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허수경, 울수있음의 따뜻했음

- 구름

나 지금 시집 읽고 있었는데, 시 한 편 읽어줄까?

요즘 왜 이렇게 시를 읽어?

시집 한 권을 꺼내 읽고 있는데 그에게 전화가 왔다. 뭐하고 있었냐는 물음에 시집을 읽고 있었다고 시 한 편 읽어주겠다고 했더니 그가 물었다. “요즘 왜 이렇게 시집을 읽어?” 그러게 말이다. 나는 왜 시를 읽을까. 딱히 떠오르는 이유가 없어 그냥 좋다고, 요즘의 난 다른 어느 책보다 시를 읽는 게 참 좋다고 했다. 그가 말한다. “너 외로운가보다.”

내가 비슷한 얘기를 들은 게 언제였더라. 막바지 꽃샘추위에 웅크리고 있던 어느 날 “속수무책의 봄”을 맞고자 저녁 산책을 나갔다. 걷고, 뛰고, 걷고, 뛰다보니 어느덧 한강에 와 있었다. 밤안개 낀 그날 저녁은 희미하고 뿌연 불빛뿐이었다. 모든 게 뚜렷하지 않아 좋다고 생각했다. 맥주 두 캔을 마시고 돌아왔다. 집에 오자마자 그녀의 시집을 펼쳤다.

어느 해 봄그늘 술자리였던가
그때 햇살이 쏟아졌던가
와르르 무너지며 햇살 아래 헝클어져 있었던가 아닌가
다만 마음을 놓아보낸 기억은 없다

마음들끼리는 서로 마주보았던가 아니었는가
팔 없이 안을 수 있는 것이 있어
너를 안았던가
너는 경계 없는 봄그늘이었는가

마음은 길을 잃고
저 혼자
몽생취사하길 바랐으나
가는 것이 문제였던가, 그래서
갔던 길마저 헝클어뜨리며 왔는가 마음아

나 마음을 보내지 않았다
더는 취하지 않아
갈 수도 올 수도 없는 길이
날 묶어
더 이상 안녕하기를 원하지도 않았으나
더 이상 안녕하지도 않았다

봄그늘 아래 얼굴을 묻고
나 울었던가
울기를 그만두고 다시 걸었던가
나 마음을 놓아보낸 기억만 없다

<불취불귀, 不醉不歸>

혼자 읽으니 가슴 저려와 친구에게 문자로 보내주었다. 『너 많이 외로운가보다』친구에게 답장이 왔다. 나는 외로운 건 아닌데 그냥 마음이 그러네. 하고 보냈다. 『그게 외로운 거야』아냐, 이건 외로움이랑은 달라. 『난 외롭다고 말할 수 있을 때는 외로운 게 아닌 거라 생각해. 진짜 외로우면 외롭다는 말도 나오지 않거든』

나 지금 외로운 건가? 어떤 이는 넌 함께 있을 때도 사람을 외롭게 만든다며 날 떠났고, 어떤 이는 날 외로움에 사무치게 하고 떠나갔다. 넌 소속감을 느끼고 싶은 거라 말하는 이도 있었고, 인간은 누구나 외로운 법이라 말하는 이도 있었다. 누군가는 군중 속의 외로움을 말했고, 누군가는 그냥 혼자라서 옆구리가 시리다고 했다. 우리는 외로운가, 아니면 이렇게 외롭다고 말할 수 있기에 외롭지 않은가.

“네가 어떤 선택을 하던 너의 결정을 존중할게.” 졸업을 앞두고 확실한 어떤 길을, 하다못해 취업준비라는 것조차 선택하지 않은 나에게 그가 말했다. 연애를 안 한지 오래되었지만 애인이 없어 외롭다고 느끼지 않았던 건 어쩌면 가끔씩 만나 밥 먹고 커피를 마시며 고민을 말하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던 그가 있었기 때문이었을 거다. 어떤 선택을 하던 나의 결정을 존중해준다는 건 형식적인 말일지언정 무엇을 고민해야하나 조차 막막했던 그 무렵의 나에게 가장 힘이 되는, 가장 필요했던 말이었다. 그러나 힘이 되고 필요했던 그 말을 듣는 순간 낯선 곳에 낯선 이와 있는 듯한 기분으로 한참 동안 그대로 있었다. 그에게 지지와 존중을 받기 위해서라도 어떤 선택이든 해야 했지만 내가 서 있는 자리는 갈림길조차 보이지 않는 공터였다. 어느 것도 선택하지 않았다. 그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조차 선택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아무 것도 선택하지 않음을 선택한 건지도. 그는 나의 결정을 존중했다.

삶에게 묻는다 그런 것이냐
보양의 탕 속에서 녹작지근해지거나 혹
천기누설의 값을 치르고 몇 가지 길흉을 얻어내는 게 너냐?
어쩌자고 고여 있는 것들은 뚱뚱해지거나 비썩 마르게 되는가

마음에게 묻는다 그런 것이냐
그 골목길 쓰레기통 옆에서 몸은 마른 쥐껍데기
사라진 몸은 이빨 자국만 남긴다 버려진 욕망 같은 저 수박 껍데기

<골 목 길>

삶에게 묻고 마음에게 묻지만 어느 것 하나 답을 주지 않았다. “설명할 수 없는 세상의 일들은 나를 울게” 했고, “이 세상 정들 것 없어 병에 정” 들었다. 그때 “어둑 어둑 대책 없”이 시가 나에게 왔다. 그 대책 없는 시어들이 내 뼈 마디마디로 스며들었다. 허수경도 내게 그렇게 왔다. 대책 없이, 속수무책으로.

모든 악기는 자신의 불우를 다해
노래하는 것

……
결국 악기여
모든 노래하는 것들은 불우하고
또 좀 불우해서
불우의 지복을 누릴 터

끝내 희망은 먼 새처럼 꾸벅이며
어디 먼데를 저 먼저 가고 있구나

<불우한 악기>

절망을 절망이라 말하지 않으면서, 슬픔을 슬픔이라 말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불우를 다해 노래하는” 그녀의 시가 좋았다. 쉽게 희망을 말하지 않고, 쉽게 희망을 쫓지 않는 그녀의 시가 좋았다.

(“문학이 어떤 절망의 현장을 포착해내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겠죠. 절망의 순간을 읽는 독자에게 그것은 위로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희망이라는 거대한 단어 앞에서 저는 속수무책입니다. 희망이란 말 뒤에 숨겨져 있는 위선이 저는 무섭습니다.”

– 허수경, 인터뷰 中)

그런데 나는 어디 먼데를 저 먼저 가고 있는 희망을 쫓았다. 시라도 읽다보면 내 외로움이 사라지고 삶의 답도 찾게 되는 줄 알았다.

회전은 무엇인가, 사랑인가.
나는 이제 떨쳐 떠나려 한다

<自序>

회전은 무엇인가, 사랑인가, 외로움인가. 나는 빠져나오지 못한 채 계속 회전만 하고 있었다. 이제 떨쳐 떠나야했다.

나, 어디 도시의 그늘진 골목에 가서
비통하게 머리를 벽에 찧으며……
다시 간다

<서늘한 점심상>

가야했다.

무엇이 됐든 “모든 관계는 비통하다. 살아가는 게, 살아내는 게 상처였”다. “끝내 버릴 수도 없는, 무를 수도 없는 참혹…” 그것은 결국 혼자 다스려야 할 아픔이고 외로움이었다.

지금이라도 떠날 수 있다면, 나 “혼자 가는 먼 집”, 그 외로운 여정 나와 함께 해주는 건 ‘시’다. 킥킥 당신, …… 그녀의 시는 나에게 “울 수 있음의 따뜻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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