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외부인’ 즉 당사자 아닌 자로서 운동에 관여하는 일에 대한 메모

- 가게모토 츠요시

2012년 8월 6일 아침, 나는 두물머리 행정대집행의 현장에 서있었다. 8월 6일에는 다행히도 대집행이 되지 않았다. 어떤 폭력사태가 될까 걱정을 하던 나로서는 우리가 모여서 대집행을 막았다는 것이 놀라운 일이었으며, 마냥 단순히 기뻤다.

8월 5일 밤, 두물머리에서는 전야제가 진행이 되었다. 대집행 전날에 전야제??라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막상 전야제에 가봤더니 정말 전야제를 하고 있었다. 내일을 기다리면서 어두운 분위기일 줄 예상을 했었던 나로서는 큰 충격이었다. 이러한 두물머리의 독특한 분위기에 익숙해지기에는 시간이 별로 필요하지 않았다. 물론 거기에 모이는 사람들은 도래할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나는 대집행 전날 두물머리를 처음 찾아갔다. 그 때까지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대집행 전날이라서 긴장이 유지되면서 전철역에서 두물머리까지 걸어갔다. 서울에서 몇 번 두물머리 집회를 나가면서 두물머리 집회에 나오는 사람들은 좀 이상하고(이것은 최상급 좋은 의미로서의 ‘이상하다’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말로 하기에는 어렵지만, 부럽다고 할까, 뭐 이것저것 신난 사람들이 많다고 막연하게 느껴왔다. 실제로 그런 독특한 분위기를 대집행 전야에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그것은 단순한 밝음이 아니다. 그러한 분위기의 뒷면에 있는 공포나 분노는 내가 대변할 바가 아닐 것이겠지만 만만치 않는 것이 있겠다.

5일 전야제에서 발언한 사람들 중에서 몇 분이 평택 대추리의 대집행에 대해 이야기들을 하셨다. 나는 그 때 멀리 일본에서 지켜보기만 했었다. 내가 한국에 대해 관심을 계속 갖고 있었기 때문에 대추리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는 측면도 있지만, 당시 나는 오키나와에서에 미군기지 확장 반대운동을 하곤 했었기 때문에, 자기가 운동해 나갈 문제와 연관을 시키면서 보고 있었던 것 같다. 그 시절,나는 항상 친구들이랑 논의 하던 것은 오키나와 사람이 아닌 내가, 심지어 오키나와를 구조적으로 또한 역사적으로 계속 차별 착취해온 일본인의 한 사람으로서, 어떤 목소리를 가지고 기지 건설에 반대하느냐는 물음이었다. 그 물음은 중요한 것이었다. 물론 미국의 군사전략이나 일본정부의 어이없는 오키나와 차별정책에 대해 나도 역시 분노할 수 있었다. 그러한 정부들이 말하는 정책에 대해 논리적인 비판도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나와 거기에 사는 사람과의 감정은 다를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현지에서 산다는 것은 나같이 올바른 의견을 올바르게 하기 어려운 상황에 산다는 것이다. 오키나와 헤노코에서는 기지 건설 때문에 지역주민들이 서로 싸워야 되는 상황이 되었다. 기지 건설을 주진하는 방위시설국의 작업선(헤노코는 바다에 미군 기지를 만든다는 계획이었기 때문에 바다가 싸움터가 되었다)을 운전하는 분은 헤노코의 어민들이었다. 그 때 항상 듣게 된 말은 ‘외지 사람’이라는 것이다. 올바른 말을 너무나 올바르게 할 수 있는 외지인이란 입장이 나에게는 있었다. 올바른 말을 하는 것은 입장에 때라 상당히 부담감이 달라진다. 외지인이라는 입장, 당사자가 아닌 자로서의 입장, 이러한 입장에 내가 써 있으면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는 것이 나에게는 큰 과제였으며 쉽게 넘을 수도 없고 또한 쉽게 넘어가면 안되는 과제였다.

이러한 생각을 해보면 나는 항상 ‘외지인’이라는 입장에서 운동을 시작해온 것 같다. 다시 말해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에 운동판에서 쉽게 도망칠 수 있다는 입장으로서. 물론 도망치는 것은 중요하지만 이 논의는 더욱 원론적인 이야기다. 나는 도망갈 수 있다는 입장에서는 도망갈 수 없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의미에서는 도망갈 수 없다는 입장을. 이 말은 이상한 사이비철학같이 보이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일본의 장애인 해방운동 속에서 장애인이 아닌 지원자들이 스스로를 규정할 때 쓰이던 말이다. 일본 장애인 해방운동에서 활동보조의 역할을 하는 지원자들은 스스로 '그룹 고릴라'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고릴라'라는 의미는 장애인이 시키는 대로 스스로 장애인의 손과 다리가 되겠다는 것이다. 즉 자기의 의지가 없다는 것이 '고릴라'라는 이름에 담겨 있다. 그러나 그러한 조직방법으로는 입장이 다른 사람끼리 '연대'를 할 수 없다. '고릴라'에 참여한 여러 사람들이 자신의 입장을 고민하는 가운데에서 '도망칠 수 있는 입장에서는 도망 칠 수 없다는 입장'이란 자기 규정을 하게 된다. 나는 이 말은 정말 중요하게 생각해 왔고 이 말을 바탕으로 다양하게 생각을 해온 것 같다.

지원자라는 말도 많이 들었다. 그렇다, 생생하게 생각이 난다. 오사키에서 노숙자의 텐트를 치워 버리는 행정대집행이 있던 전날에,교토에서 막차를 타고 심야의 현장에 도착하며, 불을 태우면서 아침을 기다리던 그 때의 일들을. 그 때는 너무나 추운 1월이었다. 잠도 안자고 술도 안마시고 종종 날이 밝아지면서 제거예정의 텐트 주변을 스크럼을 짜서 둘러싼다. 경비원들이 돌입해오며 혼란상태가 되었다. 경비원 뒤에서 공안경찰들이 목적인물을 잡으러 밀어붙인다. 하루 만에 텐트는 제거되었다. 그 때, 저녁 뉴스에서 ‘지원자’라는 말이 몇 번 들었는지 셀 수 없을 정도였다. ‘당사자가 저항하는 것은 이해되지만 도대체 지원자란 놈들은 뭐냐??’. 그러한 목소리를 TV에서 많이 듣게 되었다. 마치 노숙인 문제는 노숙인만에 문제이라는 것과 같은, 머리 좋게 보이는 뉴스 해설자들의 코멘트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 해설자는 지원자가 노숙인들을 이용하려고 했기 때문에 지원에 나섰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고까지 했다. 이러한 말들이 신문이나 인터넷에서도 쏟아 나왔다. 그렇다. 나는 행정대집행을 당하는 당사자의 친구도 아니면서 지원에 나섰다. 지원해서 받을 수 있는 보답도 없으면서 지원에 나섰다. ‘외부인’ 혹은 ‘지원자’라는 입장으로 현장에 나갔었다는 것이다.

나는 여기에서 모든 사람이 당사자다는 식의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렇게 말을 해버리면 자기 자신이 왜 거기에 나섰는지에 대해서 고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이 외부인이라는 식의 표현에도 쓰고 싶지 않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당사자가 아니면, 자기 자신이 현장에 있다는 것을 끝없이 생각을 해야 한다. 이러한 생각은 내가 일본에서 운동에 관여했었기 때문에 이러한 사고방식을 가졌다고도 할 수 있겠다. 일본에서 진지하게 운동에 나서려고 하면 거의 선험적으로 가해자인 ‘일본인’이란 입장에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한 법적인 국적 외에도 민족, 성, 계급 등등의 입장이 있겠고 그것이 복잡하게 겹치고 있지만, 자신이 차별을 하면서 산다는 현실을 알고, 그러한 차별을 하면서 밖에 살 수 없는 자신에 대한 분노에서 운동이 시작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한 사고 속에서 나오는 도망칠 수 있는 자기의 입장을 기반으로 해서 ‘도망칠 수 있는 입장에서 도망칠 수 없다는’ 입장으로 자기의 입장을 정의 시키는 일이 나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다는 것이다.

왜 그 말이 도움이 되었는가. 아마 그 답은 일본 특유의 운동권의 어두움에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대학에 입학했던 무렵, 특히 민족문제나 일본 내에서의 차별문제를 하는 그룹에서 신입생을 운동을 할 수 밖에 없게 만든 화법이 있었다. 아마 나보다 뒤에 입학한 친구들은 그런 말을 듣게 될 기회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 어떤 화법이냐면, 신입생에게 '너는 차별을 한 적이 있냐'고 묻는다. 신입생은 '없다'고 대답할 것이다. '차별을 한 적이 없다'는 말을 해버린 이상, 신입생은 논의에서 지게 된다. 왜냐하면 일본인으로 산다는 것 자체가 구조적인 차별에 가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점을 이야기하면 신입생은 자기가 차별을 한 적이 있음/없음에 상관없이 선험적으로 일본인인 이상 차별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다음에 선배가 신입생에 대해 말하는 말은 이렇다. '너는 자기 스스로가 가해자인 줄도 모르는 차별자이다'. 이렇게 생각을 내면서 여기에 쓴다는 것만으로도 기분 나쁘다. 차별자 규정을 받은 신입생은 속죄로서의 운동을 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즉 도망갈 수 있는 특권자로서의 속죄 운동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상당히 끔찍한 이야기이지만 사실 있던 이야기이다. 아마 한국에서도 비슷한 논법은 있겠지만…. 나는 그러한 논의를 하고 싶지 않았고 그러한 논의가 아닌 논의를 해야 한다고 모색을 거듭 했었던 것 같다.

운동이라는 말자체가 ‘운동’ 즉 고정하지 않고 항상 움직이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나는 지원자이며 외부인이면서 왜 현장에 가는가, 이러한 끝없는 물음도 역시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외부인이기 때문에 간섭하지 말자고 말하면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착한 사람이 되면 절대로 안된다. 단순한 외부인도 아니면서 당사지도 아닌, 쾌적하지는 않는 입장에서 자신이 왜 운동에 관여하는가는 끝없 사고하는 것에서, 혹은 그러한 사고를 다른 사람과 나눌 것을 통해 자신이 바꿔가는 끝없는 변화가 운동에는 있다. 내가 왜 두물머리에 갔는가, 심지어 일본인인 내가. 현지에서 무언가를 얻으려고 하는 욕심도 없이 왜 갔는가. 딱 좋은, 설명하기 쉬운 말은 나는 갖지 않는다.

응답 4개

  1. 뎡야핑말하길

    글 잘 읽었습니다. 너무 좋네요!!

    저도, 이를테면 당사자가 아닌 입장에서 운동을 하면서, 비슷한 고민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즘에는 내가 있는 자리에서 살 수 있는 어떤 ‘자격’을 갖춰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가해자라서가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사회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생각하고, 이 사회와 다른 사람들이 맺은 관계를 생각하면, 내가 여기서 편안하게 사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니까.. 내가 살아가기 위한 나의 자격을 스스로 갖춰야 하는 게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어요. 자격이란 말이 너무 딱딱하지만;;

  2. 사루비아말하길

    카게몽 글 참 잘쓴다!!! 잘 읽었어요.
    글 읽으니까 카게몽이 항상 집회에 듬직하게 와있는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해요. ‘지원자이며 외부인이면서 왜 현장에 가는가’.

    나는 어떤 사건이 생길 때 사람들이 모이는 것은 일시적으로 공통성(공통된 정체성 같은..)이 형성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그런데 일시적인 공통성과 지원자 또는 외부인은 어떻게 얘기할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되네요.

    만나면 얘기해봐요!! ^ㅅ^

  3. 기어가는 ㄴㅁ말하길

    오힝… 카게의 글을 읽으며, 새로운 언어를 얻은 느낌이에요. 나는 요즘 외부자 논리에 대응할 말들을 찾고 있거든요. 아리가또.

    고릴라 얘기 참 재밌네요. 장애인운동을 하는 비장애인으로서, 종종 도망갈 궁리를 하는 비장애인으로서, ㅎ ㅎ 유경험자들의 사이비철학이 참 마음에 듭니다.

    “외부인이기 때문에 간섭하지 말자고 말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착한 사람이 되면 절대로 안 된다.” 이 말 참 마음에 들어요. 카게 화이팅. ㅎㅎ

  4. 박카스말하길

    두물머리에 도착해서 ‘너희만 유기농이냐, 세계가 유기농이다’
    ‘외지인들 나가라’ 하는 문구들이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더군요.

    도대체 이들은 어떤 ‘외계’의 명령을 받들어 같이 살던 이들을
    보상해주잖아 하며 농사지으며 산다는 것을 못 살게 내쫓고 싶어하는 건지. 참..

    얼마 전에 어느 공무원이 농민들에게 전화해서 유기농지 철거에 찬성하라는 전화를 돌렸다던데.. 좀 더 들여다보면 그 외계인의 정체가 밝혀질지도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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