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시세미나가 끝나는 토요일, 나는 걷는다.

- 바람도리

붐비는 도시의 토요일 저녁 6시. 서로의 공통점이 없는 몇몇 이들이 모여서 시를 읽는다. 시를 읽으며 시어와 시어 사이를 산책한다. 그 산책의 풍경은 때로는 건조하고 때로는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때로는 서늘하고 때론 통쾌하고 때로는 무섭도록 낯설고 때론 피비린내가 난다. 다양한 풍경의 길을 서로의 감각을 따라 시인의 의도를 따라 그 길을 함께 걷는다.

– 이 시대의 시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 나는 그렇게 오래 서 있어 본 적이 없다. <당신은>중, 김언

어떤 이끌림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누군가의 글을 신뢰하지 않던 내가 시세미나에 참여한 건. 내가 많이 고통스러웠다고 그래서 많이 느꼈다고 생각할수록 나는 타인의 글들과 더 멀어졌다. 나의 고통은 감히 타인의 그것과 나눌 수 없다는 것처럼 내 안으로 웅크릴수록 타인의 글과는 멀어졌다. 무언가를 찾는데 어떤 분이 권한다. 모여서 함께 공부함으로 바뀌는 삶을 느껴보라고. 그 말하는 분의 반짝이고 선명한 눈빛에 신뢰가 갔으며 난 흥미로웠다. 그렇게 시를 많이 읽지도 않고 잘 알지도 못한다고 부끄럽게 첫인사를 하며 작년 12월부터 “말들의 풍경”과 함께 토요일 저녁을 보냈다.

너와의 이별은 도무지 이 별의 일이 아닌 것 같다.

멸망을 기다리고 있다.

그 다음 이별하자.

어디쯤 왔는가, 멸망이여. -<이별의 일>중, 심보선

매주 한권의 시집을 읽는데 너무나도 잘 안다고 생각했던 익숙한 모국어의 시적 배치가 이렇게 낯설 수가 없다. 시적이라는 것은 문맥과 어법의 파괴인가. 과감한 생략, 혹은 파격적 은유, 세밀한 사유, 판타지적 상상. 비논리적인 단어들의 배치를 통해 시인들은 선명한 자신의 논리를 만들어냈다. 입시를 위해 수없는 수학공식을 외워야했듯, 매 순간 생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는 수식의 계산이 필요하듯 우리는 매순간 논리적이어야 한다. 그렇지만 모든 수식이 우리 삶의 문제를 분명하게 계산해낼 수 없듯 모든 논리가 삶을 설명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의 세포에는 새겨진 그런 감각들이 있다. 논리로 증명해내지 못하여 드러내지도 못하고 고스란히 삼켜버린 감정들. 시는 문맥과 어법의 파괴라는 시적 상상력의 형식 안에 자유로이 숨겨진 감각들은 깨워내는지도 모르겠다.

제일 아픈건 나였어 그래? 그랬니, 아팠겠구나

누군가 꿈꾸고 간 베에게 기대 꿈을 꾼다 -<씁쓸한 여관방> 중, 허수경

시들은 아파보였다. 잔인하게도 시인이 더 많이 아플수록 시는 더 아름다웠다. 시인의 역할에 대해 “다만 다른 사람들이 배고파 울 때에 같이 운다든가, 다른 사람들이 울지 않을 때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감히 울어 버릴 수 있다는 것뿐이다”라는 최승자 시인의 말처럼 이 시인들은 시를 통해 같이 울어주던가 먼저 과감하게 울어 주었다. 그런 시인의 울음을 읽으며 내 안에 감각들의 되살아남을 느낄 수 있다. 논리적이지 못해서 생산적이지 못해 숨겨야 했던 꽁꽁 감추어야 했던 그 감각들. 비논리의 변방의 감정들이 아픔으로 들어난다.

자신이 병들어 있음을 아는 것은, 치유가 아니라 할지라도 치유의 첫 단계일수는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아픔만을 강조하게 되면, 그 아픔을 가져오게 한 것을 은폐 하거나 신비화하게 될지도 모른다.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자서 부분, 이성복

아픔은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내면의 외침이다. 아픔은 오늘의 고통이지만 그 아픔을 치유하는 일은 오늘의 문제를 극복하고 더 낳은 내일을 설계하는 일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아픔에 소리를 기울여야 한다. 시인들은 자신의 아픔을 노래함으로써 읽는 자들에게 아픔을 일깨우고 그 아픔의 너머로 가 보이는 언덕이 우리를 세워놓는다. 시인들은 아픔을 쓰고 자신의 논리로 우리에게 그 너머로 향하는 나침반이 되어준다. 그들의 시를 읽음은 우리에겐 치유의 첫 단계이다.

너의 숟가락과 나의 숟가락은 맛이 다르지만

우리는 희망을 나눈 사이. – <맛>부분, 신해욱

함께 시 읽기. 한편의 시를 골라와 각자 자신의 해석을 더한다. 각자 선정해온 시의 선정과 그 해석에는 고스란히 자신의 낯선 감각이 드러난다. 그 낯선 감각과 타인의 감각이 더해져 읽는 시는 혼자 읽었던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 사진 속 풍경처럼 정지했던 시어들이 빛과 바람, 소리, 냄새가 더해져 살아있는 이야기로 생기를 더한다. 그 새로운 감각으로 시를 그리고 나의 오늘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의 아픔을 넘은 자기 혁명의 희망을 내다본다.

내 고단함을 염려하는 그대 목소리 듣습니다

나, 괜찮습니다

그대여, 나 괜찮습니다 – <사랑의 빗물 환하여 나 괜찮습니다>부문, 김선우

세미나가 끝난 토요일 늦은 밤. 난 종종 서울 시내를 오래 걷는다. 술취한 토요일의 도시풍경을 한걸음 한걸음 천천히 걸으며 오늘의 말들의 풍경을 몸속 세포에 곳곳에 쓴다. 오래된 정보를 저장하고 새로운 낯설음은 새롭게 저장한다. 동시에 오늘의 고단함을 청소하고, 어제의 울음을 잠재우고 언젠가 꺼내 쓰게 된 새로운 감각을 익힌다. 분명 시세미나 그날 이후 나를 둘러싼 말들의 풍경은 그전의 그것과는 다르다. 오늘의 아픔과는 다른 시적 파격의 내일을 위해, 나는 토요일 저녁 시세미나 “말들의 풍경”과 시를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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