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안녕하세요, 로맨스 조입니다

- 사루비아

로맨스 조

로맨스 조

두물머리에서 로맨스 조를 만나기로 했다. 꽃모자를 쓰고 가방에 도시락을 챙겨서 중앙선 열차에 올랐다. 소풍가는 기분이다. 양수역에서 내려 많은 사람들은 아스팔트 깔린 ‘4대강 자전거 길’ 쪽으로 갔고, 나는 유기농 농사짓는 두물머리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개망초꽃이 가득한 밭길을 걸으니 로맨스 조가 작사한 노래가 절로 흥얼거려진다. “바람이 되어 만날까, 구름 되어 만날까, 강물이 되어 만날까, 바다 되어 만날까” -<정민아, 무엇이 되어>

점심을 먹고, 원두막 옆 나무그늘 아래에 로맨스 조와 나란히 앉았다. 뒤에는 강이 흐르고 앞으로는 색을 달리한 산이 겹겹이다. 그가 사포질 하고 있던 나무토막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아, 이제 인터뷰가 시작되는건가요?’라고 묻는다. 인터뷰 제안을 받고 해도 되는지 고민하고, 두물머리로 오는 내내 긴장했다고 한다. 인터뷰는 나무토막 이야기에서 자연스럽게 시작되었다.

보다, 줍다

로맨스 조에게서는 오랜 시간이 묻어있는 물건으로 무언가 만들고 있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쓰레기처럼 보이는 것들을 손질하는 손은 진지하다.

“저는 땅을 헤쳐서 무언가 줍는 일이 좋아요. 측은한 마음에 줍는 건 아니에요. 주워서 무엇을 만들겠다는 의도를 갖지도 않고요. 사물은 버려지기 전과 후가 매우 다른 형태를 가지고 있어요. 저는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느낌이나 성질이 좋아요. 버려져있는 위치와 내가 그것을 본 시간을 마주하는 일도 재미있고요. 줍는 일은 일종의 행위이기도 해요. 반복행위이지요. 저는 그런 반복이 좋아요. 이런 저런 생각이나, 고민, 계획 없이 어떤 행위가 필요할 때가 있어요. 저한테는 그런 반복 행위가 잘 맞아요. 김매는 것처럼. 저는 김매기도 좋아합니다(웃음).”

요즘 그는 선택적으로 줍는다. 멋진 물건이 있어도 만남 자체만 기억을 해두고 지나치는 때가 많다. 둘 공간이 없거나, 책임질 수 없을 때에는 줍지 않는다. 멋져서 가져다 놓았는데 또 다시 버려지게 되면 마음이 불편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집은 여전히 ‘지저분하다’. 어렸을 때부터 주워서 모으는 일을 좋아한 건 아니다.

두물머리 유기농 집회에서 아주까리 요정으로 변신한 로맨스 조

두물머리 유기농 집회에서 아주까리 요정으로 변신한 로맨스 조

“줍는 일은 ‘본다’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가지게 되면서 부터에요. 사진을 공부하면서 다른 시선으로 보는 경험을 했어요. 사진기는 보는 방식이기도 하지요. 프레임은 시선을 편협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집중하게끔 하는 장치가 되기도 해요. 줍는 일은 사진과 닮아있어요. 줍는 일에는 행위와 내가 사물을 어떻게 바라보는지가 함께 들어가잖아요. 예를 들어, 쓰레기가 널려 있을 때 내가 거기에 집중해서 뭔가를 줍는 일과, 세상 풍경이 널려 있을 때 내가 어떤 부분을 볼 것인지, 이 풍경과 다음 풍경은 어떻게 연결할 것인지에 대한 계획을 세우는 것은 사진을 통해 경험했어요. 그리고 둘 다 현장적이고요.”

자리깔고 늘어놓으면 그곳이 작업장이다

자리깔고 늘어놓으면 그곳이 작업장이다

그가 처음부터 사진을 공부한 건 아니었다. 장래에 대한 ‘별 다른 고민 없이’ 시간을 보내다가 사람들이 ‘전망이 좋다’고 하여 토목과에 들어갔다. 재미가 없었다. 아무런 흥미가 없는 것을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반 학기 만에 자퇴했다. 그러다 우연히 사진연구소 광고를 보고 ‘큰 자극 없이’ 사진을 접했다.

“기법과 기교를 배우는 사진 입시학원이었더라면 닫혀진 시선을 배웠을텐데 운이 좋았어요. 나이도 제일 어려서 관심도 많이 받았고요. 교육에서 중요한 건 관심인 것 같아요. 저는 관심 받은 것이 자극이 되어서 처음으로 뭔가 내가 주도적으로 무언가를 하고, 그것을 드러내는 행위를 했어요. 감상을 듣고, 피드백이 오는 경험이 좋았어요. 결국은 그런 것이 자극이 되어서 좀 더 내 시선을 확장하고, 깊이 들어가 보고 싶었던 욕망이 생겼던 것 같아요. 주변의 반응이 표현의 동기부여가 되지 않았을까 싶어요. 내 스스로 발굴하지는 않았거든요. ”

결국 사진학과로 대학을 다시 들어갔다. 아니나다를까, 그 당시 사진학과가 유행이었기에 거품이 가득했다. 생각했던 교육은 없었다. 유명한 사진작가들이 교수로 있었지만 자기 어필하기에 바빴다. 좋은 선생은 아니었다.

“영화과 수업을 더 많이 들었어요. 영화과는 선생과 학생이 진지해서 논쟁도 많고, 무미건조하지 않았어요. 저는 청강생인데, 나중에는 과제도 같이 하고(흐흐흐 웃음), 과제 발표도 했지요. 영화과 사람들이랑 여러 작업을 같이 했어요. 시나리오 해석을 사진으로 대입시켜보고, 영화에서는 잡지 않는 풍경을 잡는다거나 나만의 이야기를 만드는 방식으로 다큐멘터리를 찍었어요. 이런 부분이 영화과 친구들과도 합의가 되었고요. 이러다보니 작업으로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죠. 그 시기엔 발현하고 싶고, 드러내고 싶고 표현하고 싶은 것이 많을 나이인데 작업과 결부되어야 더 찐한게 생기잖아요.”

안녕하세요, 로맨스 조입니다

지난 봄 영화 <로맨스 조>가 개봉했다. 혹시나 싶어서 출연진 이름을 살폈지만 ‘조호연’은 없다. 제목만 같구나, 내 주변에도 로맨스 조가 있는데, 이름이 똑같네. 실제 로맨스 조가 생각나서 한참을 킬킬 거렸다. 앗. 그런데!!

“영화 <로맨스 조>도 영화과 인연에 있어요. 이광국 감독이 친구에요. 제 이름으로 떠오르는 게 있다고 해서, 이름을 빌려줬어요. 이 친구는 홍상수 감독의 조감독이었어요. 영화 만드는 방식이 재미있어요. 전체 틀만 잡아놓고 나머지는 변수가 끼어들어서 채우는 방식이에요. 뻔한 로맨스 드라마 같은 영화이지만 돌발, 변수, 우연이 들어있고. 그것을 중시하는 영화에요.”

어려서부터 부여받은 이름으로 불릴 때와, 내가 선택한 이름 사이에는 틈이 존재한다. 닉네임을 보면 그 사람의 일면이 보이기도 한다. 자신이 원하는 삶의 모습을 별칭으로 짓거나, 자신의 숨겨둔 내면을 드러내기도 한다. 로맨스 조는 후자이다.

“로맨스 조에는 의미보다 뉘앙스만 담겨 있어요. 이 뉘앙스는 영어로 romance라고 쓰는 게 아니라, 선술집에 한글로 쓰여진 ‘로맨스’ 있잖아요(나뭇가지를 들고 땅바닥에 ‘로맨스’라고 명조체로 쓰면서) 이 지점이에요! 이걸 어떤 지점이라고 말로 정확히 짚지는 못하겠는데. 에…. 늦은 밤, 비에 젖은 아스팔트의 느낌. 시장 뒷골목의 느낌이라고나 할까요?

20대 초·중반에는 인상도 차갑고 사람들이 접근하기 어려워했어요. 냉정해 보인다는 말을 많이 들었지요. 내면에는 로맨스 조가 있었는데 말이에요. <푼돈들> 밴드를 시작하면서 로맨스 조라는 닉네임을 지었어요. 이 시기에 스스로 눌러뒀던 욕망을 적극적으로 발현했어요. 하고 싶었던 입장도 하나 생겼지요. ‘로맨스 조’에 충실한 행위를 하고 다녔어요. 능청스럽고 느끼하지만 쓸쓸하고 알 수 없는 뉘앙스. 원래 목소리가 낮지만 조금 더 낮게, 딱딱하지 않고 부드러운 말투, 그리고 눈빛! 이런 눈빛을 하고 싶었어요(꺅- 정말 눈빛 발사) “안녕하세요, 조호연입니다”라고 하면 여성분들과 악수하기는 힘들잖아요. 그런데 “안녕하세요, 로맨스 조입니다” 라고 하면 묘하게 웃기기도 하고, 수상하기도 해요. 로맨스라는 입장을 갖게 되니까 사람들과 편하고 능청스럽게 만나게 되었어요. 이름 하나에 내 욕망을 살짝 얹어서 표현한 셈이지요.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날 수 있었고 관계가 많이 바뀌었어요. ”

옛 정서 발굴 밴드, <푼돈들>

표현하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대학을 졸업하고는 암울했다. 돈벌이에 대한 욕구는 없었고, 좀 더 개인 작업에 몰두하고 싶었다. 하지만 개인 작업은 생계를 꾸릴 수 없었다. 공사장에서 일했다. 그러다보니 표현거리는 없었고 하루하루가 계속 허망했다.

“암울하지 않았으면 <푼돈들>은 만들어지지 않았을거에요. 만들어질 당시에는 멤버들 모두가 다 암울했거든요. 그러다 중고 LP가게를 하시던 형님을 알게 되었어요. 코딱지만한 가게에 아지트처럼 모였지요. 쓸쓸하고 허한 사람들이 아늑한 LP가게에 모여서 기타치고 노래하고, 자장면 시켜먹는 재미로 시간을 보냈어요.

어느 날 한국 7,80년대 밴드음악을 들었는데 새롭게 와 닿았어요. 특히 <휘버스>의 ‘그대로 그렇게’ 는 너무 신선했어요. 이 곡을 시작으로 점점 우리나라 7,80년대 음악에 관심을 갖게 되었죠. 계속 듣다보니 이런저런 맥락이 보이더라구요. 그 당시 밴드는 다 복수형이에요 ‘~들’, 밴드 이름은 외국어로 지었어요. <바니걸스>, <블루드래곤스>, <로커스트>, <데블스>. 그런데 전두환 때 앨범에 외국어 표기를 못하게 했어요. 이 밴드들은 토끼소녀들, 청룡들, 메뚜기, 악마들로 나왔어요. 이런 현상들이 당시 사회상과 문화와 연결되어 있는지라 재미있었지요. 우리나라 7,80년대 음악을 중심으로 숨겨진 음악을 발굴해보자 싶어서 밴드가 결성되었어요. 이름도 ‘~들’이 들어가게 하고 싶었고, <엽전들>생각도 나서 결국 <푼돈들>이 되었어요.”

암울함에 젖어있던 세 사람은 <푼돈들>의 로맨스 조, 다크 박, 데불스 허가 되면서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푼돈들>을 찾는 사람들이 많았다. 덕분에 우연적이고 극적인 만남은 더욱 늘어났다.

동네 예술가, 로맨스 조

<푼돈들>이 활발하게 활동할 무렵 05, 06년도에 대안공간 붐이 일었다. ‘복합문화공간’이라는 단어가 생기고 기존의 갤러리, 화랑에 대한 비평공간도 늘어났다. 우연찮게 인연이 닿아 그도 대안 공간 카페를 운영하게 되었다. 카페에 다양한 사람들이 몰렸다. 그는 카페를 창구 삼아 표현하는 사람들과의 만남에 집중했다. 기존의 제도권 예술 언어에서 벗어나 다중적인 행위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이즈음이다.

“2000년대 초반부터 공공예술 사업에 대해 연을 맺고는 있었어요. 스텝이라든지, 설치, 기술적인 활동 등을 하다가 작가로 본격적으로 참여하게 된 것은 07년도에요. 그 때 ‘예술로 1촌 맺기’라는 사업으로 망원동에서 활동을 시작했죠. 내가 사는 곳과 흡사한 마을에서 어떤 표현을 하고 그 곳에 섞일 수 있는 입장이 된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흥미로웠어요. 어떤 생각과 행위와 반응이 우연적으로 만들어지고, 그것을 기록하는 점이 재미있었지요. 장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았어요. 함께 무언가 만들어내기 위해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동원해야했어요. 거기에 장르가 중요하지는 않았어요. 제게는 축제 같은 시간이었지요.

공공예술이라 하면 공동체, 회복, 기존 자본과 권력에 대한 비판의식, 문화비평의식이 깔려있을 거라 생각하시지만 저는 그런 건 아니고요. 우선 그런 걸로 시작했다면 즐기지 못했을거에요.”

망원동 마을 활동은 정부의 문화사업 중 하나였다. 단기 지원 프로그램이었고, 지원에 기댈 수 밖에 없는 조건들이 답답했다. 조목조목 비판도 해보았지만 한계에 부딪혔다. 꾸준히 다른 방식을 모색 했다. 우연히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방학동에서 일하는 사회복지사를 만났다. 로맨스 조는 현재 방아골종합사회복지관 생태복지공공예술분과에서 일한다. 보통 문화사업 프로그램은 작가에게 목돈을 주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는 이런 관계가 싫어서 월급제로 전환했다. 노조가 잘 되어있는 복지관이어서 의무는 없는데 4대 보험을 지원한다. 주 15시간을 일하고, 월급은 작년엔 70만원을 받았고, 올해는 80만원을 받는다. 이런 수치들은 그간 공공예술 사업에서는 없었던 관계이다. 처음부터 기획을 함께 해서 생계, 인건비에 대한 논의가 잘 되었다. 좋은 조건이 만들어지고, 환경이 변했다.

“제가 월급 받는 일이 뭐냐하면 주1회 오전에 산책을 하는 거에요. (웃음) 공공사업을 하면 기본적으로 지역연구가 있어요. 근데 이렇게 연구라고 하고나면 연구가 되나, 연구라는 표현을 쓰지 않아도 되는 것들이 많아요. 내가 받아들이기 좋은 입장을 갖는 것이 더 좋아요. 그래서 연구모임이라는 것을 빼고 산책모임을 어슬렁 어슬렁 했어요. 목적 없이 하루 산책을 시작하고, 그렇게 하다보면 이게 심심해서라도 산책의 컨셉을 찾게 되요. 그 컨셉이 중요한 연구가 되고, 재미를 찾는 순간이지요! 자발적으로 재미를 느껴가면서 연구를 한다는 거. 이게 순서가 맞지. 연구자로서의 입장이 되면 보는 방식이 닫혀지게 되죠. 마을의 생활과 삶, 일상의 문화를 읽기 위해서는 연구보다는 템포에 맞춰지는 행동들을 읽어야 해요. 발견하고 드러내고 그것을 즐거워하고, 이런 것들이 삶의 템포와 맞아줘야 하는 거에요. 그래서 월급을 받는 상황이 좀 일 같지 않은 경험이에요. 방학동에서 하는 사업들이 다 그래요. 기존에는 돈이 지급되면 지역마을 연구, 마을 연구회, 마을 자료집, 이렇게 되었는데 우리는 그런 게 없어요. 산책모임 ‘어슬렁어슬렁’, 텃밭모임 ‘우주농(宇宙이기도 하고, would you 農?이기도 하다)’, 마을 카페 ‘도깨비방(폐쇄된 공영주차장 사무실을 마을 사람들과 토크쇼(간담회)를 통해 사랑방으로 바꾸었다)’. 이런 것이 우리의 활동이에요. 한편 우리와 함께 시작한 사회복지사는 힘들어 했어요. 사명감이 투철했고, 복지관의 생태는 아주 빠르게 돌아갔는데 우리와 함께 어슬렁거리고 놀았으니까요. 우리한테 월급을 줘도 되나 하며 상당히 힘들어했다고 하더라구요(웃음). 그렇게 1년을 보냈어요. 1년을 돌아봤을 때에는 좋은 자양분이 많이 보였죠. 그게 가시적으로 드러나기도 했고요.”

쌓여있는 걸 무너뜨리지 마라, 흐르는 것을 막지 마라

어떻게 로맨스조가 도시에서 살 수 있을까? 지역에서 마을을 만들고 밭일을 좋아하는 그가 어떻게 도시에서 살 수 있는지 의아하다. 왠지 시골에서 소 풀 먹이러 다니고, 그 동안 자신은 하늘을 바라보며 생각에 빠졌을 법한데, 그는 서울 용산에서 태어났다.

“저는 굉장히 도시적인 남자입니다. 제게 도시는 ‘도회적 스타일’, 쿨가이 이런 것이 아니고, 생활의 공간이었어요. 어린 시절 감성의 영역을 도시가 많이 구성했고요. 저는 굉장히 도시를 동경했어요. 88년 올림픽을 하면서 빌딩이 세워지고, 내부순환로를 처음보았지요. 시멘트가 수직 수평이 맞는 무언가가 생겨나고요. 이런 것에 대해서 저는 반감보다는 동경심이 있었어요. 뭔가 큰 건물이 죽죽 세워지는 걸 봤을 때, 저한테는 큰 경외감이었어요. 남산 밑에 살아서 자연적 환경은 풍성했어요, 풍성하니까 건물이 더 경이로워 보였던 것 같아요. 지금은 생각이 많이 달라졌지만. 어린 시절 이런 경험은 무시할 수 없는 거에요. 혜원 씨(애인)가 직조틀을 이용해서 천을 짜고 사진을 찍었는데 ‘쌓여있는 걸 무너뜨리지 마라, 흐르는 것을 막지 마라’라고 글을 적어뒀더라구요. 이 부분에 상당히 공감했어요.

제가 지금 마을 만들기에서 하는 활동은 기존에 쌓여있는 것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것을 만들고자 하는 건 아니에요. 도시 안 건축물, 자본과 권력으로 짜여진 공간에서도 관계는 있어요. 공동체가 있었는데 갑자기 마을 만들기라는 새로운 공동체를 내세우는 표현에는 반감과 답답함이 있어요. 거기에 문화와 예술을 제일 내세우고 있지요. 저는 지금 동네를 어떻게 예술로부터 방어할 것인지가 제일 걱정입니다.”

요즘 시민단체나 지역에서 가장 인기 아이템은 마을, 텃밭이다. 마을은 사람이 모여살기 시작한 이래로 계속 있었던 것이고, 집 앞 짜투리 땅에 이것저것 심어먹던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닌데 근래에는 이것이 ‘사업’이 되고 ‘프로그램’이 되었다.

“문화예술 판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관계들, 삶, 농사를 섣부르게 다뤄요. 예술을 한참 위에 두고 삶을 포섭하려고 하지요. 이런 태도는 잔인해요.”

예술관을 물었더니 손사레를 친다.

“이름이 공공예술가 밖에 없어서 원치 않게 전문가, 예술가로 내몰려요. 나도 일반인인데…사람들이 생각하는 삶과는 한참 떨어져 있는 예술을 우리한테 대입했을 때 답답함과 묶인 기분이 많이 들어요. 사람들은 예술가를 고결하고 고귀하게 만들고 싶어해요. 그들이 생각하는 예술가는 다 고흐와 같죠. 그렇게 죽어야 하고, 굶고, 배고프고. 거기에 우리가 어떻게 비교가 될까 싶어요. 우리의 입장은 예술가와는 너무 다르니까 실망하시는 분들도 많아요. 우리도 예술가를 떠나서 창작자로서 만들고 싶고, 손대고 싶은 것이 많은데 말이에요.

하고 있는 활동이라든지 ‘내가 이렇게 살고 싶어’ 이런 게 관점이잖아요. 제 활동이 예술로 읽혀도 좋고, 사회활동으로 읽혀도 좋고, 삶의 형태로 읽혀져도 상관없어요. 굳이 예술로 얘기할 필요는 없어요. 여러 관점이 있는데 예술로 툭 떼어 얘기하기가 좀 그래요. 결국은 삶의 방식으로 귀결 되는데 말이에요. 그런데 예술의 범주에서 ‘예술은 삶의 방식이다’ ‘예술은 농사다’ 이런 도식들을 상당히 많이 써요. 결국 예술로 다시 흡수해버리죠. 예술이 정의하는 삶은 답답해요. 내 삶이 무엇으로 얘기되어도 괜찮지만 앞뒤가 바뀐 듯이 예술로 속박되는 것은 갑갑해요. 예를 들어 삶을 참 잘 사는 사람들. 저 사람은 참 잘 사는 것 같다, 저 사람이 사는 방식이 참 흥미롭다고 한다면 그 사람에게서 읽을 수 있는 것은 좋은 예술, 좋은 교육 등 다 읽을 수 있어요. 삶에 다 스며들어 있는 것이지요.”

증식하는 로맨스

하나로 귀결되어 정의되는 삶. 이 삶에서 차이는 제거되어야 할 것으로, 우연은 차단해야하는 요소이다. 정의가 삶을 정리해버린다. 사진가가 사진만 찍어야지 농사는 왜 짓나, 농부가 농사만 지어야지 투쟁은 왜 하나, 엄마가 집에서 애 보고 밥 차려야지 글은 왜 쓰나, 학생이 공부해야지 왜 다른 활동을 하고 있나. 하지만 귀결된 정의와 고정된 정체성으로 벗어났을 때 나는 다른 존재가 된다. 하나의 정의에서 벗어나는 것은 정의 없음이 아니라 정의 넘침이며, 정체성 없음이 아니라 정체성 넘침이다.

좋은 틀 하나 만들어 놓고, 거기에 들어오는 변수로 영화를 채우는 것이 홍상수 감독의 작업 방식이라고 했던가. 로맨스 조의 현재 모습도 이와 같다. 좋은 환경 하나 만들어 놓고 변수가 왔을 때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하여 우연을 맞이한다. 무수히 많은 우연만큼이나, 그는 무수하게 달라질 수 있었다. 푼돈들 보컬, 리듬 기타, 공공예술가, 개인작업을 할 때에는 사진가, WETA(국제생태화장실협회) 임원, 넝마공작단, 어느 중학교 교과서에서는 화가, 푼돈들과 두물머리에서는 로맨스 조, 상암동에서는 루꼴라 조, 성북동에서는 원트롱 조, 방학동에서는 인디안 조! 그의 로맨스는 무한히 증식하고 변신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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