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소셜 미디어, 과잉 긍정의 장치

- 심보선

나는 이제 트위터와 페이스북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물론 소위 ‘눈팅’은 종종 하는 편이다. TV 뉴스나 신문에서는 접하기 힘든 소식을 알고 싶어서, 때로는 급한 상황에서의 긴요함 때문에, 혹은 지인들의 이야기나 의견을 엿보고 엿듣기 위해서다. 말하자면 소셜 미디어에서 ‘소셜’보다는 주로 ‘미디어’에 방점을 찍어 사용하고 있는 셈이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소셜 미디어의 ‘소셜social’에 대해서, 무엇보다 그것이 지니는 과잉 긍정성에 대해 피로를 느끼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페이스북에는 ‘좋아요like it’만 있어서 “요새 사는 게 우울해요. 죽고 싶을 지경이에요.”라는 글에도 ‘좋아요!’를 클릭해야 한다. 트위터의 ‘팔로우follow’도 조금은 웃기다(‘추종’이라니!). 페이스북과 트위터를 현실로 바꿔서 상상하면 다소 기괴하다. 누군가의 뒤에 수많은 인파가 따라다니고 그는 또 누군가를 따라 다니고, 그 누군가가 한마디 하면 추종자는 그걸 주변 사람들에게 전파하고 엄지손가락을 올리며 동의하는 그런 장면이 떠오른다. 그 와중에 ‘섬’, 혹은 ‘군도’이길 자처하는 개인들이 산발적으로 존재한다.
물론 과잉 긍정의 경향을 상쇄하는 과잉 부정의 다이내믹도 소셜 미디어에서는 만만치 않다. 소위 악담과 악플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오해하지 말기를 바란다. 나는 지금 비판적인 견해나 입장의 표명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소셜 미디어의 핵심은 의견이나 취향을 통한 커뮤니케이션, 커뮤니티의 형성이 아니라 엄밀히 말하면 의견이나 취향에 대한 ‘반응reaction’을 통한 커뮤니케이션, 커뮤니티의 형성이다. 사실 개인들의 이름과 개성을 지우고 보면 소셜 미디어는 일종의 반응의 데이터베이스라고 볼 수 있다. 이 데이터베이스의 특징은 데이터의 분포가 스무드하지 않고 과잉 긍정과 과잉 부정으로 양극화되어 있는 것이다. 나에게 소셜 미디어의 세계는 ‘좋아요’와 ‘싫어요’라는 두 가지 값으로 치솟았다 가라앉기를 반복하는 파도들로 이루어진 정보의 바다다. 그 바다를 항해하다 보면 멀미가 날 것 같을 때가 많다.
물론 소셜 미디어 상에서 부정성과 긍정성의 표현 사이에는 매우 중요한 차이가 있다. 과잉 부정은 과잉 긍정과 달리 장치dispositive화된 표현법을 결여한 채, 부유하는 ‘말’, 또는 ‘문장’의 형태로 존재한다. ‘좋아요’는 있지만 ‘싫어요dislike it’는 없다. 팔로잉과 팔로워의 숫자는 나오지만 내가 ‘언팔unfollow’하거나 나를 언팔한 사람들의 숫자는 나오지 않는다(소셜 미디어가 아닌 경우에는 부정성을 표현하는 장치들이 있다. 유튜브에는 ‘싫어요’가 있다. 보통은 평점 장치를 통해 콘텐츠에 대한 부정적 의견을 표하게 한다.). 만약 소셜 미디어에 ‘싫어!’라고 말할 수 있는 장치를 넣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예전에 스넙스터Snubster라는 반사회적anti-social 네트워킹 사이트가 개설된 적이 있었다. 여기서 반사회적이라 함은 소위 반체제적이거나 무정부주의적이거나 그런 뜻이 아니다. 이 사이트의 창시자는 긍정성에 반대하며 오히려 부정성을 적극적으로 표방하는 소셜 미디어를 만들고자 했다. 그는 ‘온라인 커뮤니티’가 가증스럽다고 보았다. 실제로는 친하지도 않으면서 1촌이니 팔로워니 좋아요니 뭐니, 가짜 인간관계를 넓혀가는 온라인 풍토가 맘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는 스넙스터에 두 가지 기능을 넣었다. On Notice와 Dead to Me. On Notice에는 대략 맘에 안 드는 아이템이나 사람을 명시한다. Dead to Me는 말 그대로 관계의 사망선고를 뜻한다. 여기에 자기가 관계를 끊고 싶은 사람과 그 사람의 이메일 주소를 올리면 그 사람에게 ‘있잖아, 당신 말야, 나에게 당신은 이제 아무런 의미 없는 존재야’라는 메세지가 전달된다.

스넙스터에서 흥미로웠던 건, 사람들이 투표를 통해 어떤 인간이 혹은 물건이 얼마나 혐오할만한 지 평가를 내릴 수 있고, ‘싫어요’의 리스트를 공유하는 사람들끼리 링크가 생김으로써 일종의 ‘혐오를 통한 커뮤니케이션 및 커뮤니티’가 형성된다는 사실이었다. A를 맘에 안 들어 하고 있는 차에 B도 A를 맘에 안 들어 한다는 걸 알았을 때, 갑자기 B랑 친해지고 싶은 인간심리를 스넙스터는 잘 이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신선한 아이디어를 장착했음에도 스넙스터는 오래가지 못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나는 이것도 싫고 저것도 싫고, 모두 모두 싫어”를 외쳐대는 커뮤니티를 상상해보라. 오로지 부정성만으로 결속된 커뮤니티는 긍정적 커뮤니티 못지않게 피곤하기도 하거니와 비현실적이기도 하다. 겉으로는 부정성을 중심으로 결속된 것처럼 보이는 커뮤니티도 부정성만으로는 움직일 수 없다. 어떤 커뮤니티는 ‘적’에 대한 부정을 통해 궁극적으로는 긍정성을 향해 나아간다. 외적으로는 부정적이고 비판적이지만 내적으로는 긍정적이고 호혜적인 경우도 많다.
사실 긍정성이 부정성보다 훨씬 더 편리하고 현실적이다. 사실 ‘팔로잉’이나 ‘좋아요’는 사실은 네트워킹과 놀이의 판을 넓히는 수단에 불과하다. ‘좋아요’라는 캐치프레이즈는 ‘싫어요’보다 더 넓은 자율의 영역을 확보하게 한다. 일단 포용하고 난 다음에 거기서 추리는 것이 훨씬 편하다. ‘좋아요’ 했다가 ‘싫어요’ 하는 것은 상대방의 탓으로 문제를 돌릴 수 있다. 그러나 ‘싫어요’ 했다가 ‘좋아요’ 하는 것은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는 셈이 된다. 일종의 에고ego 게임인 소셜 미디어에서 ‘좋아요’라는 패는 플레이어에게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 더군다나 현대의 인간은 외로운 존재들이다. 이제 속내를 털어놓을만한 친구의 숫자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2004년도 미국의 경우 속내를 털어놓을만한 친구의 숫자는 평균 2.08명이었으니 지금은 더 줄어들었을 것 같다. 외로움이 확장되고 가속화하는 추세에서 무작정 ‘싫어!’하고 부르짖는 것은 외로움만 더할 뿐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소셜 미디어의 세계에서 부정성을 적극적으로 장치화하는 것은 효과적이지 못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다는 것은 “Dead to Me” 리스트가 늘어나는 쉼 없는 과정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정말이지 무의미한 만남의 연속이 우리네 자본주의적 삶이다. “오늘 반가웠습니다. 담에 또 봅시다.”라는 인사말을 주고받자마자 많은 사람들이 “Dead to Me”리스트에 올라간다. 삶이 그러하기 때문에 어쩌면 소셜 미디어에서는 긍정의 장치가 우세한 지도 모른다. 속내를 말하는 사람은 서너 명도 안되는데 트위터의 팔로워와 페이스북의 친구는 수백 명이다. 우리는 결국 현실의 불행을 부정하면서 혹은 부정하기 위해 소셜 미디어가 제공한 긍정의 장치 내부로 자발적으로 포획된다. 나에게 남은 질문은 이런 것들이다. 소셜 미디어의 소셜은 ‘친교’가 아닌 다른 의미의 소셜을 작동시킬 수 있을까? ‘좋아요’는 동의와 동감을 넘어서서 동행하고 동참하겠다는 의지를 구현할 수 있을까? 소셜 미디어에 참여하는 주체들이 자본주의 체제가 파괴시켜버린, 혹은 기능과 역할의 할당으로 축소시켜버린 ‘사회적인 것the social’을 재발명할 수 있을까? 아감벤 식으로 말하면 장치로서의 소셜 미디어를 어떻게 공통의 사용으로 세속화할 수 있을까? 장치를 어떻게 삶-의-형태와 연결시킬 수 있을까? 하긴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을 구하기도 전에 기업으로서의 소셜 미디어는 문을 닫을 수도 있다(얼마 전에 페이스북의 주가는 폭락했다). 소셜 미디어의 파국이 ‘소셜’ 전체의 파국이 아니라면, 그저 한 통치 기술의 파국이라면 페이스북과 트위터의 몰락은 전혀 애통해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문득 불길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응답 1개

  1. 한준말하길

    …… 좋아요!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