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미래파의 시로 비춰보는 ‘나’

- 말미

누군가를 만나 ‘나’를 소개할 때 우리는 ‘나의 무엇’을 말하게 되는가? ‘어디에서 태어났으며, 나이는 어떻게 되며’처럼 변함없이 증명할 수 있는 것, ‘누구와 살고 있고, 하고 있는 일은 무엇이며’처럼 역할이나 위치, ‘어떤 사건들을 겪었으며, 겪고 있으며’처럼 깊이 있다고 여겨지는 완성된 과거들이다. 이 이야기들은 우리가 상대에게 뚜렷하게 보여줄 수 있는 것들이며, 상대방의 혼란을 일으키지 않는 안정된 이야기들이다. 그것은 나를 소개하면서도 사실은 아무것도 소개하지 않은 것과 다름없다. 숲속 여기저기에 꽂힌 이정표를 읽는 것으로 숲을 경험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그 이야기는 나에게 접근해도 된다는 작은 제스처로 머물러야 한다. 상대방이 나를 알게 될 때에는 나를 경험할 때이며, 그때의 나는 공교롭게도 상대방을 경험하는 도중, 변화하는 도중이다.

우리는 등 뒤에서 서로를 껴안는다
바로 앞에서 당신의 머나먼 소리가 들렸다

– 김언 <만남>중에서

그뿐만 아니라 어떤 공간 속에 들어갔을 때에도 ‘나’는 변화한다. 하지만 공간은 그대로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나’만 공간에 걸맞게 변화한다. 그리고 이때 변하는 것은 우리의 역할이다.

계단은 정교하다는 것만으로도 당신을 지배하지.


지금 계단을 내려오는 당신은 계단으로 가득하며
당신도 모르게 계단이며

– 이장욱 <계단의 힘>중에서

출퇴근 시간 지하철 계단을 오르내릴 때 우리는 계단의 일정한 높이와 일정한 간격 때문에 일정한 박자를 강요받는다. 멀리서 그 모습을 바라보면 마치 계단이라는 거대한 손바닥 위에서 단체로 탭 댄스를 추는 것 같을 것이다. 그 위에서도 역시 나이가 몇인지, 직업은 무엇인지, 어떤 과거가 있는지 하는 이정표는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계단을 오르려면 누구나 다리를 움직이고 팔을 흔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간에 지배되는 ‘나’를 쉽게 상상해 볼 수 있다. ‘나’는 학교에 가려고 버스를 탄다. 학교에 내린다. 교실에 들어간다. 수업을 마치면 학원 버스를 탄다. 영어 학원에 내린다. 교실에 들어간다. 또 학원 버스를 타고 컴퓨터 학원으로 간다. 수업이 끝나면 너무 늦은 시간이라 엄마가 몰고 온 자가용을 탄다. 집으로 돌아온다. 이때의 ‘나’는 실제로 몸을 써서 움직이는 시간보다는 대부분 정지한 채 어떤 공간에 머무는 시간을 보낸다. 그 공간 속에서 ‘나’는 버스 안에서는 얌전히 앉아 있어야 하고, 복도에서는 뛰지 말아야 하며, 교실에서는 선생의 말을 들어야 한다. 집으로 돌아오면 숙제를 해야 하고 늦지 않게 잠들어야 한다. ‘나’는 공간에 걸맞은 역할 수행자로 하루를, 한 달을, 몇 년을 보내게 되며 그것은 내 몸에 걸맞은, 내 마음이 바라는 무엇을 찾아보는 과정을 막는다. ‘나’는 하고 싶지만 참아야 하는 마음만 품은 경향에 머물게 된다. 그러한 ‘나’는 어느 샌가 배정받은 공간과 규칙이 없으면 불안하다. 그러한 공간에 들어가 있지 않고 아무런 역할이 없는 ‘나’를 대면하는 순간이 오히려 불길해진다.

횡단보도 앞에 서서
파란불이 켜질 때까지


우리는
불길하게 방치되어 있는 것이다

– 오은 <발생하려는 경향>중에서

그렇다면 역할 수행자이기를 거부하고 자신만의 놀이에 빠진 ‘나’는 어떠한가?


나는 너무 자라버렸고 지상에서 노는 게 시시해
공중에서 놀고 어둠 속에서 놀지요

귀신처럼 멈춰 서 있는 나의 특기
사람들을 놀래키는 재주가 있지요
그들이 무심코 스쳐지나가는 관 속에
아흔아홉 개나 되는 가면을 나는 가지고 있어요

– 이민하 <가면놀이>중에서

‘나’는 가면놀이를 한다. 한 때 가장 가까웠던 엄마는 그 놀이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뿐만 아니라 못마땅하게 여긴다. ‘가면을 버리고 당신은 너무 빨리 늙어버렸’기 때문이다. 한 때 엄마도 이 놀이를 함께 했다. 내가 겨우 말하고, 걷기 시작했을 때 엄마에게는 그 모든 과정이 신기하고 사랑스러웠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나를 안아주고, 격려해주고, 입을 맞추었다. 내가 하는 놀이마다 허리를 낮추어, 혹은 나처럼 바닥을 기며 함께 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런 엄마가 달라졌다. 내가 자라자 엄마는 ‘엄마’ 역할을 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나에게 어떤 역할을(학생이 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나’는 지상에서 노는 게 시시하다. 지상의 놀이들은 공간이 주는 역할을 깨뜨리지 않는 안전한 놀이다. 그렇다고 가면놀이가 ‘즐거움을 위한 자발적인 활동’처럼 보이는 것은 아니다. 어쩐지 놀이를 하고 있는 ‘나’는 즐겁지 않고 외롭다. 왜냐하면 가면놀이는 함께 할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대상이 없는 놀이는 외침에 가깝다. 나는 가면을 수없이 바꾸어 쓰며 이게 나라고 말한다. 자신이 가면 자체이며 가면 뒤에는 아무도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나의 특기는 귀신처럼 서 있는 것이고, 숨은 관 속에 몸 대신 가면이 있다. 나는 엄마와 함께 할 수 있었던(그게 소통이든, 교감이든, 무엇으로 부르던) 그 시간을 다시 반복하고 싶지만 이제 불가능하다.

이쯤 되면 나의 놀이는 어쩔 수 없이 하는 놀이, 할 수밖에 없는 놀이에 가깝다. ‘엄마 역할’을 하기 시작한 엄마는 그 놀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런 ‘엄마’가 바라는 안전한 놀이나 배정받은 역할에 나는 당연히 만족할 수 없다. 엄마와 함께 하던 그 놀이를 이미 경험했기 때문에, 그런 놀이가 가능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와 과거를 함께 했던 엄마와는 다시 만나기 어려워졌다. 이제 ‘나’는 방향을 틀어 대상이 아니라 ‘과거’를 만난다.

나는 당신을 다 꺼내놓을 수 없습니다
시럽에 빠뜨린 크래커를 건지듯
따뜻한 틀 속의 쿠키를 꺼내듯
단지 나는 당신을 가지고 만든 책을 봅니다

– 김이듬 <제가 쓴 시가 아닙니다>중에서

그가 나와 내통할 때
내 몸의 물관과 체관을 오르는 게 있지

– 권혁웅 <내게는 느티나무가 있다 2>중에서

당신은 내 자리에 앉아 조각들을 붙여나가기 시작한다. ‘나’는 그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어깨 너머로 그의 작업을 조심스럽게 들여다본다. 그가 붙이고 있는 조각들은 어딘지 익숙하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내 과거 이곳저곳에서 조금씩 뜯어온 것들이다. 그는 그 조각들을 모자이크처럼 붙여나가며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림을 그려나간다. 조각들이 이어져 형태를 갖춘 부분들은 상상한 적 없는 방식으로 꿈틀거리고, 색을 발하고, 쉭쉭 소리를 낸다.

이때 놀이는 나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함께 하지만 그것을 주도하는 것은 ‘당신’이다. 하지만 당신을 내 자리에 머물게 하는 것은 나의 용기다. 놀이라고 했지만 즐겁고 신나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붙여나가는 과정을 그렇게 부를 뿐 과거를 들여다보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일 수 있다. 그래서 과정은 놀이여야 한다. 놀이이기 때문에 그런 과거도 새롭게 이어붙일 수 있다.

이제 이정표로 소개되는 내가 아닌, 매번 새롭게 만들어지는 이야기를 품은 ‘나’를 상상할 수 있다. 그런 ‘나’와 ‘너’의 만남은 서로 다른 과거에서 새롭게 솟아난 이야기들로 ‘깊이깊이 다른 건물을 쌓아 올린다’. ‘우리 관계는 / 어디에도 도달하지 못하’지만 ‘서로의 인력에 끌린다’. 비밀은 고갈되지 않는다.

우리는 문제를 열고
대화에 푹 빠진다
사랑에도 빠지고

– 김언 <테이블>중에서

이렇듯 미래파의 시로 비춰본 ‘나’는 일정한 형태로 머물지 않는다. 나는 매순간 마주하게 되는 것들에 영향을 받는다. 어떤 이정표로 찾아 갈 수 있는 나는 없으며, 그런 내가 만나게 되는 ‘너’도 마찬가지다. 나는 짧은 침묵이 될 수도 있고 마주 하는 사람의 눈빛이 될 수도 있다. 이러한 끊임없는 변화가 ‘나’의 속성이라면 우리를 일정하게 머무르게 만드는 힘은 고통일 수 있다. 그리고 일정하게 머물러 있는 타인과 공간은 ‘나’를 묶어두기 위해 역할을 강요한다. 거기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에는 놀이가 있으며 우리는 미래파의 시에서 과거와 내통하는 방식을 볼 수 있었다.

응답 2개

  1. 로널드말하길

    미래파시가 읽고싶어지네요. ‘나를 묶어두는 역할’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었습니다.

  2. […] 동시대반시대 | 미래파의 시로 비춰보는 ‘나’_말미 No Comments » Click here to cance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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