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강만필

e-mail로 받은 글 (3)

- 김융희

이번 독일 공연을 함께 다녀온 ‘이영일 총제'(현, 한중 문화 협회 총제)께서 이메일을 보내 오셨습니다. 공연을 마치고 귀국 길, 독일 여행중 있었던 이야기들을 나누면서 공감하며 동의했던 내용이 잘 정리된 글이었습니다. 역시 통일 전문가요, 정치인이었던 총제께서는 같은 분단의 처지에서 통일을 이룬 독일을 보면서 통일을 소원으로 지향하는 우리로써 반드시 관심을 가져야 할 문제를 혜안으로 관찰해 주셨습니다. 시차의 고통에 바쁜 일정에도 이처럼 좋은 글을 쓰셔서 벌써 월드넷에 실은 것으로 앎니다. 저의 여행기에도 조금은 집고 넘겨야 할 문제였기에 대신해 여기 이 글을 여러분과 함께 하고 싶습니다. 많은 분들이 관심있게 읽어주었으면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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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이익이 분단이익보다 훨씬 크다
이영일 전 국회의원

1. 독일 분단지역을 찾아서

지난 7월 12일부터 19일까지 통일된 독일의 동독지역을 다녀왔다. 필자는 서울 경동교회의 Young Old Boy(나이 65세 이상 75세미만의 연령층을 지칭)들이 중심이 된 남성합창단-공식명칭 Noah남성콰이어-의 일원으로 20년 전까지만 해도 동독지역에 속했던 베를린, 라이프치히, 드레스덴, Meissen, 바이마르 지역을 순방하고 베를린의 루드비히 대성당과 라이프치히의 성 토마스 교회에서 합창공연을 마치고 돌아왔다. 필자의 독일 방문은 이번이 세 번째다. 1980년 5월 국토통일원 간부였던 나는 당시 서독의 내독관계성(Ministrium der Inner Deutsch Beziehungen)초청을 받고 한독간의 분단국문제정책협의회의 한국 측 실무수석대표로 본(Bonn 당시 서독수도)에 간 것이 제1차 방독이었고 제2차는 1985년 한독정상회담의 공식수행원으로 독일을 방문했다. 이번에는 비록 기간도 짧고 목적도 달랐지만 내 나름의 문제의식을 가지고 통독 20년을 넘긴 동독지역을 살펴볼 생각이었다.

그간 국내에서는 서독이 잘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동독을 흡수 통일했다가 막대한 통일비용으로 낭패를 겪었다면서 우리는 독일의 교훈을 본받아 통일을 서두르지 말고 장기적 관점에서 준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 정책당국자들의 시각이었다. 특히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은 통일비용문제를 전면에 내걸고 성급한 통일을 경계해야 한다는 쪽으로 국론을 몰아갔다. 정권의 이러한 태도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경제발전으로 삶이 풍요해진 한국 젊은 세대들은 공리주의적 관점을 내세워 헐벗고 굶주리는 북한을 상대로 실익 없는 통일을 하는 것보다는 분단체제를 유지하는 것이 오히려 낫다는 통일기피 내지 통일혐오적 사고마저 배태되어온 것도 사실이다.

2. 통일비용걱정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통일 20년이 지난 오늘의 독일의 어느 곳을 보아도 통일비용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고 그러한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오늘의 독일은 분단이익보다는 통일이익이 얼마나 큰가를 실감 있게 보여주고 있다. 오늘날 독일이 세계정치와 유럽대륙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누리는 국격(國格)이 이를 잘 설명하고 있다.
독일은 서독의 11개주가 동독의 5개주를 합함으로써 면적은 357,022㎢로 한국의 3.5배이며 인구도 약 8천100만명이고 GDP도 3조6286억$로 세계4위이다. (2011 IMF 기준) 이제 독일은 유럽의 동부와 서부를 아우르는 대국으로 부상하였다. 두 차례에 걸친 경제, 금융위기에도 불구하고 이를 잘 극복하면서 유럽의 경제맹주가 되어 있으며 독일연방공화국의 대통령과 수상 또한 모두 동독 출신들이 당선되어 오늘의 독일을 이끌고 있다.

동독 지역의 5개주는 비록 공산정권의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에 경제면에서 서독만큼 라인 강의 기적은 이루지 못했지만 그러나 동유럽지역의 어느 국가보다도 잘사는 지역이었다. 동서독이 통일된 후에는 독일 연방정부와 서독의 기업가들이 안정된 투자지역으로 동독지역을 선택, 경제개발을 추진한 결과 동독정권하에서 빛을 보지 못했던 지역발전의 잠재력이 급속히 되살아나면서 경제발전에 속도가 붙어 양 지역 간의 격차도 나날이 줄어들고 있다.

독일은 원래 50여개의 봉건제후국들을 하나로 통합하는 과정에서 연방국가로 통일되었기 때문에 16세기 이래 문화 능력 있는 제후들이 세운 성벽과 교회건물, 왕궁식당이나 박물관, 바이쎈의 도자기 공장 등은 비록 전쟁으로 파괴되고 공산체제하에서 방치되어 옛 모습을 많이 상실했지만 통일 후 연방정부와 기업들이 이들 건물을 리노베이션하거나 리모델링함으로 해서 다시 옛 모습을 되찾고 있다. 분단의 상처나 전쟁의 상흔은 이젠 아픔이라기보다는 값진 추억으로 변해가면서 만인의 찬탄을 불러일으키는 관광 상품으로 재생되고 있었다.

3. 투자할수록 늘어나는 관광자원

우리 일행은 베를린 도착 다음날 베를린 근교의 포츠담을 거처 뷧템베르그(Wittemberg)를 방문했다.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의 기치를 올렸던 수도원, 그가 개혁의 당위성을 밝힌 95개조의 성명문, 그가 가르쳤던 대학은 하나같이 개신교의 성지(聖地)로 승화되어 개신교도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다. 또 프리드리히의 현자(Friedrich-Weise)가 봄스(Worms)종교제판에서 파문당한 루터를 보호하기 위해 그를 납치해서 숨겨주었던 바르트부르그(Wartburg)성과 루터가 그 성에서 라틴어의 성경을 독일어성경(Die Bibel)으로 번역하고 구텐베르그의 인쇄술발명에 때맞춰 성경의 대중화를 이룬 역사가 낱낱이 기록되고 보존, 전시되어 있었다. 참으로 멋진 성지면서 관광지로 변해 관광버스가 연일 줄을 잇고 있었다. 이들 지역은 마르틴 루터라는 브랜드로 먹고 사는 도시라고 말해도 과언은 아니다.

라이프치히나 드레스덴, 바이마르도 요한 세바스챤 바하(Johann Sebastian Bach),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쉴러(Johann Friedrich von Schiller)를 로고로 한 상품, 기념관(Haus), 식당 등이 모두 성업 중이었다. 특히 라이프치히의 아우어박스 켈러(Auerbachs Keller)식당은 인테리어의 수려함으로도 훌륭했지만 괴테가 젊은 시절 자주 찾은 식당이라는 이유로 더 많은 고객이 몰려든다는 것이다. 우리들도 그들 중의 한 무리일 것이다. 쉴러 뮤지엄, 각종 박물관은 많은 관광객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물론 내가 방문한 도시가 과거 중세시대이래 상공업이 발달했던 라이프치히나 작센왕국의 수도였던 드레스덴처럼 투자전망이 밝은 곳이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오늘의 유럽나라들의 도시들에서는 보기 힘든 타워크레인이나 스카이크레인이 이 곳 저곳에 거구(巨軀)를 드러내고 있는 것을 보면 개발과 복원, 레너베이션의 붐이 지속되고 있음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세계각지에서 이들 지역으로 모여드는 관광객들이 동독지역의 새로운 수입원이 되고 있었다. 영국 GNP의 30%가 관광수입이라는데 이제 독일의 관광수입도 그 수준을 곧 육박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영국의 셰익스피어에 비견할만한 괴테의 나라, 마르틴 루터의 나라, 바하의 나라이기 때문에 또 드레스덴의 츠빙거 궁이 복원되었고 그 유명한 군주행렬의 자기벽화가 건재하게 전시되어 있고 영국의 폭격으로 무너진 여인들 교회(Frauen Kirche)-별명 성모교회-가 다시 복원되어 관광자원에 추가되었다. 이 지역은 분명 괴테가 독일의 베네치아라고 호평한 바대로 관광차원에서 “엘베 강의 기적”을 이룰 것으로 예견되기 때문에 동독지역의 관광수익은 해를 거듭할수록 눈덩이처럼 늘 것 같다.

필자는 동독지역에 속했던 지역이 모두 이렇게 발전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고도의 자치를 보장받고 있는 동독의 5개 자치주들이 연방정부의 구성체로서 연방정부와의 제휴 속에서 발전경쟁에 나서는 추세라면 동독지역과 서독지역간의 발전격차가 줄어드는 것은 시간문제 같다. 라이프치히나 드레스덴은 이미 서독수준에 도달했다고 평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라이프치히를 여행하면서 가이드가 한 이야기 한토막이 잘 잊혀 지지 않는다. 서독에 광부로 갔던 한 한국인이 간호사로 파독된 여자와 결혼해서 독일의 하노버에 정착, 식당으로 모은 돈을 베를린 장벽이 허물어진 직후 라이프치히로 들어가 허름한 건물을 구입하고 이를 리모델링해서 다시 한국식당을 개업했는데 현재 이 건물의 값은 구입당시보다 수 십 배 높은 가격으로 호가된다는 것이다. 졸지에 때 부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서독은 통일을 통해 동독이라는 중부유럽의 5개주를 통째로 구입, 개발의 효과가 독일의 국위선양과 국력신장으로 수렴되는 안전한 투자공간을 확보했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것 같다. 통일이 독일국가를 크게 발전시키는 산업으로서의 효용을 확실히 입증한 것이다.

4. 통일이익이 분단이익보다 훨씬 크다

물론 통일직후의 상황은 지금과 달랐을 것이다. 2,200만 명의 동독인들은 통일의 환희는 잠시였고 그들에게는 엄청남 시련의 시간이 닥아 왔을 것이다. 공산당이 직장을 배치해주고 생산성이 높거나 낮거나 모두에게 똑같이 생필품을 공급해주고 똑같이 교육, 의료혜택을 누리게 하고 문화생활을 균점했던 상황은 사라지고 자기 책임 하에 의식주를 포함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직장을 구해야 하고 생산성 경쟁에서 뒤지면 당장에 삶이 어려워지는 도전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허탈과 좌절의 늪에 빠졌을 것이다.

서독정부역시 동독주민들의 정치사회화(Political Socialization)과정을 조정, 서독의 헌법질서에 적응하도록 유도해야 하는 세기적 어려움을 극복해야 했다. 여기에 제2차 세계대전 패배에서 온 전쟁의 상처, 나치독일이 남긴 상처, 분단과 냉전이 몰고 온 상처를 치유하면서 동서독 간의 발전격차를 줄여 가는데 엄청난 어려움이 뒤따랐을 것이다. 실로 어마어마한 재정 부담이 뒤따랐을 것이다.
통일직후 동서독 사람들이 서로 간에 상대를 너무 잘 몰랐다고 독백할 정도로 잘 아는 것 같으면서도 잘 몰랐다는 것이 당시의 솔직한 후일담이었다고 한다. 동독인들은 서독에서의 삶이 얼마나 힘든 삶인지 몰랐다는 것이고 서독인들은 창의력도 없고 근면하지도 않고 생산성에 신경조차 쓰지 않는 저런 독일인들이 과연 있을 수 있느냐고 개탄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독일 지도자들은 이런 어려움에 굴하지 않았다. 후회하지도 않았다. 포기하지도 않았다. 전쟁의 폐허에서 라인 강의 기적을 이루었던 서독인들의 체험이 동독으로 흘러들어갔다. 이 물결이 스며들면서 공산정권하에서 생성된 생활태도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개방사회의 장점인 정보의 소통과 확산은 동독인들을 신속히 변화시켰다. 서독식의 정치사회화는 급속히 동독사회의 새로운 흐름을 이루었다. 높은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듯 서독의 자본과 기술과 경험이 동독의 모든 잠재력을 발전의 원천으로 재생시켜 나갔다. 통일비용이 통일을 위한 투자로 변해갔다. 개방사회의 발전정보는 동독인들을 일깨워 스스로 자가발전을 도모할 기회를 찾게 했다. 동독5개 자치주들은 연방정부와의 협력 속에서 공산치하에서는 상상할 수없는 투자계획을 세우고 낙후성 극복에 박차를 가해나갔다.

지금 세계는 어느 곳에서도 독일통일을 놓고 통일 비용을 말하는 사람들은 없다. 핵무장하지 않고도 전 세계 강국반열에 오른 독일을 부러워하는 나라는 늘고 있다. 아직도 통일비용을 따지고 논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지구 최후의 분단국인 한국에서 일 것이다. 그것도 아이러니 같지만 항상 통일의 당위만을 앞세워왔던 친북적 좌파정객들이 통일비용 타령을 아직도 부르고 있다. 그러나 이제 독일의 통일비용이야기는 아예 꺼내지 말아야 한다. 우리도 앞으로는 통일을 단순히 비용차원의 문제로서가 아니라 한반도 전체의 균형발전을 위한 산업발전차원에서 보는 새로운 관점을 정립할 때에 이른 것 같다. 함께 모색할 것을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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