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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의 철학, 철학의 차이

- 김은영(수유너머N)

‘차이’의 철학자, 들뢰즈와 데리다

들뢰즈와 데리다, 이들은 대표적인 ‘차이’의 철학자다. 데리다에게 ‘해체’, 그리고 이 해체주의가 내포하는 ‘차연(差延, différance)’이 있었다면, 들뢰즈에게는 ‘차이’, 정확히는 ‘차이 그 자체(différence en elle-même)’가 있었다. 그들이 ‘차이’를 말함에 있어 ‘차연’ 혹은 ‘차이 그 자체’를 사용했던 이유는 ‘차이’가 전통적인 사상에서 사용되던 ‘개념적 차이’로 오해됨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이들은 ‘차이’에 관한 작업을 동일성 아래 ‘차이’를 부정적인 것으로 포획시켜놓았던 기존 재현의 논리들에 대해 비판의 날을 세우는데서 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이들이 차이에 그토록 주목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들뢰즈와 데리다는 각기 다른 사유체계들을 뭉뚱그린 후 획일적으로 구분선을 그어버린 기존의 표상과 개념들 속에서 우리는 과연 세계를 진실하게 파악할 수 있는지를 묻고자 했다. 또한 현재의 표상 체계들을 지나치게 신뢰한 나머지 현실의 풍부함과 다양성을 잃어버린 것은 아닌지 질문하고자 했다. 들뢰즈와 데리다에게 있어 ‘차이’의 철학이란 이와 같이 표상적, 개념적 사유에 대한 반발에서부터 출발한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표상적 체계에 의해 억압된 차이들을 해방시키고자 ‘차이’의 철학을 주장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 두 철학자는 ‘차이’를 말하는 데 있어 사뭇 다른 길을 선택한다. 데리다는 ‘표상주의’, ‘재현주의’를 공격함에 있어, 가장 일반적인 표상 체계라 여겨지는 언어를 주요 타깃으로 삼았다. 그는 언어가 모든 현실의 존재들에 잠재해 있는, 그래서 저마다 독특하고 개성적인 ‘목소리’를 어떻게 억압해왔는지를 밝힘으로서 지금까지 서구의 사상 전체가 얼마나 왜곡되었는지를 비판할 수 있다고 보았다. 한편 들뢰즈는 표상주의를 비판하는 데서 나아가, 이것에 의해 억압되어 왔던 존재들의 다양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새로운 방법론을 찾고자 했다. 데리다가 기존 철학들과는 거리를 둔 채로 역사적인 논증들을 그 발단부터 무너트리고자 했다면, 들뢰즈는 ‘차이’를 언급하기 위해 오히려 철학사로부터 체계적인 형식과 논증 그리고 개념들을 취하여 그것들을 새롭고 파괴적인 형태로 다시 주조하고자 했던 것이다. 데리다가 원리나 방법이 드러나는 것에 명백히 저항하면서 차이에 대한 글쓰기의 스타일과 에토스를 제공하고자 했다면,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을 통해 차이의 철학에 대한 진정한 원리와 방법을 모색했던 것이다. 전통적인 존재론을 극복하겠다는 동일한 과제를 떠안고 출현했던 이들의 ‘차이’의 철학이 지니는 차이는 여기에 있었다. 좀 더 정확히는 ‘차연’ 그리고 ‘차이 그 자체’에서 이들의 차이가 드러나는 것이다.

데리다의 ‘차연’

데리다는 차이(différence) 라는 단어만으로는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진정한 ‘차이’를 드러낼 수 없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차연, différance’라는 신조어를 사용함으로 그 속에 자신의 ‘차이’에 대한 생각들을 집약하고자 했다.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차이’가 근대철학자들이 말했던 차이와 다르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 의미상으로는 ‘차이’를 나타내면서도 차이와 구별될 수 있는 역설적인 용어가 필요했던 것이다. 차이를 의미하는 프랑스어 différence와 différance는 둘 다 모두 ‘디페랑스’라 발음된다. 이들은 3음절의 e와 a에 의해 표기상 구분되지만 발음, 즉 발음으로는 구별되지 않는다. 말로 구현되는 동시에 차이가 소멸해버리는 두 단어는 ‘차연’의 개념을 살피는 데 있어 중요한 힌트를 제공한다.
데리다는 서양 철학이 전통적으로 말과 소리를 숭상함과 동시에, 글과 문자를 폄하해왔음을 지적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플라톤은 말이 말하는 사람의 현전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진리에 가깝고 이에 반해 글이란 글쓴이의 부재를 전제한다는 점에서 늘 왜곡의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플라톤의 문자에 대한 입장은 『파이드로스』에 잘 나타나 있다. 『파이드로스』에서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들이 문자나 기록 등에 애착을 지니는 것에 대해 강하게 비판한다. 그는 문자를 ‘파르마콘(pharmakon)’에 비유한 바 있는데, 그리스어로 파르마콘이란 일반적으로 ‘약’이란 의미를 지님과 동시에 ‘독 당근’ 역시 의미한다. ‘독 당근’이란 당근(약)이 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독도 될 수 있는 이중적 성질을 지닌다. 소크라테스에게 문자란 사라지는 말을 기록하는 동시에 말의 권위를 위협한다는 점에서 파르마콘이다. 플라톤은 문자가 원래 말의 부재 시 말을 보조하고 대신하기 위한 ‘대리보충(supplément)’에 불과했지만 그것이 역으로 말을 뒤흔들며 위협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글보다 말이 우월하다고 지적했던 것이다. 하지만 데리다는 플라톤의 주장을 비틀어, 말과 문자가 지닌 역전 가능성을 지적한다. 일반적으로 말이 부재할 경우 글은 말을 대신하는 ‘대리보충’이다. 하지만 플라톤의 저작만 보더라도 이 관계는 모호해져버리고 만다. 플라톤의 글은 결국 그 자신이나 소크라테스가 했던 말의 대리보충이지만, 그들이 없는 오늘날 우리는 오로지 플라톤의 기록만으로 그들의 사상에 접근할 수밖에 없다. 즉, 플라톤의 문자는 그의 의도와는 달리 거꾸로, 말의 권위를 찬탈함과 동시에 절대적인 위치에 등극해버린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플라톤과 소크라테스의 말이 그것을 대신하는 대리보충인 문자의 대리보충으로 전락해버렸음을 알 수 있다. 데리다는 말과 문자의 관계가 이처럼 잉여와 결여, 보충과 대리의 의미를 동시에 지닌다는 점에서 ‘대리보충에 의한 대리보충(la supplément au supplément)’의 관계라 말한다. 그가 ‘différance’를 표기상으로만 차이가 나게 기술한 것은 말에 대한 전통적인 신뢰가 얼마나 덧없는지를 보여주는 일종의 상징이 된다.
데리다가 ‘차연’을 이야기하며 e가 아닌 a를 붙인 데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영어의 ‘-ing’ 용법처럼, 프랑스어 문법에서는 동사의 어간에 ‘-ant’을 붙여 진행형을 만든다. ‘차연’이란 동사 ‘différer’에 ‘différant’로 변화한, 즉 진행형의 의미 역시 내포한다. 즉 ‘차연’의 e/a 표기는 ‘차이’가 결코 고정되고 결정된 것이 아니라 늘 진행되는 과정임을 표현하고 있는 셈이다. 또 하나 주목해야하는 점은 프랑스어 동사 ‘différer’가 ‘차이 나다’라는 뜻 말고도, ‘연기(지연)하다’의 의미 역시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차연’은 단순히 차이를 넘어, ‘완전한 차이란 영원히 연기 될 수밖에 없다’는 의미로 확장된다. 즉, ‘차이’란 늘 현재 진행형이기에 완결된 의미는 영원히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데리다는 ‘차연’이 지닌 지연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차이와 ‘차연’은 공간과 시간적 차원으로 분리됨을 지적한다. 이를 위해 그는 소쉬르의 언어학을 예로 드는데, 소쉬르가 이야기하는 기호란 시간적 변화의 가능성을 배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소쉬르에게 있어 기호란 일련의 차이에 의해 확립된 이후 완결된 체계를 지니기에, 일단 그것이 규정되면 변경 가능성이 희박하다. 이러한 인식 체계에서는 하나의 위치에 동시에 두 개의 사물이 공존할 수 없듯, 하나의 기호에 다른 기호의 의미가 공존할 수 없다. 그러나 데리다의 ‘차연’은 이를 거부한다. ‘차이’란 공간적으로 완전히 결정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텅 비어있는 공백(space)이며, 그것은 시간을 통해 변화하는 진행의 과정으로 이해해야한다는 것이다. 데리다에게 있어 기호란 소쉬르와 달리 고정된 기호가 아니라 자신의 ‘흔적 trace’만을 담고 있다. 이러한 흔적은 늘 끊임없이 변화하는 차이를 통해서만 엿볼 수 있다. 다시 말해, 데리다의 기호란 차이를 통해 끊임없이 자신의 흔적을 드러냄과 동시에 자신을 지연하고 유보하는 ‘차연’의 표현인 것이다.

들뢰즈의 ‘차이 그 자체’

들뢰즈는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것도 동일하지 않다고 말한다. 나아가 그는 우리가 어떤 사물을 동일하다고 보는 것은 개념 혹은 표상에 사로잡힌 진부함 때문이라 지적한다. 들뢰즈는 개념으로는 드러날 수 없는 그 자체의 차이를 개념적으로 드러나는 차이와는 구분해, ‘차이 그 자체’라 규정한다. 즉, ‘차이 그 자체’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각기 다 다름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들뢰즈는 기존의 차이라는 개념으로는 결코 진정한 ‘차이’에 도달할 수가 없다고 말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차이 그 자체’를 지니고 있으며, 그 차이는 틀에 박힌 개념이나 표상의 틀에서 깨어날 때 드러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들뢰즈의 ‘차이 그 자체’라는 말은 존재 자체가 무한한 잠재성을 지님을 함축하고 있다. 더불어 들뢰즈는 모든 존재는 다른 것과 절대적인 차이, 즉 ‘차이 그 자체’를 지님과 동시에 무한한 잠재성을 지니고 있는 ‘다양체’임을 지적한다. 그런데 이렇게 잠재된 다양성은 저절로 그냥 표면에 떠오르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관습이나 개념의 틀로부터 벗어나 존재를 있는 그대로 파악하고자 할 때 드러나는 것이다. 들뢰즈는 모든 사물이 가진 잠재적 다양성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우선 개념으로부터 벗어나야함을 지적하며, ‘차이 그 자체’를 말한다. 그렇다면 모든 존재의 ‘차이 그 자체’를 발견하기 위해 염두에 두어야할 것은 무엇일까?
들뢰즈는 모든 동일성의 근원에는 무수한 차이들이 선험하고 있음을 언급한다. 여기서 ‘차이’란 대상들을 규정하는 데 있어 궁극적인 단위가 된다. 즉 우리가 무엇을 경험하는 데 있어 그것이 동일한지, 유사한지, 서로 다른지를 판단하고 규정하는 근거에는, 모든 것의 배후에 자리 잡은 궁극적인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 다시 소쉬르의 언어학을 살펴보자. 소쉬르는 이미 지적했던 대로 대립적인 변별 자질을 띠는 음운에 주목해, 그것이 개와 고양이를 구분 짓는 기호의 근거가 된다고 말했다. 언어학이란 이처럼 대립적인 것들을 구별하는 변별 자질을 찾아내는 학문이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들뢰즈는 이처럼 ‘부정적인’ 방식으로는 ‘차이’를 찾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 그는 프랑스어의 ‘ne … pas’ 구문에서 ne의 역할에 주목한다. ne는 que 접속문을 제외하면 단독으로 부정의 기능을 발휘하지 못함에도, pas와 함께 부정문을 이루는 요소가 된다. 들뢰즈는 ne가 ‘비존재’로 기능함을 지적하며. 소쉬르처럼 변별 자질을 통해 즉 부정적인 방식을 통해 ‘차이’를 찾는다는 것은 부재하지는 않지만 의미가 사라지거나 변하는 것 혹은 알 수 없는 것을 해석하는 데 있어 무능하다고 말한다. 오히려 우리가 언어를 알아듣는데 있어 필수적인 동인은 음운 상의 변별 자질이 아닌, 언표행위의 다양한 특징들에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들뢰즈에게 있어 ‘차이’를 규정한다는 것은 변별 자질을 찾는 데 있는 게 아니라, 그들 사이의 ‘미분적 관계’를 엿보게 한다는데 있어 의미가 있다.
그렇다면 ‘차이’를 품고 있는 모든 사물들의 체계 안에서 그것들을 ‘관계’ 짓는 것은 무엇일까? 들뢰즈는 ‘차이’나는 사물들 간의 소통과 공명을 말하기에 앞서, 선행하는 ‘어두운 전조’를 언급한다. 모든 체계들은 저마다 어두운 전조를 포함하고 있고, 이 전조를 통해 비로소 소통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어두운 전조’를 설명하며 들뢰즈는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주인공이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 ‘굿나잇 키스’를 받는데 실패한 사건을 예로 든다. 주인공은 이것을 오데뜨에 대한 스완의 사랑, 주인공이 성인이 된 후 겪은 알베르틴에 대한 사랑과 연결 짓는다. 오데뜨에 대한 사랑과 알베르틴에 대한 사랑은 분명 차이가 나는 서로 다른 두 사건이다. 들뢰즈는 서로 다른 두 사건을 ‘반복’이라는 하나의 사건으로 계열 지을 수 있었던 까닭은 ‘어두운 전조’인 어린 시절 어머니에 대한 사랑 때문임을 지적한다. ‘어두운 전조’란 어린 시절의 기억처럼 모호한, 그래서 잠재되어 있는 ‘볼 수도 없고 감각되지도 않은’ 사건이다. 차이나는 두 사건을 공명하게 하는 이 ‘어두운 전조’가, 이후 두 사건이 지닌 ‘차이 그 자체’를 드러나게 하는 동시에 이를 관계 짓고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차이 그 자체’란 유아기 때 기억처럼 경험적으로 환원되지 않으면서도 경험적인 개념, 즉 ‘유사성’과 같은 관계를 연결하는 ‘어두운 전조’를 내포한다. ‘어두운 전조’란 어떤 대상이 아니라 차이를 ‘차이’로 만드는 분화소를 의미한다. 서로 다른 계열들을 분절하고 구분 짓는 동인이 되는 동시에, 이들을 수렴·공명하게 하며 분리하는 근거 역시 된다. 이것은 늘 명확하게 기억되지도 규정되지도 않음에도, 결정적인 순간에 전체의 계열을 뒤흔든다. 들뢰즈는 ‘어두운 전조’란 전치와 위장이라는 방식을 통해 동일성과 유사성을 지니지 않음에도, ‘자기 동일성’ 내지는 ‘유사성’과 같은 개념적인 가상을 불러일으킴을 지적하며, ‘어두운 전조’란 이와 같이 무한한 의미를 함축함을 설명한다. 이러한 의미의 과잉 때문에, ‘어두운 전조’는 이것도 저것도 될 수 있는 동시에 서로 다른 계열들을 소통을 가능케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명확하게 규정지을 수는 없으나 종합적인 이 상태를 들뢰즈는 ‘차이 짓는 차이소’라 명명한다. 이 차이소들은 단순히 ‘차이’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다양한 항들을 하나의 계열로 엮어낸다는 의미에서 ‘차이 짓는 것’ 즉 ‘차이 짓는 차이소’라 불러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동일하다고 유사하다고 여기는 데는 분명히 이 ‘어두운 전조’가 낳은 허구가 작동한다. 동일한 것은 차이 짓는 가운데 차이나는 것으로 남아있는 이것 때문에 언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차이’의 철학, 철학의 차이

‘차이’의 철학자, 데리다와 들뢰즈는 표상과 개념 아래 포획되어 다양성을 잃어버린 세계의의 풍부함을 되찾고자 ‘차이’를 말했다. 이를 위해 ‘차이’를 천시하고 동일성을 우선시했던 플라톤 이래 모든 철학들을 비판하며, 이들은 현실의 모든 존재에게 잠재해있는 다양하고 독특한 잠재성에 주목한다. 두 철학자가 비슷해 보이지만 서로 다른, ‘차연’과 ‘차이 그 자체’를 말한 까닭은 여기에 있었다. 방법론적 차이가 두드러짐에도 두 철학을 연결하는 지점은 ‘모든 것의 근원은 차이’라는 데 있다. 존재보다 선행적이라는 의미에서 이들에게 ‘차이’는 존재론적인 위치에 놓여 있다. 하지만 데리다에게 ‘차연’은 모든 존재의 근원에 있음에도 그 자체로는 무의미하다. 기원을 사라져버리게 한다는 데서 ‘차연’은 내용 없는 차이, 즉 공백이자 빈 칸이다. 그러나 들뢰즈에게 ‘차이 그 자체’를 가능케 하는 ‘어두운 전조’란 의미의 과잉을 전제한다. 마치 비의어처럼 어떻게 현현되느냐에 따라 이것도 저것도 되는 다양한 복합체의 형상을 띠는 것이다.
그렇다면 ‘차이’에 대한 이와 같은 관점의 차이는 이후 그들의 철학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을까? 데리다는 예술 작품을 논함에 있어 ‘파레르곤(parergon)’을 언급한 바 있다. 그리스어로 에르곤이란 작품을, 파레르곤이란 작품 밖의 어떤 것, 이를테면 작품을 돋보이게 하는 액자나 작품에 주어진 평가 등을 의미한다. 거칠게 요약할 때, 데리다는 파레르곤이 예술작품의 바깥에 있는 동시에 예술 작품 자체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그것은 결코 예술작품의 외적인 것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린다. 즉 파레르곤은 전통적인 기준에서 볼 때 분명히 텍스트의 바깥에 위치하지만, 사실상 텍스트의 의미를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가 된다는 점에서 외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데리다는 파레르곤이 ‘경계 그 자체’임에 주목함으로서, 예술 작품 자체가 하나의 파레르곤, 즉 안팎의 경계를 갖지 않는 모호한 성격을 지닌다고 주장한다. 예술 작품이란 텍스트의 안팎 구분이 허물어진 경계이며, 따라서 얼마든지 가변적이라는 것이다. 이는 텍스트를 구성하는 어떤 고정된 의미 역시, 이처럼 쉽게 ‘해체’ 될 수 있음을 뒷받침하기 위해서였다. 데리다가 본 예술, 나아가 예술 작품이란 이처럼 어떤 틀 안에 있는 실체가 아니라 안과 밖을 구분하는 틀일뿐이다. 우리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동인은 오로지 예술작품이 지니는 경계 그 자체에 있을 뿐이며, 이러한 경계가 곧 아름다움의 실체라는 것이다. 데리다는 안팎을 엄격하게 구분해 예술작품의 안쪽에서 어떤 불변의 의미가 찾고자 하는 것은 서구 사상의 폭력과 매한가지라 주장한다. 예술 작품의 의미(sens)란 결국 없는(sans) 것이며, 안과 밖을 엄격하게 구분할 때, 피(sang)을 부르는 폭력이 된다는 것이다. 예술 작품에 부여된 의미나 기호는 텅 빈, 그래서 뻥 뚫린 것이어야 했다. 나아가 이것이 그에게 있어 예술 작품의 근원적인 의미란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가 무너진 데서 출현한다고 보았던 근거가 된다.
‘차연’이 공백에서 출현한다고 보았던 데리다와 달리, 들뢰즈는 ‘차이 그 자체’를 말하며 의미의 과잉을 언급한 바 있다. 들뢰즈에게 있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의 단일한 체계로 규정될 수 없는 다양체다. 그런데 이 다양체로서의 존재는 다른 무엇과 관계를 맺지 않으면 그 차이가 드러나지 않는다. 이는 『차이와 반복』이후 들뢰즈의 철학에서 핵심적인 사상으로 이어졌던 ‘기계적인 것’, ‘분자적인 것’, ‘리좀적인 것’의 기초가 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아이의 입이라는 기관이 지닌 다양한 역할이다. 어린 아이가 엄마의 젖을 빨 때 입이라는 기관이 지니는 의미는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아이가 배가 고파 젖을 물 때, 아이의 입은 젖을 빠는 기계, 즉 먹는 기계가 된다. 그런데 아이의 입이 엄마의 젖을 빨면서 동시에 엄마의 사랑을 확인한다면, 이는 일종의 성기계(sexual mechine)가 된다. 아이의 입이란 젖을 빠는 기계인 동시에 성애를 표현하는 성기로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들뢰즈가 『천개의 고원』을 통해 말하는 ‘기계’란 이처럼 통합과 일탈의 의미가능성을 동시에 지닌 다양체다. 이에 따르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양체를 엄격히 그리고 경직되게 구분하는 절단은 폭력이 된다. 들뢰즈는 이처럼 강제적이고 경직되게 구분하는 체계를 ‘수목’의 체계, ‘기계론적’ 체계라 규정하며, 이와는 다른 방식 즉 유연한 절단 체계를 지닌, 그래서 일탈과 탈주의 가능성을 포함하는 ‘리좀’의 체계를 주장했던 것이다. 들뢰즈에게 있어 ‘차이’가 확인되고, 그것이 진정한 의미를 드러낼 수 있게 하는 동인은 각기 다른 ‘차이’들이 공명하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공명이란 그 어떤 필연성으로 묶인 관계를 의미하지 않는다. 서로 다른 것을 완전히 배제하고 그 둘의 관계만을 고집하는 것은 결코 공명이 될 수 없다. 들뢰즈가 공명, 그리고 이와 같은 방식의 소통을 가능케 하는 ‘어두운 전조’를 강조했던 까닭은 ‘차이 그 자체’가 지니는 다양성과 잠재성을 발견하고,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유연한 체계를 형성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데리다나 들뢰즈에게 있어 ‘차이’란 이것도 저것도 아닌 동시에, 이것이면서 저것이기도 한 무엇이었다. 그러나 데리다가 전자, 즉 이도 저도 아닌 차이들 간의 사이에 주목했다면, 들뢰즈는 후자, 즉 이것도 저것도 될 수 있는 중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데리다의 ‘해체’ 철학은 말 그대로 해체를 선행하고 있기에 ‘차이’를 하나의 독자적 체계로 수립할 수 없었다. 그에 반해 들뢰즈의 궁극적인 관심은 체계 자체를 파괴하거나 거부하는 것이 아닌, 기존의 체계와는 다른 새로운 체계를 형성하는 데 있었다. 그렇기에 그의 ‘차이’는 하나의 독자적인 영역으로 확립될 수 있었던 셈이다. 그들의 ‘차이의 철학’이 지닌 결정적 차이는 여기에 있다. ‘해체’와 ‘공명’이라는 방법론적 차이는 두 사람이 같은 문제의식에서 출발해 ‘차이’를 지적했음에도 이후 그들이 다른 길을 걷게 한 이유가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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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 동시대반시대 | ‘차이’의 철학, 철학의 차이_김은영(수유너머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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