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역사의 뒷골목

건국의 애비들 (2)

- Beilang(동아시아사상사연구자, 뉴욕이타카)

4. 미국식 법치의 보수성

총 때문에 매일 근 백 명의 사람들이 죽어가도 수정헌법 제 2조에 명시된 총기소유의 권리는 제 1조에 규정된 민주주의의 근본원리인 언론과 종교, 출판의 자유와 동급의 취급을 받는다. 수정헌법의 처음 10개 조항은 ‘권리장전’으로 불리며 건국 초기에 일괄 수정된 것으로 최초 <헌법>의 일부처럼 인식되기에 다른 수정헌법 조항들보다 그 권위가 더 높다. 하위법으로 총기 소유에 부분적 제약을 가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이것조차도 미국총기협회(NRA)를 중심으로 한 보수측의 집요한 반대로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데 제 2조를 개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봐도 무방하다.

여기서 200년도 더 된 <헌법> 숭배가 미국 사회 전반의 보수성의 원천임이 드러난다. 헌법 수정은 상원 하원 2/3 이상이 동의하면 법안을 각 주에 제안하고 이 제안을 50개주 가운데 3/4 즉 38개 이상의 주가 정해진 시간 내에 동의하는 추인절차를 끝내야 정식 법안이 되는데 총기규제 같은 논란이 되는 법안은 말할 것도 없고 어떤 수정안도 이런 과정을 통과하는 것은 이제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 절대 다수의 의견이다. 미국 전 역사를 통해 만 개가 넘는 수정법안 요구가 있었지만 이 가운데 상하원의 동의를 받은 것은 겨우 33개에 지나지 않고 이 중 17개—수정헌법 전체 27개의 법조항에서 ‘권리장전’을 뺀 것이 나머지 17개 조항—만이 주의 추인을 받아 정식 법안이 되었다. (통계적으로 법안 통과율이 0.15% 정도다.)

하다못해 세금을 내는 멀쩡한 미국 시민임에도 상원에 대표가 없고 대통령 선거에 선거권도 없는 미국의 수도인 특별구 워싱턴 디씨에 정당한 권리를 주자는 너무도 당연한 요구를 담은 수정제안조차도 대통령 선거는 1961년 통과된 수정헌법 23조에 의해 가능해졌지만 상원에 대포를 보내는 법안은 16개 주만 추인하는 바람에 거부되었다. 이로 인해 아직도 와이오밍 주민수보다 많은 근 60만명의 미국인이 상원 대표가 없다. 흑인들이 많이 사는 지역이라 보수적인 주들이 원치 않기 때문이다. 1789년 제헌의회에서 제안된 수정안 하나는 시간 제약이 걸려 있지 않아 200년이 넘도록 아직도 주의 추인을 기다라는 제안상태로 남아있으며 1992년 추인된 마지막 수정헌법 제 27조는 제헌국회 때 제안된 것이 통과된 것이다. 참으로 해괴한 연속성이다.

미국의 법체계를 상당히 정교하고 잘 조직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건국 당시부터 별로 바뀐 것이 없이 이어져온 <헌법>의 연속성으로 인해 전체적으로 굉장히 정교한 체계를 갖추고 있는 것처럼 보일 뿐 발생하는 온갖 법적 문제는 끝없는 소송과 궁극적으로 대법원 판결에 의해 잠정적으로 매듭지어질 뿐이며 여기저기 허술한 구석이 한두 곳이 아니다. 비교적 최근의 역사에서 벌어진 사건들이 좋은 예가 될 것이다.

2000년 대통령 선거 당시 앨 고어는 더 많은 표를 얻고도 결국 선거인단수에서 밀려 선거에서 졌는데 플로리다에서 벌어진 박빙의 결과를 놓고 벌어진 일련의 사태는 한국의 동장선거만도 못한 수준의 선거관리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아무도 제대로 알지 못해 우왕좌왕하게 만든 허술한 법체계를 여지없이 노출시켰다. 공화당이 선수를 쳐서 받아낸 연방대법원의 판결로 승리를 거둘 수 있었지만 이는 법적 근거가 없는 잘못된 판결이었다는 것이 학자들의 중론이며 애초 연방이 아니라 플로리다 주대법원이 최종 판결의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학자들의 강력한 주장도 있다. 여기에 더해 9-11 이후 부시가 고문과 무차별 도청, 마구잡이 체포와 법적 근거 없는 무기한 구금을 법 하나 바꾸지 않고 실행할 수 있었던 것을 보더라도 미국의 법 그리고 나아가 민주주의의 법치라는 것이 사람들이 환상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견고한 시스템이 아니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부시의 이런 정책들을 혹독하게 비판하며 대통령이 된 오바바가 정식법안을 만들어 부시의 불법행위의 상당수를 합리화했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연방정부의 역할에 가장 비판적인 보수적 세력들이 <연방헌법>의 가장 강력한 수호자들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최근 대표적인 보수 포퓰리즘 운동의 중심으로 등장한 ‘티 파티’는 연방정부를 민중의 자유를 억압하고 자율권을 훼손하는 위험한 세력으로 치부하면서, 강한 국가주의적 색채를 띠고 있으며 그 연장선상에서 건국의 애비들을 신의 대리인으로, 연방헌법을 신성한 문서로 받아들인다. 연방정부는 거부하면서 연방헌법은 신성시하는 이 이율배반은 그들의 기독교적 국가주의적 보수주의가 역사적 상징 없이 표상되기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미국 역사에서 노예제 그리고 인종차별을 유지하려 했고 남북전쟁으로 자신들이 패배한 뒤에도 자신들의 더러운 과거를 끝끝내 유산으로 지키려는 그들에게 자신들의 권리를 상당부분 수용하면서 타협으로 이루어진 <헌법>은 자신들의 주장을 합리화할 수 있는 권위 있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티 파티의 ‘건국의 애비들’과 <헌법> 숭배를 비꼰 삽화. 출저: The Econcomist

티 파티의 ‘건국의 애비들’과 <헌법> 숭배를 비꼰 삽화. 출저: The Econcomist

과거의 유산 숭배에 기초한 이러한 사상적, 법률적 보수성이 사회의 안정에는 기여했다고 말하지만 어설픈 타협을 해소하기 위해 당시로서는 엄청난 근 백만에 이르는 희생자를 낸 내전을 치러야 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런 주장도 상당히 의심스럽다. 그리고 그 안정이라는 것도 엄청난 억압과 차별위에 서있는 안정이며 미국 사회가 좀 더 바람직한 가치가 실현되는 곳으로 만드는 것을 방해한 퇴행적 안정일 뿐이다. 연방 차원에서 지나치게 큰 대표력을 확보한 보수세력 들이 곳곳에서 진보적 전망과 정책에 딴지를 걸어온 것이 바로 미국 사회 전반적 보수성의 실체로 예를 들면 와이오밍 주는 인구의 거의 70배인 캘리포니아 주와 상원에서 동일한 대표력을 갖고 있으며 대통령 선거인단 수도 약 1/18이나 된다. 이런 보수적 서부와 남부 주들의 지나치게 비대한 대표력은 그래도 정치적 힘으로 반영된다.

여기서 그나마 이런 비례의 불균형이 덜한 대통령 선거를 통해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힘이 연방이라는 중앙의 국가권력을 매개로 보수적 힘을 누르며 가까스로 진보의 균형을 맞춰온 것이 미국의 정치구도인 것이다. 따라서 미국의 거의 모든 진보적 정책과 법률은 민중의 강력한 요구에 부응한 중앙의 주도권에 의해 추동되고 왔고 지역의 권리, 지역 자치를 부르짖는 세력들이 해온 일은 노예제에서 시작해 여성과 유색인종, 이민자 그리고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합리화하고 교과서에서 진화론 빼고 창조론 넣기, 공립학교에 기도 시간 넣기 따위의 저열하고 퇴행적인 것들이 대부분이다. 우리에겐 상당히 진보적으로 인식되는 대안교육도 미국에선 신을 가르치지 않고 남부의 노예제 등 자신의 역사적 유산을 무시하는 공교육을 반대하는 기독교 보수세력의 전유물이다. 미국에서 티 파티같은 지방자치와 지역의 권리를 주장하는 세력을 옹호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상당수는 남들이 연방에서 받는 혜택에 대해서는 온갖 비난을 퍼부으면서도 자신들이 누리는 혜택은 포기할 의사가 없고 종종 더 요구하기까지 하는 도덕적 파산자들이라는 사실도 지적해 두어야겠다. (대표적인 예가 다른 나라의 농가를 파멸로 몰아넣어 국제적으로 원성이 자자한 농업관련 정부 보조금이다.)

그런데 진보적 세력마저 ‘꼰대’들과 그들이 만든 문서에서 영감을 구하곤 하는 탓에 스스로의 존립근거를 약화시켜 왔다. 아무리 진보적 시각으로 재해석한다고 해도 <헌법> 그리고 법률 일반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고 그 <헌법>을 만든 ‘건국의 애비들’을 추앙하는 것은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미국에서 첨예한 법률논쟁이 벌어질 때마다 등장하는 <헌법>의 특정 조항을 만든 ‘건국의 애비들’의 ‘의도’와 ‘동기’를 둘러싼 논쟁은 이런 과거 우상화가 만들어낸 소극이다. 왜 과거와 절연된 현재의 문제를 다루는데 200년도 더 된 법률조항을 두고 입법자의 대가리 속을 추측해야 하나? 결국 이런 오도된 노력은 제대로 된 역사적 탐구를 방해하며 현실을 움직이는 정치적 역학에 눈을 어둡게 하고 법적인 자구의 해석에 과도한 관심을 기울이게 만들뿐이다.

5. 마치며

근대적 폭력의 시발인 근대국가의 꼰대들을 우상화하지 마라. 국가가 가장 강력한 폭력기제가 되어 내적으로 외적으로 억압과 고통을 양산하고 있는 이 때 ‘근대의 꼰대들’에게 답을 구할 수는 없다. 그들은 어떤 식으로든 목이 잘려야 하는 운명의 존재들이지 지속적인 숭배의 대상이 아니다. 죽은 애비를 끝없이 불러내어 근대의 폭력과 죽음의 잔치를 계속하겠다는 세력은 척결과 타도의 대상이지 타협의 상대가 아니다. 이점에서 우리는 하버마스가 말한 ‘미완성 근대의 프로젝트’와는 다른 의미의, ‘꼰대’들의 목을 치는 다른 “근대적” 프로젝트를 완결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미국의 한계란 법치의 한계란 곧 전통의 한계, 그 전통을 기초한 ‘건국의 애비들’의 한계이기도 하다. 그들을 ‘꼰대’로 숭상하면서 그 꼰대들의 한계를 자신들의 전통의 기반, 법률적 근간으로 인식해온 것이 미국이며 그것이 바로 미국의 폭력성의 기반인 것이다. 더구나 근대의 패자로 자신의 힘을 전세계를 향해 뻗쳐온 미국의 경우 이 꼰대들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나아가 그 꼰대들의 목을 자르는 ‘부친살해’는 절실한 문제이다. 이것을 두고 미국이 바람직한 사회로 나아가는데 필수적인 윤리적 실천이라고 여기는 진보적 힘들과 그것을 애비에 대한 패륜이자 악으로 인식하는 보수적 힘 사이에서 미국은 방황하고 갈등하고 있는 것이다.

정 건국의 꼰대들에게서 영감을 구하고 싶다면 그 중 일인인 제퍼슨이 독립선언 11년 후인 1787년 공식문서가 아닌 사신에 남긴 다음의 글을 볼 것을 권한다.

“하느님이 보우하사 반란 없이 20년 세월이 지나가는 일이 없기를! … 우리 13개 지역은 11년간 독립해 있었고 한 번의 반란이 있었는데 이는 한 세기 반에 한 번의 반란이 있었던 셈이다. 역사상 어느 나라가 한 세기 반을 반란 없이 존재한 적이 있었던가? 만약 사람들이 저항의 정신이 갖고 있음을 때때로 통치자에게 경고하지 않는다면 어떤 나라가 자유를 유지할 수 있겠는가? … 그들로 하여금 무기를 들게 하라 … 자유의 나무는 때때로 애국자와 폭군의 피로 생기를 얻어야 한다. 그 피는 자연이 나무에 주는 거름이다.”

그렇다. 이 피는 민중들이 폭력을 독점해온 근대국가와 그 애비들에게 돌려주는 준엄한 ‘초폭력’적 경고이다. 애비의 목을 치지 못하겠으면 애비가 꾸었던 이런 꿈이라도 간직할 일이다.

응답 1개

  1. 지나가다말하길

    미국 근대의 애비들을 향한 격한 분노가 느껴지는 글, 잘 읽었습니다. 마지막의 서늘한 교훈, 명심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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