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역사의 뒷골목

‘꼰대’들은 가라! – 근대국가의 원조 꼰대 미국의 ‘건국의 애비들’ (1)

- Beilang(동아시아사상사연구자, 뉴욕이타카)

1. 들어가며

‘근대국가’는 전근대적 질서의 표상인 왕의 목을 자르는 상징적 ‘부친살해’를 감행하며 탄생하였다. 그렇게 국가는 구성원들의 무한한 희생을 요구하는 궁극적 ‘절대 공동체’로 등장하였다. 그러나 길어야 몇 세기를 넘지 못하는 근대국가의 오래지 않는 기원은 근대국가의 절대성을 위협하는 근거가 된다. 절대성이란 시간을 초월하는 것이기에. 근대국가가 여전히 신화적 힘에 의존해 자신을 신비화하고 그 유구함을 내세우곤 하는 것은 이런 연유이다. 그러나 신화는 역사가 아니다. 여기서 ‘국부(國父)’라는 왕을 대신하는 다른 ‘애비’가 등장한다.

‘건국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이라 불리는 미국의 ‘국부’들은 후에 미연버의 ‘주’가 되는 영국의 13개 식민지가 독립을 성취해가는 일련의 과정에서 ‘독립 선언서’(1776)를 만들고 서명한 인물들, 영국과의 독립전쟁(1775-1783)을 수행한 인물들, 그리고 연방헌법(1787)과 ‘권리장전’으로 알려진 최초의 수정헌법 10개 조항(1791)을 만드는데 공헌이 큰 인물들 가운데 특별히 중요한 역할을 한 일군의 인물들을 지칭한다. 다른 여러 근대국가들과 유사하게 독립전쟁을 통해 독자적 영토와 주권을 확보하는데 기여한 사람들 그리고 다양한 세력을 통합해 한 국가의 정치적, 법적 기반이 되는 법률을 기초한 사람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좀 특이한 점이라면 ‘건국의 아버지들’이 지칭하는 인물들이 한둘이 아니며 고정적인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인물군은 건국에 핵심적 역할을 수행했으며 초기 대통령을 지낸 조지 워싱턴, 존 아담스, 토마스 제퍼슨, 제임스 매디슨 4인과 초대 국무장관 알렉산더 해밀턴,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벤자민 프랑클린, 그리고 초대 연방 대법관 존 제이를 포함한 7인이지만 여기에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연설로 유명한 패트릭 헨리, 진보 사상가 토마스 페인, 그리고 존 아담스의 사촌 사뮤엘 아담스 등이 추가되거나 다른 인물을 대치하기도 하며, 개인이나 집단이 나름의 별도의 리스트를 만들기도 한다. 다시 말해 핵심적인 5-10인을 중심으로 건국에 기여한 다양한 인물들의 느슨하고 주관적인 집합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 ‘건국의 애비들’

미국 ‘건국의 애비들’

2. 우상이 된 근대의 애비들

미국이라는 근대의 패자는 역사적으로 다양한 집단의 이민이라는 상당히 명확한 계기에 의해 이루어진 나라이기에 토양적 연속성이나 혈연적 순수성과 같은 요소를 신비화해 집단의 근거로 삼기 어려운 조건에서 탄생하였다. 이런 제약 속에서 미국에서 ‘건국의 아버지들’은 다른 나라 ‘국부’의 위상을 압도하는 중요성을 띄게 된다. 단순한 건국의 영웅이라는 이미지를 넘어서 초인적인 능력과 심오한 지혜를 갖춘 결함이 없는 성인 내지는 반인반신의 아우라를 가진 존재로 등장한다.

기독교적인 배경 아래 ‘건국의 아버지들’을 신의 대리인으로까지 승격시키는 극단적 평가는 패권주의, 애국주의와 맞물려 미국을 역사 속에서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선민의식과 미국은 다른 나라 눈치 보지 않고 뭐든지 원하는 것을 할 권리가 있다는 ‘미국 예외주의’ 담론과 괘를 같이 한다. 이들이 조선의 영정조와 동시대인인 18세기말에서 19세기 초의 인물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우상숭배’라 해도 부족함이 없다. 이것이 말해주는 바는 근대국가란 역사의 길고 짧음에 상관없이 이런 ‘애비’의 존재, ‘애비’에 대한 ‘환상’을 요구한다는 뜻이겠다.

물론 이런 환상이 미국 역사 속에서 도전 없이 유지되어온 것은 아니다. 민권운동과 여권운동을 거치면서 미국이 역사에서 행해온 심각한 내적 차별과 폭력을 인식한 진보적 세력은 ‘건국의 아버지들’이란 노예를 소유한 부유한 백인 남성들로 자신들의 계급적 이익을 대변한 집단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난을 퍼붓기도 했는데 이는 역사적 사실과 상당히 부합한다. 처음 5대 대통령까지를 보면 4명, 리스트를 넓혀 10대까지를 보면 8명, 노예를 소유한 마지막 대통령인 18대까지를 보면 12명이 노예를 소유했다. 이런 사실만으로도 신의 대리인에 가까운 위상을 지녔던 건국의 애비들 그리고 그 이후 정치적 지도자들의 도덕적 위상은 큰 타격을 입는다.

역사 속에서 이들에 대한 평가와 해석은 실로 다양하다.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민주주의의 기틀을 만들어낸 초인적 현인들이라는 평가와 인류의 평등과 인간의 보편적 권리를 내세웠음에도 정작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던 노예 문제 하나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도덕적 위선자들이라는 평가, 철저히 기독교(개신교) 사상에 입각해 기독교 정신을 국가형성의 기초로 삼은 지극히 종교적인 인물들이라는 평과 함께 외형적인 종교적 색채와는 달리 기존의 종교에 비판적이었고 그래서 정교분리를 고안해 내었으며 그들이 기초한 문서에서 종교적 색채를 최대한 배제하려한 심정적 이신론자(deist)이라는 극단의 평들이 공존하며, 이 두 극단 사이의 좀 더 정교하고 중립적인 여러 견해들이 존재한다.

그들에 대한 평가와 그들을 둘러싼 담론은 미국이라는 나라를 어떻게 상상하고 어떤 서사를 통해 그 상상을 뒷받침하는가에 따라 달라지는 것으로 역사학자, 정치학자, 법학자들에게는 끝없는 논문거리를 제공하고 누가 담론의 주도권을 쥐느냐하는 것이 실제 정치의 손익계산과 밀접하게 연결되기에 이들을 둘러싼 다양한 의견들과 해석, 평가를 둘러싼 연구와 담론들은 차고 넘친다. 그런데 좀 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영향을 행사한 것은 이들이 기초하고 완성시킨 두 역사적 문서, <독립선언문>과 <연방헌법> (‘권리장전’이라 부르는 최초 수정헌법 10개 조항을 포함)이다.

3. 미국을 만든 두 문서, <독립선언문>과 <연방헌법>

‘건국의 아버지들’이 기초한 <독립선언문>과 <연반헌법>은 단순히 뛰어난 선언문, 법전이 아니라 많은 미국인들이 <성서>의 세속적 표현으로 여겨질 만큼 거의 절대적 권위를 누리고 있다. 세계의 거의 모든 지역이 왕이나 황제의 지배하에 있을 때 만민평등, 삼권분립, 정교분리 등 민주주의의 근간으로 널리 받아들여지게 되는 독창적 가치와 제도들을 표현한 이 문서들의 정신은 미국사회의 진정한 진보를 추동하고 대법원 판결이라는 그들 정신의 최종 추인에 의해 완성되어 왔다고 보는 것이 일반인은 물론 다수의 학자들도 동의하는 바이다.

서명된 <독립 선언문>

서명된 <독립 선언문>

<선언문>과 <헌법>은 상당히 흥미로운 문서들임에 틀림없다. <선언문>의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All men are created equal)는 구절은 ‘만민평등’이라는 근대정신의 명징한 표현으로 이해되고 ‘인민’(We The People)의 이름과 권위를 빌어 선언하고 선언문에 서명함으로써 사후적으로 그들의 존재를 문서에 서명할 수 있는 하나의 집단 신체로 창조한 탁월함이 돋보이는 문서다. (아렌트도 이 문서를 비판적으로 검토한 바 있고 데리다는 이 점을 오스틴의 수행언어 이론을 빌어 흥미로운 분석을 한 바 있다.) 그리고 <헌법>은 다양한 정치세력들 사이의 절묘한 타협점을 찾아내어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이질적인 집단들을 묶어 ‘미국’이라는 국가를 만들어내고 안정적으로 유지시켜온 핵심적 근거로 평가받고 있다.

설사 이런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해도 이 역사적 문서들을 민주주의의 전범으로 무비판적으로 수용할 수는 없다. 보편적인 통념과는 달리 미국의 초기 지도자들은 우리가 이해하는 민주주의의 수호자는 결코 아니었다. 그들은 민주주의를 위험천만한 우중에 의한 지배로 이해하고 신뢰하지 않았으며, 그런 그들이 정치적 주체로 과감히 선포한 ‘인민’이 실제로는 모든 ‘건국의 애비들’처럼 ‘재산을 가진 백인 남성’만을 지칭한 것이라는 사실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무지몽매한 군중의 손에 권력이 들어가게 하지 않기 위한 장치를 곳곳에 마련해 두었다. <헌법>은 지금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인구비례가 제대로 반영되지도 않는 주 선거인단을 통한 복잡하고 희한한 간선제 대통령 선거를 마련해 두었고 인구와 무관하게 각 주에 2명씩의 대표를 뽑는 상원 등 민주주의의 기본원리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제도를 법제화해 유지시키고 있는 것이다. (20세기 초까지는 이 상원의원들마저 직접선거가 아니라 의회에서 선출했다.)

“우리 미합중국의 인민은..”(We the People of the United States)을 앞세운 미국  <연방헌법>의 전문(前文)

“우리 미합중국의 인민은..”(We the People of the United States)을 앞세운 미국 <연방헌법>의 전문(前文)

그리고 <헌법>은 명백하게 노예제를 지지하고 있다. 노예를 3/5의 인간으로 간주한다는 조문은 노예를 인구 계산에서 빼고자 했던 북부 주들과 노예를 한 사람으로 간주해 인구비례에 의한 대표력을 높이고자 했던 남부 주 사이의 타협점이었다. 그리고 많은 노예제 지지자들조차 혐오했던 노예무역을 인정하는 조문, 그리고 도망자 노예는 소유주의 요구가 있으면 노예제를 반대하는 다른 주들도 반드시 ‘반환’해야 한다는 조문이 있다. 물론 이는 노예제를 적극 지지하는 주들을 연방에 포함시키기 위한 타협이라는 점에서 이해할 수 있지만 <헌법>이 어떤 고매한 이상의 순수한 표현이 아니라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라는 사실은 그것이 우상화의 대상이 아니라 역사적 맥락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만약 많은 사람들이 믿는 것처럼 미국이 그 아름다운 민주주의의 원리에 의해 탄생하고 그걸 국가의 원리로 삼았다는 나라가 밖에서 행해온 온갖 패악질은 차치하더라고 안으로 ‘노예제’와 노예무역을 그리 오래 유지하였으며 피비린내 나는 내전을 겪고서 겨우 비인간적인 제도를 폐지한 후에도 극단적 인종차별 정책과 유색인종에 대해 린칭 같은 무자비한 폭력을 20세기 중반이 넘도록 유지해왔던 것이다. 미국은 너무도 오랫동안 이런 폭력의 역사에 애써 눈감고 ‘건국의 애비들’과 그들이 만든 문서들에 대한 무분별한 우상숭배를 지속해왔다.

<헌법>이 표방하는 민주주의적 가치의 최후의 수호자라는 연방 대법원은 뒤늦게 폐지되기 전까지 노예제와 여성참정권 불인정에 대해 꾸준히 합헌 판결을 내려왔고 민권운동이 미국을 휩쓴 1970년까지 여성 동등권 불인정, 인종차별 정책 등의 명백한 차별에 대해서도 지속적이고 일관되게 합헌 판결을 내렸다. 1986년에조차 동성애를 범죄로 취급하는 주법은 합헌이라는 어처구니없는 판결을 내린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대법원은 더 이상 이런 차별들이 용인되기 어려운 사회분위기가 팽배해서야 마지못해 위헌 판결을 내렸을 뿐 많은 이들이 믿고 있는 것처럼 <헌법>의 정신을 구현한 대법원이 진보적 가치들을 앞장서서 구현한 경우는 미국 전역사에서 거의 없다. 그저 시대조류의 변화에 부응해 뒷북을 쳤을 뿐이다. (물론 이런 뒤늦은 판결조차도 보수적 남부 주에서는 격렬하게 반발했고 이는 한나라에서 얼마나 다른 시차가 존재하는가를 증언한다.)

원조 ‘건국의 아버지들’.

원조 ‘건국의 아버지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선언문>과 <헌법>의 권위는 상당하고 많은 정치적 논의들이 이들을 중심에 두고 진행된다. 최근의 예만 들어도 콜로라도에서 벌어진 학살을 두고 총기 소지 문제가 등장하면서 다시 총기 소유의 자유를 인정한 수정헌법 제2조가 언급되고 오바마의 야심적 헬스케어 관련 법안을 둘러싼 논의도 그것이 헌법에 명시된 주의 권한을 침해하는가가 가장 큰 쟁점으로 등장해서 최근 대법원의 합헌 판결로 살아남았다. 삶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결정들이 사법적인 문제로 귀결되는 것이 보통이며 진보적 진영도 일부를 제외하면 아직도 이들 문서의 진보적 정신을 자신들의 입장을 합리화하는 근거로 활용한다. ‘법치사회’로서의 미국은 이런 믿음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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