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170일간의 파업을 마치며…

- 장인수(MBC 기자)

어느 주말 아침 회사에 출근했는데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이 보도국으로 날아들었습니다. 순간 “왜 하필 내가 출근한 주말 아침에…”라며 짜증이 밀려왔습니다.

쌍용차에 공권력을 배치하겠다는 당시 조현오 경기경찰청장의 기자 간담회 자리에서는 “날 더운데 고생 좀 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많은 기자들이 저처럼 생각한다고 면죄부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거 잘 알고 있습니다. 중요한 이슈에도 기자로서의 문제의식보다는 당장의 생리 욕구가 먼저 반응하는 일, 참 고치기 힘든 게 사실입니다.

또 하나 어려운 일 중 하나가 억울한 사람들의 호소를 절대 소홀히 듣지 않겠다는 다짐을 지키는 일입니다. 회사로 날아드는 수많은 억울한 사연 소식을 대할 때면 여지없이 “기사 되나?”라는 차가운 판단이 먼저 앞서곤 합니다.

그 죄일까요?

얼마 전 선거 때면 언제나 한나라당을 찍어 온 가족 한명이 제게 왜 그렇게 파업을 길고 질기게 하냐고 묻더군요. 딱히 뭐라 해줄 말이 없어 김재철과 특수 관계에 있는 여성분과 있었던 일들을 얘기해드렸습니다. 그랬더니 그 가족은 “아 그럼 검찰이 수사 시작할 테고 사장에서 물러나면 파업도 끝나겠네.”라더니 “근데 그런 중요한 일이 왜 다른 언론엔 보도가 안 되지?”라고 재차 묻더군요. 답답했지만 더 할 말이 없었습니다.

호소를 듣던 자리에서 내려와 호소를 해야 하는 입장. 이번 170일간의 파업이 MBC 기자들에게 준 뼈아픈 경험이었다고 믿습니다.

김재철이 물러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파업을 중단한 이유를 많이 묻습니다.

MBC의 파업은 김재철의 무능과 부패를 사회적으로 알리는데 적지 않은 효과가 있었고 특히 대선을 앞둔 정치권에 압박을 가하는데 큰 성공을 거뒀습니다. 8월이면 MBC 사장 임명 권한을 갖고 있는 방문진 이사들이 정치권에 의해 새로 임명되고 이 이사들이 MBC 사장을 교체할 것이라는 판단이 있었습니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파업을 끝내는 문제에 대해서는 반대 조합원들도 많았지만 현실적으로 김재철을 몰아내기 위해 지금은 잠시 파업을 접는 것이 좋다는데 합의가 있었습니다.

파업이 끝나는 날 김재철은 다시 대규모 보복 인사를 내렸고 그 결과 김재철 측이 강성이라고 판단한 수십 명의 기자들이 보도국에서 쫓겨나 더 이상 기자가 아닌 직종으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MBC 조합원들은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저항하고 있습니다. 승리가 눈앞에 왔다는 희망도 넘쳐나고 있습니다. 우리의 현장 투쟁이 외부로는 잘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사측은 권재홍 앵커 물러나라는 기자들의 글로 도배된 사내 게시판을 폐쇄하고 기자들이 자신의 자리에 붙여 놓은 선전물들을 떼어내는 등 말기적 광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금이 1945년 7월이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해방이 곧 민주 국가의 수립을 의미하지 않듯 김재철이 퇴출돼도 공정방송까지의 길은 멀고 험합니다. 우리 역사의 잘못이 MBC에서 되풀이 되지 않도록 끝까지 싸우겠습니다.

이번 파업이 MBC가 시청자들과 다르게 만날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이 되길 바라며 한 후배 기자가 파업 기간 중에 썼던 시를 소개하며 글을 마칠까 합니다.

자 신 감

가진 것이 줄어들수록 자신감은 되려 늘어간다

해고는 살인이라는 말 무슨 뜻인 줄 압니까 기자님
충혈된 눈으로 말하던 수염 덥수룩한 노동자에게
그땐 할 줄 몰랐던 말 그러믄요 잘 알지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버스요금 백 원 인상 지역난방도 7퍼센트 인상
자꾸만 오르는 물가에 서민들 가슴 멍든다며
가슴이 아니라 손으로 쉽게 뽑아냈던 기사
제대로 쓸 수 있을 것 같다

어차피 안 내보낼 거 인터뷰는 왜 하냐며
등록금 시위 현장에서 매섭게 다그치던 김기현 씨
스물세 살에 학자금 대출 빚 3천만 원 쌓인 그 사연
마저 물어볼 수 있을 것 같다

세워진 지 몇 년은 된 길가 천막 농성장
특이사항 없다며 그냥 지나쳐왔던 걸음을 멈추고
저기 저 안에도 사람이 있겠지 하며
가만히 속으로 울어줄 수 있을 것 같다

응답 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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