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뒤, 남은 사람들

길선주, 구원과 역사가 만나는 방식 (2)

- 권보드래

어찌 보면 사회운동은 각 개인이 저마다의 삶에서 마주하고 있는 문제가 통로를 만들어 낸 순간, 그 순간에 바탕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우리의 삶은 세계에 의해, 국가에 의해, 사회에 의해 규정되고 있지만 또한 각자의 사연에 의해 굴절되고 있기도 하다. 곰곰이 생각해 보고 거슬러 올라 따져본다면 ‘빈틈없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나의, 내 가족의 생애는 세상과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아버지가 정신이상으로 30대 이후 골방에 갇혀 살았다, 처가에 가는 길에 철로 역부들에게 봉변을 당했기 때문이다, 그 철로는 조선 경영의 일환으로 일본에서 건설하고 있던 철도였다(김소월의 경우). 집안이 형편없이 몰락했다, 일찍 가장이 된 큰형이 마약에 찌들어 가산을 탕진한 까닭이다, 영국이 전쟁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중국에 유입시켰던 마약은 당시 조선에까지 유행하고 있었다(채만식의 경우). 이만큼 극적이진 않다 해도, 세상의 내력은 각자의 핏줄에까지 미세한 무늬로 새겨져 있다.

문제는 저마다의 삶 사이에 통로가 생겨나고 공동성the common이 형성되는 순간이다. 이 순간, 베스트셀러나 히트가요가 태어나기도 하고, 기념할 만한 경향이나 운동이 조직되기도 하며, 광기나 폭동이 폭발하기도 한다. 집단적 경험 자체를 이렇듯 일반화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겠지만, 1900년대 후반, 대한제국의 인민들이 지지·참여하고 있던 각종의 노선을 생각하다 보면 이런 ‘공통의 기반’을 상기하게도 된다. 남쪽 지방에서 의병항쟁이 격렬했다가 잦아들고, 마침내 ‘남한대토벌’로 궤멸되는 동안, 서북 지방에서는 기독교가 만민의 영혼을 사로잡아 가고 있었다. 그 시발점에는 그리 특별할 것도 없는 한 사내가 자리하고 있었을 뿐인데 말이다. 도교의 ‘장생’술을 연마하다 기독교의 ‘영생’으로 귀의해 버린 자, 길선주에게 있어 마모되기 쉬운 육체와 믿을 수 없는 영혼은 똑같이 문제거리였던 것 같다. 길선주는 1907년 1월의 대부흥 집회에서 자기 자신의 죄악부터 고백했다. 가까운 벗이 거액을 맡기고는 오래잖아 세상을 떠났는데, 그 중 상당액을 착복했다는 것. 길선주 자신만 입을 다물었다면 아무도 알지 못했을 허물을, 30대의 성공가요 목사라는 지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만천하에 드러낸 것이다.

평양 대부흥에서 ‘회개’가 일종의 유행병이 된 것,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한 것은 확실히 길선주가 촉매제가 된 까닭이었다. 그만큼 유능한 설교가요 조선 장로교의 핵심 인물 중 하나였던 길선주가 10여 년 후, 어떻게 ‘민족대표 33인’ 중 하나로 천거된 것인지 사연이 분명치는 않다. 아마 기독교계 내부에서 대표자를 선정하는 방식이었던 만큼 길선주의 이름이 자연스레 거론되었기가 쉬웠으리라 짐작된다. 길선주는 3월 1일 독립선언식에 맞춰 출발하기는 했으나 사리원에서 열차가 지연되는 등의 사정으로 현장에는 참석치 못하였고, 서울역에 도착하는 대로 경찰에 자수해 검거되었다. 그다지 주도적이거나 적극적인 역할은 아니었던 셈인데, 검찰에서의 신문조서를 통해서도 대체로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사실은 확인할 수 있다. 길선주는 독립선언서를 보고도 “전연 모른다.”고 했고, 선언서 아닌 “청원서에 연서하는 일”만 응낙했을 뿐이라 주장했으며, “일체의 일을 이승훈에게 위임했”을 따름이라고 발뺌했다. 2년간의 옥중생활 후 결심공판에서도 길선주는 예외적으로 무죄를 선고받았다.

길선주 자신이 사역하고 있던 교회의 청년 중 일부가 비겁한 목사를 응징하겠다고 나선 것도 이런 정황 속에서는 그것대로 납득이 된다. 청년들은 길선주가 의도적으로 독립선언식에 불참했고 조사 과정에서도 시종일관 변명하는 태도를 보여 무죄를 선고받을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좀 다른 해석이 있긴 하지만, 어쨌거나 이후 길선주가 민족운동과 거리를 두고 살았던 것은 사실이다. 이미 대부흥운동 이전부터 “마음으로는 슬프지만 물리적 항쟁은 단념할 것”을 교인들에게 권고했다는 길선주였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독립협회 평양지회 일을 보는 등 현실 운동과의 연계를 갖고 있었지만, 국망(國亡)의 기미가 짙어지면서 길선주는 진작 희망을 버리고 있었고, 그런 만큼 3·1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것은 교회의 추천에 수동적으로 대응한 이상이 아니었기 쉽다. 3·1 운동 후에는 더더욱 현실 정치를 멀리 하면서 살았던 것이다. 1925년에는 원산 교회에서 설교하는 중에 사회주의파 청년들의 습격을 받고, 1927년에는 사목하던 교회에서 교인들에 의해 추방되는 등, 길선주가 교회를 주도하던 시기는 저물고 있었다. 이 무렵 길선주는 『말세학』을 짓고 ‘임박한 재림’을 설교하면서 지냈다고 한다.

길선주가 세상을 떠난 것은 1935년이다. 시력을 잃은 시기에 대해서는 조금씩 증언이 엇갈리지만—혹자는 기독교 입교 전, 도교의 선약을 잘못 복용한 탓이었다고 하고, 혹자는 완전 실명은 3·1 운동 이후였다고 한다— 육체의 암흑 속에서 살면서 영혼의 빛을 인도한다는 역설적 사명을 실천했던 이 기억할 만한 선구자가 타계한 이후, 조선 기독교는 전쟁과 신사참배라는 시련을 겪었고, 3·1 운동 전후 기독교가 그러했듯 다시 이견과 갈등의 시기를 경험했다. 한국 근대사에서 3·1 운동 같은 통합과 공공성의 시기란 희귀했던 만큼, 이후에도 기독교의 분파 정도를 넘어서 길선주 같은 생애가 존중받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길선주는 슬하에 세 아들을 두었는데, 이들도 크게 엇갈리는 삶을 살았다. 맏아들 길진형은 1910년대 초 105인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후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화가였던 둘째 진섭은 후일 월북해 북조선 미술계의 거장이 되었고, 셋째 진경은 목회자로서 보수적인 후반생을 보냈다. 한 개인에 몇 마디씩 할당된 이 서툰 언어를 넘어선 생의 기미들은, 다할 수 없는 세상의 저수(貯水)에 무늬로 남아 있으리라.

응답 1개

  1. 지나가다말하길

    언제나, 유려하고도 맛깔스런 문체로 3.1운동의 뒷골목 소식을 전해주는 글, 잘 읽고 있습니다. 앞대목이 참 와 닿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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