받지 못할 테니까.

하버지는 석가와 달라이라마가 자비심을 그토록 강조하는 까닭을 조금씩 깨닫고 있단다. 남의 괴로움에 공감하라는 말이야. 즐거움보다 괴로움에 다 공감하라는 것은 그래야 진정한 행복을 추구할 수도 있고 또 맛볼 수도 있기 때문일 거야. 그래서 인생의 쓴 맛과 단 맛을 다 맛보고 사는 진한 삶을 살라는 거지. 인생을 진하게 살고 싶다면 공감능력을 키우기 위해 먼저 남의 괴로움에 공감하라고. 석가와 달라이라마의 가르침은 인생의 모든 인연을 끊기 위해 인생의 괴로움과 즐거움에 눈을 감고 마음 문을 닫아건 다음에 혼자만의 평안에 도달하여 거기에 머물라는 뜻이 아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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