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실에서

삶에 대해 아마추어가 되자

- 박정수(수유너머R)

지난 일요일 ‘두물머리 행정대집행 중단을 위한 유기농행진’에 참여했습니다. 명동에서 청계천, 대한문을 거쳐 서울국토지방청까지 세 시간에 걸친 행진이었는데요. 참 이상하죠? 집회장이었다면 한 시간도 못 견딜 폭염이었는데 별로 덥다는 생각을 못 했거든요. 너무 재밌어서 더위도 잊었나 봅니다. 밀짚모자와 몸빼바지로 드레스코드를 맞추고 손에는 부들, 보리, 호박, 가지, 노각오이 등 유기농산물을 든 참여자의 행색도 재미있고, 시시때때로 꺼지는 앰프에도 아랑곳 않고 악을 쓰며 노래하는 인디밴드의 공연도 통쾌했습니다. 무엇보다 재미있었던 건 산보하듯 걸으면서 노래하고 춤춘 거였습니다. 의도한 건지 어쩐지 손수 만든 앰프수레에서 7,80년대 유행가가 흘러나오는 거예요. “안개 속에서 나는 울었어 / 외로워서 한참을 울었어 / 사랑하고 싶어서 사랑받고 싶어서~” 혜은이의 ‘열정’인 거죠. 좀 웃긴다 했는데 행진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따라하는 거예요. 그러더니 대열 전체가 큰 소리로 “가슴 터질 듯 열망하는 사랑 / 사랑 때문에 목숨거는 사랑 … 활화산처럼 터져오르는 / 그런 사랑 그런 사랑~” 하는 거 있죠. 너무 더워서 그랬나? 뭔가 억눌린 게 빵 터진 느낌에 저도 목청껏 따라 불렀습니다. 계속해서 최백호의 ‘영일만 친구’가 나오고 사람들은 또 따라 부르고, 행진대열은 삼십년 전 선술집 같기도 하고 무도회장 같은 분위기로 흥겨워웠습니다. 을지로에서 청계천으로 이어진 길에선 ‘야마가타 트윅스터’가 마이크를 잡더니 특유의 테크노 리듬에 맞춰 요상스런 춤을 추며 “공사말고 농사 / 짓자 / 삽.삽.삽/ 호미.호미.호미/괭이.괭이.괭이” 하며 노랜지 랩인지 넉살을 떨었고, 그러자 사람들은 일제히 그의 노래와 춤을 따라하며 뮤지컬 영화의 한 장면처럼 군무를 추면서 행진 했습니다.

청계천에서 잠깐 자유발언하고 다시 서울국토청으로 행진해 가는데 아주까리 나뭇잎 모양의 가면을 쓰고 있던 한 사람이 대열 앞으로 나와 마이크를 잡았습니다. ‘로맨스조’였습니다. 그제서야 누가 옛정서 물씬 풍기는 가요를 틀었는지 알았습니다. 두물머리 밭전위원으로서 주말마다 두물머리 가서 김매고 버려진 물건들 주워다 예술적 소품을 만들어 온 ‘옛정서 발굴’ 밴드 ‘푼돈’의 보컬 ‘로맨스조’가 아니라면 누구였겠습니까. 8월 6일 행정대집행을 앞둔 암울한 상황에서 30도를 오르내리는 폭염 속에서 운동가요도 아니고 그 애매한 옛 가요를 능청스레 틀어놓을 생각을 했겠습니까. 본색을 드러낸 로맨스조는 본격적으로 행진대열을 무도회장으로 바꾸는 추임새 “앗싸, 앗싸, 이히~”를 넣었고 간주 부분에서서는 “공사 말고 농사 / 발전말고 밭전 / 레저 말고 삶을” 외쳤습니다. 그 구호조차 결기어린 어조가 아니라 능청스럽고 느끼하지만 쓸쓸하고 알 수 없는 뉘앙스를 담아서 다양한 어조로 변주시켰습니다.

세시간 가까운 행진 끝에 정동에 있는 서울국토지방청 앞에 도착해서 정리집회를 가졌습니다. 소박하고도 힘찬 자유발언들과 8월 5~6일 세계최초 ‘행정대집행 전야제’ 공지를 마치고 마지막으로 씨앗 폭탄, 아니 씨앗 돌탑을 쌓는 퍼포먼스와 <푼돈들>의 공연이 동시에 펼쳐졌습니다. 행진하면서 이미 목을 다 써버린 로맨스 조의 목소리는 시시때때로 꺼지는 앰프처럼 갈라졌지만 이상하게도 지친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는 마력이 있었습니다. ‘윷놀이’, ‘탈춤’ 등 7,80년대 밴드의 노래를 불렀는데 사실 맥락도 닿지 않고 그렇다고 딱히 신나는 리듬도 아닌데 사람들은 로맨스조의 노래에 환호하며 엉덩이를 실룩이고 서로의 어깨를 붙잡고 기차놀이를 했습니다. 좀 느끼하고 낯간지럽지만 그들에게서 저는 두물머리의 대지와 거기 깃든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 넘실거리는 걸 보았습니다.

<위클리수유너머> 이번호는 ‘동시대반시대 人’ 두번째로 ‘로맨스조’를 특집으로 다룹니다. 이 친구를 어떻게 소개할지 참 애매합니다. 인디 밴드 뮤지션, 공공예술가, 사진가, 국제생태화장실협회 임원, 넝마공작단, 화가, 푼돈들과 두물머리에선 로맨스조, 상암동에선 루꼴라 조, 성북동에선 원트롱조, 방학동에선 인디안 조…. 그 어느 것 하나도 그는 ‘일’ 삼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모든 활동들에서 영원한 아마추어입니다. 아마추어(amateur)는 라틴어 ‘amator’에서 온 말로 영어로 ‘lover’, 즉 ‘사랑하는 사람’을 뜻한다고 하죠. 그는 음악, 미술, 사진, 공공예술, 밥벌이 그 어떤 것도 노동으로 삼지 않고 사랑해서 합니다. 그는 그 모든 활동들을 삶에 대한 사랑으로 변형시키는 재주가 있는 아마추어입니다.

응답 2개

  1. 로맨스조말하길

    배꼽아래 단전에서 부터 뭔가 뜨끈한 것이 차오르는 듯 ㅎㅎ 과연 정수샘이 풀어 쓴 저 ‘로맨스조’처럼 난 사랑스러울까.. 혹여 나중에 ‘일 삼는 자’가 되더라도 이 감동 잊지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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