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말들의 풍경, 절망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다

- 영영

시세미나를 처음 시작했던 작년 10월 15일. 하필 그 날은 10월답지 않게 추웠고 비도 왔었다. 비를 맞아서 축축한 몸을 가누면서, 계속 고민했다. 시세미나, 갈까 말까. 아니 정확히 말하면 간다 한들 계속 갈 수 있을까. 낯선 사람들과 무슨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 걱정되었다. 새로 이사했다는 삼선동 연구실도 너무 멀었고, 바쁘다기보다 지쳐가는 그 때의 일정에 또 무슨 사건을 만드는 게 내키지 않았다.

내리는 비를 보면서 그 고민을 했던 기억이 나는데 거기에서, 털옷까지 단단히 챙겨 입고 버스를 타러 나가던 5시의 나와 약간 어둑한 불빛 속 카페에 들어서는 6시의 나로 갑자기 기억의 이미지는 건너뛴다. 그렇게 시세미나를 처음 만났다. 끝나고 돌아와 일기에 뭐라 적었지? 밝히긴 부끄러운데, 아무튼 좋은 말 적었었다.

‘이유 없는’이라는 말은 틀렸다. 이 세상에 이유 없는 비애는 없다. 너무 많은 이유가 있거나 인정하기 싫은 이유가 있을 뿐. – 신형철

나는 왜 시세미나를 찾아가게 되었을까. ‘갈까’를 생각했던 이유는 있었다. 원래 문학을 좋아했고, 시 몇 편씩 찾아 읽기도 즐겼다. 전공도 어차피 시와 한 동아리였다. 하지만 그게 ‘가자!’로 바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나를 결국 가게 한 건, 지금 생각해보면 그 날 어쩌다 보게 된 영화 한 편이 아니었나 싶다. 눈물샘을 자극하려 작정한 듯한, 뻔하다면 뻔한 영화였다. 평소 같았으면 그냥 슬프네 하고 말았을 것을, 펑펑 울고 말았다. 세상에 이런 영화에 통곡하다니. 내가 왜 이럴까 싶었다.

내가 시세미나를 찾아가게 된 건, 영화를 보며 울었던 이유와 다르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지금에서야 한다. 나는 내가 우는 이유를 몰랐다. 그러나 이유가 없을 리 없었다. 너무 많은 이유가 있었고 인정하기 싫은 동시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그 이유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영화 속 주인공은 말했다. ‘가슴이 텅 빈 것 같아’. 내 가슴도 텅 비어있을까. 비어 있기 전엔 무엇이 있었고, 그걸 왜 잃었을까. 그 생각에 서러워 울었다. 그래서 시를 읽으러 갈 결심을 했다.

밤마다 우주의 바깥까지 날아가는 방은 외롭다 사람들아 배가 고프다 – 김경주

첫 시간에 읽어오라고 한 <가재미>를 그냥 읽어만 간 내게, 반장 은유 선생님은 ‘어떻게 시를 읽어야 하는가’를 대뜸 말했다. ‘낯선 정서를 생산해내는 시’, ‘팽팽한 긴장감으로 생각을 붙들어 매두는 시’, ‘불편하게 하고 의심하게 하고 낑낑대게 하는 시’가 좋은 것이라고. 처음엔 시보다 그 말이 더 낯설었다. 그래서 나는 어떤 시를 읽는가를 처음 생각해보았다. 막연히, 아름다운 시를 읽는다고 생각해왔다. 나를 낯설게 해 주는 시를 읽은 것은 아니었던 셈이다. 몽상에 가까운 꿈을 꾸게 하거나 아니면 미화된 기억에 젖게 하거나. 내가 좋아하는 시가 좋은 시는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이 그때 들었다. 그리고 궁금해졌다. 시가 주는 낯선 정서가 어떤 것일까. 그게 왜 좋을까.

그걸 알기 위해 그런 시를 읽다보니 나는 모르지만 남이 풀어내는 낯선 정서에 대해서 귀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내가 시세미나에서 정말 좋았던 점이, ‘호구 조사’가 없이도 가능한 만남이라는 것이었다. 서로에 대해 굳이 묻고 대답하고 할 말 없어 가만있다가 또 묻고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건 각자가 가져온 시 한 편과 이야기에 어떤 식으로든 녹아있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각자가 시에서 느낀 고유의 이미지 뿐 아니라 나처럼, ‘그냥’이 아니라 ‘너무 많은 이유’나 ‘인정하기 싫은 이유’로 시를 찾아야만 했던 곡절도 함께 있었다.

세미나를 하면서 종종 나오는 말이 있다. ‘아쉬울 거 없는 사람은 시 안 읽는다’. 대우 명제는 ‘시를 읽는 사람은 아쉬운 게 있는 사람이다’ 되겠다. 나를 포함하여, 모두가 아쉬운 게 있는 사람이었다(아닌가?) 시적으로 말하자면 외롭고 배가 고픈 사람들. 그 배고픔이 사람을 향한 것이든 아니면 꿈, 열정, 치열 그 자체이든. 자기가 배고프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그 배고픔을 시 아닌 즐겁고 재미있는 것으로 때우려 하지 않는 사람, 시 읽는 아픔과 괴로움 속에서 자기가 얼마나 배고픈지 알기를 마다않는 사람. 황금 시간대인 토요일 저녁, 나는 그런 사람들과 낯선 시를 읽었고 낯설다는 것이 시의 문제가 아닌 내 삶이 선택한 반경의 문제임을 알게 되었다.

누군가 내게 시가 뭐냐고 묻는다면 나는 대답할 수 없다.

그러나 시에게 내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시는 대답해 줄 것이다. – 네루다

그렇게 나누는 서로의 배고픔 속에는 각자가 간직한 기억의 풍경이 들어차 있었다. (시세미나의 이름은 다시 생각해도 참 잘 지은 것 같다) 아름답고 환한 기억에서부터 구질구질하고 궁상맞은 기억에 이르기까지. 듣고 있는 사람조차, 자기 안에서 있는지도 몰랐던 기억을 퍼 올리게 되곤 했다. 그리고 그 기억이 과거의 것이 아니라 현재의 것이기도 함을 낯설게 마주했다. 기억은 어디로 간 것이 아니라, 고스란히 내가 되어 있다는 것. 그걸 알게 되는 순간 네루다가 말했듯 시는 내가 누구냐는 물음에 대답해주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시가 말해주는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대답을 나는 정말 알고 있을까. 아닌 것 같다. 아니 어쩌면 ‘내가 누구인가’라는 질문 자체도 내 안에서조차 명확하지 않을지 모른다. 다만 시가 대답해준다는 것은 알고 있으니, 할 수 있는 일은 시로 퍼 올려지는 내 기억의 편린을 감추지 말고 바라보는 일일 것이다. 이게 생각보다 힘든데, 혼자 하면 더 힘들다. 세미나에서는 그걸 이야기해야 했다. 아니 나도 모르게 이야기하게끔 되었다. 수다가 되기도 하고 침묵이 되기도 하고 가끔은 정신없고 때로는 공허했지만, 시를 읽은 후 그 잠깐 동안 낯선 풍경을 온전히 내 것으로 느끼는 순간이 있었다. 뛰어넘은 사춘기를 뒤늦게 겪는 내게 시가 말해주는 ‘나는 누구인가’는 시세미나를 통해서야 내 마음 속 의제상정이 가능했다.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오고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 김수영

날이 덥다. 너무 더워서 피지컬 붕괴(?)가 온 탓인지 ‘멘탈’도 같이 붕괴하는 느낌이다. 상태가 그래서 이 글을 쓰는 게 조금 힘들었다. 거의 십 개월에 이르는 시간을 차분히 더듬을 수 있을까, 그 속에서 내가 무엇을 보고 어떻게 느꼈고 얼마나 변해왔는지를 이 부족한 짧은 글에 제대로 쓸 수는 있을까, 내 자신을 믿지 않았다. 그래서 자꾸만 글이 시세미나를 처음 시작했던 최초의 기억으로만 파고드는 느낌이다. 그 기억이 담을 수 있는 건 극히 일부분이겠지만 때로는 일부가 전부를 대신할 수 있는 경우도 있다. 그저 그 최초의 기억 속 나와, 내가 읽은 시와, 함께 읽었던 사람들을 소개하고 싶었다. 마무리를 짓긴 해야겠다. 그 모든 것을 집약하는 김수영의 시 한 구절로.

절망은 끝까지 반성하지 않는다. 어차피 반성하지 않을 절망 억지로 멈추고 돌려세워보아야 제 갈길 한다. 시세미나에서 만났던 시는 내게, 그런 절망과 끝까지 가 봐야 한다는 중요한 선택지를 던져주었다. 그리고 나는 그 시를 함께 읽으면서, 그 절망의 끝이 꼭 파탄과 폐허만은 아닐 것이라는, (어쩔 수 없는) 구원을 보았다. 사랑할 수 있는 것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하게 하는 것도 사랑의 힘이라면, 시세미나는 내게 사랑할 수 없던 내 안의 절망을 사랑하고 싶게끔 하는 엄청난 사랑과 구원을 선사해주었다. 내가 시세미나와 만난 최초의 기억이 이유 있되 예기치 못한 것이었듯 어느 누구에게나 구원은 이렇게, 생각보다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올지 모른다. 그 구원의 매개가 내게 시였다는 것이, 아니 시세미나였다는 것이 더 큰 축복이라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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