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지가 쓰는 편지

하버지의 행복론 (5)

- 윤석원(전 전교조교사)

6.공감 능력과 행복

하버지, 행복 얘기가 아니라 공감 얘기잖아. 그럼 공감 능력이 부족한 이들도 행복을 느낄 수가 있어? 그럼, 행복은 욕구가 채워진 만족 상태니까 그들에게 욕구가 있고 그것이 채워지기만 한다면 그들도 만족한 상태인 행복을 느낄 수 있지. 생명은 욕구와 만족 사이의 긴장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므로 그들도 살아있으니까 당연히 욕구를 가지고 있고 그에 따른 만족도 가지고 있지. 그럼 공감이 잘 되는 사람과 잘 안 되는 사람이 느끼는 행복이 같은 거야 다른 거야? 다르다면 어떻게 다른 거야? 그 둘 사이에 행복이 어떻게 다른지를 알려면 그들의 행복을 만들어내는 욕구가 어떻게 다른지를 물어야 된단다. 그럼 공감이 잘되는 사람들과 공감이 잘 안 되는 사람들의 욕구에 어떤 차이가 있어?

홍아야, 공감이 잘 되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 어찌되기를 바라겠니. 행복하기를 바라겠지. 그런데 지금 사랑하는 사람이 괴로워한다면? 함께 괴로워하면서 거기서 벗어나길 바라겠지. 바라는 마음만으로는 벗어날 수 없다면? 벗어나도록 도와야 하겠지.

홍아야, 네가 지금 ‘도와야 하겠지’라고 돕는 것이 마땅한 듯이 말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돕는 것은 결코 남에게 빚진 의무감 때문이 아니야. 공감하고 있는 자신이 괴롭기 때문이야. 사랑은 도울까 말까 계산하는 것이 아니야. 사랑하는 사람의 몸과 마음을 내 것으로 느끼기 때문에 내 몸을 위하듯이 즉자적이고 반사적으로 괴로움애서 벗어나려고 그와 함께 노력하는 거야. 하버지는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이 무슨 뜻인지 겨우 알 아 들을 것 같아. 사랑하는 사람을 돕는 것은 그 일이 선하기 때문이 아니라 사실은 더 커지고 넓어진 자신을 위해서였을 뿐이야.

그런데 이런 노력이 안 되는 사람들, 이런 노력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라고? 공감이 잘 안 되는 사람들. 공감이 잘 안 되면 왜, 어떤 노력을 할 수가 없다고? 당사자의 괴로움을 자신의 괴로움으로 느껴지지 못하니까 함께 벗어나려는 노력을 할 필요도 없고 할 수도 없어. 당사자의 괴로움에 동참할 수 없다면 거꾸로 무엇에도 동참할 수가 없을까? 괴로움을 벗어난 당사자의 기쁨에도 동참할 수가 없겠지. 그렇단다. 그들은 남들의 행복에 동참할 수 있는 행복이 없단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라는 말이 있어. 그 말은 사람과 꽃의 아름다움을 빛깔이나 향기라는 기준으로 비교하는 것이 아니니까 사실을 진술하는 말은 아니야. 그러면 그 말에 어떤 진실이 들어 있을까. 한 송이의 꽃이 그 아름다운 빛깔과 향기로 잠깐이라도 우리를 행복하게 할 수가 있지. 그런데 나에게 보내는 사랑하는 사람의 미소가 나를 행복하게 하는데 어찌 그 한 송이 꽃만 못하겠니. 사랑하는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데 사랑받는 인간 존재가 어찌 한 송이 꽃의 가치나 의미나 역할만도 못하겠니.

이를테면 네가 엄마를 행복하게 하는데 한 송이 꽃만 못하겠니. 네 엄마가 이렇게 말했단다. “아빠, 내가 어릴 때 이쁜 짓 한 걸로 효도를 다했으니 나에게 효도를 바라지 마.” 물론 네 엄마가 하버지와 하머니에게 효도한다는 게 귀찮고 싫어서 한 말이 아니라 너의 재롱이 너무 이뻐서 그 행복감을 말한 거란다. 엄마를 행복하게 만드는데 어린 네가 어찌 한 송이의 꽃에 비교되겠니. 네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네 엄마가 어찌 그런 행복이 있었음을 알 수 있겠니.

그 말을 들은 나는 네 엄마의 행복에 거의 가깝게 동참했단다. 너라는 존재가 아이를 기르는 고생을 다 잊게 했더구나. 얼마나 행복하면 하버지한테 그런 말이 나올까. 하긴 네 엄마는 어릴 때부터 행복물질인 세라토닌이나 엔돌핀 도파민 따위가 남보다 더 많이 분출되는 건지 언제나 행복해 보였단다. 그래서 하버지는 네 엄마는 행복을 타고난 걸로 알았어.

인간이 자신의 욕구 만족으로 얻는 행복보다 가족이든 연인이든 친구든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을 통하여 얻는 행복이 훨씬 더 큰 몫이라는 것을 안다면 인간이 행복해지는데 무엇이 중요하다는 것도 알 수 있겠니? 사랑하는 사람들의 행복에 공감할 수 있는 능력. 그래,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과 서로의 행복을 함께 느끼는 것이 자신이 가진 돈이나 권력이나 명예가 가져다주는 행복보다 더 크게 느껴지는 사람도 있겠고 더 작게 느껴지는 사람도 있을 게다. 이 차이는 사람마다 가진 공감능력의 차이일 거야. 만약에 사람들에게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면 무인도에 가서 혼자 풍족하게 지내는 것보다는 가난해도 사랑하는 사람과 공감을 나누며 지내겠다고 말하는 쪽이 훨씬 더 많을 것 같구나.

가진 것이 많은 사람들은 가진 것을 지키려고 공감하기를 거부하지. 그러면서도 그들은 행복해지려고 돈이나 권력이나 명예 등 가진 것을 이용하여 다른 사람을 고용하고 자신을 떠받들게 하면서 자신은 그들 속에서 편리와 편안과 풍족으로 행복을 누리지. 이것이 수많은 사람들이 바라는 행복을 추구하는 세속적인 방법이야. 그들은 가진 것이 사라지면 그동안 누리던 행복도 함께 사라지고 만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아.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소유물인 돈이나 권력이나 인기를 인간의 사랑보다 더 믿고 더 그에 집착할 거야.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들은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서로의 존재 자체가 서로에게 가장 큰 선물이 되어 서로를 행복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할지도 몰라. 그들이 공감을 믿지 못한다면 공감에서 우러나온 사랑이 있다는 것도 믿지 못할 테지. 그래서 불쌍하게도 그들에게는 사랑도 사랑하는 사람도 있을 수 없기에 사랑할 수도 받을 수도 없게 되었어. 그래도 가진 것이 많은 그들은 거래할 수 없는 사랑이라는 것은 없다고 믿고 사는지도 몰라. 그 모든 불행과 불쌍함은 모두가 공감 능력이 부족한 데서 온 거야.

하버지, 하버지가 공감을 강조하시는데 그러면, 정서 조절이나 공감에 선천적으로 장애 요인이 있거나 어린 시절에 사랑받지 못해서 공감 기회를 갖지 못한 사람은 평생 정서와 공감의 장애를 안고 살아야 돼? 그리고 정상인 사람에게는 평생 동안 그런 장애가 생기지 않을까? 홍아야, 전두엽이라는 뇌가 없이 태어난 사람이 있겠니. 전두엽이라는 기계 장치는 온전한데 세라토닌이라는 윤활유가 전혀 분비되지 않아서 감정이나 공감을 하나도 느끼지 못하는 인간을 상상할 수 있겠니? 그래서 정상과 장애 사이의 경계가 뚜렷하게 그어져 있겠니? 다만 정도 차이란다.

만약에 정도 차이라면 장애인 듯한 사람이라도 진정한 사랑에 공감할 기회가 많아지면 거의 휴면 상태인 세라토닌 분비구조가 활성화되어 아주 조금씩이나마 감정 조절 능력과 공감 능력이 나아질 수도 있을 게다. 홍아야 만약에, 꺼져 있는 듯한 감정 조절 능력과 공감능력의 불씨를 되살려내어 활활 타오르게 할 기름 있다면 그게 무엇이겠니? 공감할만한 사랑밖에 없겠지. 정말이야. 그렇구나. 그러자니 얼마나 커다란 인내를 가진 사랑이 필요할까.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할 사람이 정말 있을까.

거꾸로 정상이었던 사람들도 이해관계가 만든 잘못된 신념이나 고정관념 때문에 감정과 공감의 능력이 퇴화되어 정서나 공감에 장애가 생길 수가 있어. 이들은 권력이나 이익을 독점하여 쾌적하게 살려고 남의 괴로움에 공감하기를 거부했어. 이들은 남의 괴로움에 눈을 감고 살다 보니 나중에는 세라토닌 분비기능이 퇴화되어 감정을 조절하거나 공감을 느낄 수가 없는 스스로 장애자가 된 경우지. 전기가 통하는 도체가 있고 통하지 않는 부도체도 있잖아. 그들은 부도체가 되려고 노력했던 사람들이야. 그래서 가장 중요한 인간성 중에 하나인 공감능력을 버리려고 애쓴 사람들이야. 그들은 권력이나 이익을 독점하기 위해 남들의 괴로움에 공감하기를 거부했던 차디차고 완고한 사람들이지.

이를테면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6백만의 유태인 학살을 지휘한 히물러는 집에서는 아주 자상한 아버지였단다. 그런데도 수백만 유태인을 학살하는데 눈 하나 깜짝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 무얼 뜻하니.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밉거나 싫은 사람에게 선택적으로 마음 문을 닫아걸 수도 있다는 얘기야. 우리주변에 노동자에게 가혹한 사용자들이 바로 공감 장애자가 되려고 마음 문을 닫아 걸은 사람들이지. 그들도 집에서는 자상한 엄마나 아빠 노릇을 할 수가 있어.

그럼 하버지, 공감 범위를 넓히려면 어찌해야 돼. 바로 그게 문제야. 마음대로 안되니까. 그래서 인류의 위대한 스승들은 우리들의 공감능력을 키우기 위해서 입장을 바꾸어, 역할을 바꾸어, 마음을 바꾸어 생각해보고 말하고 행동하자고 가르쳤어. 예수님의 황금률은 “당신이 대접받고 싶다면 당신이 먼저 이웃을 대접하시오”야. 공자님도 “당신이 싫어하는 짓을 남에게 하지 않는 것이 인입니다.”라고 말씀하셨어.

우리는 공감으로 할 일과 말 일을 구분할 수 있다는 거야. 예수님의 긍정문이나 공자님의 부정문이나 출발점은 ‘당신’인 나야. 나라면 그 상황에서 어떤 마음이 들고 어떻게 말하고 행동할 것인지 나를 객관화하여 남들의 심정과 언행을 공감한 뒤에 그 공감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라는 거야. 그게 현대 신경과학이 말하는 전두엽의 감정 조절 방법이야.

우리가 공감한 경험으로 보나 인간의 보편성으로 보나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남들도 좋아하고 내가 싫어하는 것을 남들도 싫어한대. 내 맘이나 네 맘이 크게 다를 것 없다는 사실에 바탕을 두고, 홍아야, 우리가 다른 모든 도덕률을 쓸어 담을 만큼 커다란 오로지 하나의 도덕률을 만들어 볼까. “무엇을 남에게 하고 무엇을 남에게 말라.”고 할까. 네가 두 ‘무엇’을 찾아 완성해봐.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남에게 하고 내가 싫어하는 것을 남에게도 하지 말라.

그래, 바로 그거야. 오로지 이 하나의 도덕률만 철저하게 지키면 저절로 공감의 범위가 넓어지고 저절로 사랑하거나 자비롭거나 인한 마음이 생긴다는 거야. 그래서 서로를 행복하게 하려고 애쓰게 될 테니 그러면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이 성현들의 가르침이야. 다만 내가 좋고 싫어하는 것이 사람마다 다른 기호나 취미를 가리키는 게 아니야. 이를테면 상대방은 밥을 먹기를 원하는데 내가 빵을 좋아하므로 상대방도 빵을 좋아하려니 하고 빵만 주라는 뜻이 아니야. 내가 빵을 좋아하듯이 상대방도 좋아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상대방의 존재를 대표하는 그의 의견을 존중하라는 거야.

우리는 역사 기록에서 공감 능력이라는 인간성을 거스르는 수많은 이념과 그에 따른 체제들을 실험해왔음을 알 수가 있어. 그러나 계속되는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공감을 수렴하여 공동체를 운영하는 민주주의를 발전시켰어. 아직은 민주주의가 가진 자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수단이지. 그러나 멀게 본다면 사회의 밑바닥에서 괴로워하는 목소리를 좀 더 경청하고 함께 해결하여 다 같이 행복한 공감 민주주의로 발전하리라 믿어. 하버지는 그것이 바람직한 인간성의 하나인 공감능력을 실현하는 쪽이고 역사 발전과 인간 진화의 방향이라고 믿고 있단다. 하버지 정말 그렇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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