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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개의 문>은 시간의 세번째 문을 여는가? – 들뢰즈의 ‘시간의 세 가지 종합’을 통해 본 다큐<두개의 문>

- 쿠다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은 말 그대로 차이와 반복에 대한 글이다. 여기서 반복은 차이짓는 차이화로서의 운동으로 표현되고, 차이는 이것과 저것을 가르는 딱딱한 차이가 아니라 반복을 통해 생성되는 차이이다.

들뢰즈의 박사논문인 이 책에서 그가 던진 물음은, ‘차이는 어떻게 생성되는가?’ 혹은 ‘반복은 어떻게 차이를 만들어내는가?’ 이다. 이러한 운동 혹은 생성의 차원에서 차이는 반복이며, 이는 반복이 구성하는 차이화의 시간을 의미한다. 이 시간은 시계의 바늘이 가리키는 4시, 4시 1분, 4시 2분이라는 직선적 시간을 의미하지 않음은 물론이다.

<차이와 반복>은 그 자체로 시간에 대한 거대한 빨랫줄 같은 글이지만 그 중에서도 “시간의 세가지 종합”은 시간을 ‘습관’이라는 물질적 반복과 ‘기억’이라는 심리적 반복을 넘어 ‘시간의 텅빈 형식’이라는 존재론적 반복으로 나아가면서 들뢰즈 시간론의 핵심을 이룬다. 존재가 시간을 어떻게 사유하는가에 따라 어떤 존재가 될 수 있는가를 묻는 그 시간은 존재를 구성하는 시간이자, 그러한 존재를 해체하면서 다른 존재를 사유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따라서 사유는 행위의 다른 이름이 된다.

이러한 들뢰즈의 존재-시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다큐 <두개의 문>에 나타난 세가지 시간의 계열을 탐사해보도록 하자. 왜냐하면 용산참사를 다룬 다큐 <두개의 문>은 ‘2009년 1월 20일 아침 7시 20분’을 세 번 반복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실은 영화 전체에 걸쳐 이 시점은 무수히 반복되지만, 그래서 영화가 끝나고 나면 그 흔들리는 화산처럼 폭발할 듯한 화염만이 ‘그날 아침 7시 20분’을 반복재생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순간은 각기 다른 의미를 형성하는 세 가지 계열들의 교차점으로서 ‘시간’으로 드러난다. 우리가 7시 20분을 시계바늘이 가리키는 무가치한 순간이 아니라 시간이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이 시점은 적어도 흘러가거나 쌓이거나 발산하면서 어떤 의미들을 함축하고 있어야 한다. 때문에 <두개의 문>에서 보여주는 각기 다른 시간의 계열들을 파악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이 영화가 가리키고 있는 ‘세번째 문’을 발견하지 못하거나 고장난 시계의 초침처럼 7시 20분의 59초와 60초 사이를 딸꾹거리는 순간의 재생으로밖에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1. 시간의 첫 번째 문 : 시위와 진압의 습관적 반복

첫번째 반복. 2009년 1월 20일 아침 7시 20분.

습관을 습관적으로 생각해볼 때 습관만큼 매번 반복되는 것은 없다. 그런데 우리가 이 반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반복되는 습관에서 어떠한 차이를 못 느끼기 때문이다. 차이를 소거해 과는 과정을 통해 ‘좋은 습관’을 형성하는 방법에 관한 책이 쏟아지는 요즘이다. 하지만 ‘습관을 들인다’고 했을 때 그것은 의식적인 행위가 아니라 물들여지는 것이다. 들뢰즈는 습관이 구성되는 두 시간의 계열을 말한다. 하나는 습관을 능동적으로 구성할 수 있다는 훈련 혹은 인식의 차원이고, 다른 하나는 능동적인 인식-행위의 차원이기 이전에 인식 아래에서 습관을 생성하는 보다 원초적인 수축의 시간이 있다고 보았다.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는 습관을 적극적으로 훈련해도 우리는 늘 6시에 ‘어긋나서’ 일어난다. 좀더 빨리 눈이 떠지는가 하면 억지로 눈을 떠도 내장과 정신은 좀처럼 깨지 않는 날도 있는 법이다. 유기체적 습관은 먹는 입, 위장, 혈관, 세포의 각기 다른 리듬들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유기체 이하의 작은 수축-리듬들이 ‘나’라는 유기체의 의지에 복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러한 작은 자아들의 욕구들, 운동들의 효과가 ‘나’라는 것. 따라서 이 작은 자아들은 유기체의 안과 밖을 나누지 않는다. 심장은 공기의 수축이고, 혈관은 물의 수축이다. 이렇게 끝도 없이 이어지게 되면 나는 물, 불, 빛, 흙의 수축-리듬이 된다.

습관을 물들인다는 것. 그것은 망루의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길 건너에서 바라보던 눈이, 그리고 얼굴이 노랗게, 그러면서 점점 붉게 물들어 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2009년 1월 20일 아침 7시 20분을 습관적으로 반복하게 될 것이다. ‘그 시간’이 되면 눈이 물들어지고, ‘그 곳’을 지나가면 얼굴이 물들어지는 습관말이다.

농성자들은 ‘그 날’도 어김없이 농성을 하고 있었다. 죽으려고 작정하고 올라간 것도 아니었다. 그 날 망루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의 말처럼 심지어 그곳은 그 생존자에게는 경찰의 진입을 피해 도망간 ‘옥상’이었지 ‘망루’가 아니었다. 망루의 시너와 화염병이 있었지만 그것은 어느 정도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것의 ‘사용’여부는 늘 최종상황의 판단에 맡겨져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경찰특공대 역시도 자신들에게 주어진 임무-테러진압과 파업농성 진압이라는 임무의 수행의 반복속에 놓여있었다. 한 경찰특공대원의 진술처럼 “빨리 빨리 진압해야겠다는 생각”만 있었다는 것에는 특별히 농성자들에 대한 적의나 국가 임무에 대한 사명감을 찾기 힘들다. 그들에게 ‘살아 있는 현재’는 늘 동일한 반복속에 놓여있다. 진압, 진압, 진압..의 시간은 지금, 지금, 지금..이라는 시간을 이룬다. 들뢰즈는 이러한 반복을 헐 벗은 반복, 물질적 반복이라고 보았다. 물질적 반복은 차이를 생산하지 못하는 헐 벗은 반복이다. 따라서 “반복되고 있는 대상(물질) 안에서는 아무 것도 변하지 않는다.” 경찰특공대는 늘 행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행위를 일으키는 정신은 국가에게 양도한다. ‘경찰특공대의 임무는 결정이 내려지면 진압하는 것’이라고 진술한 어느 특공대장의 말처럼 그들은 스스로가 행위하는 물질(대상)을 자임하는 기괴한 행위자이다. 따라서 테러의 섬멸과 농성의 진압의 정치적 차이, 경찰이 아닌 ‘같은’ 국민으로서 이 사태에 대한 윤리적 태도의 물음을 던졌을 때조차 그들은 동일한 진술을 반복한다. 우리의 임무는 판단이 아니라 임무의 수행이라고. 그것이 국민으로서 경찰인 자신의 임무라고. 그들은 자신의 정신을 버리고 국가라는 신체의 한 근육덩어리임을 자처해야만 국민이 되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런데 이러한 물질적 반복 조차도 그 심층에는 어떠한 정신이 존재한다. “행위하는 자아 아래에는 응시하는 작은 자아들이 있다.” 즉 행위와 능동적 주체를 가능하게하는 것은 이 작은 자아들 덕분이다. 그래서 이 작은 자아는 차라리 심장의 수축이고, 세포들의 움직임이다. 유기체가 어느 정도 동일하게 유지되려면 유기체 이하의 생명들이 부단히 차이를 생성해야 한다. 이때 이 작은 생명들은 작은 자아-애벌레 자아이기도 하다. 들뢰즈는 이들을 정신이라고도 하지 않고, 물질이라고도 하지 않는다. ‘정신 안에서‘ 서식하는 주체들. 이 세포들의 자기 욕구들의 완전한 행위들은 물질과 정신의 이분법을 넘어서는 원초적 생명들인 것이다.

국가라는 유기체에 복무하는 것을 국민으로서 자신의 역할이라고 생각하기에 무심한 습관과도 같은 진압을 반복하지만 그 기저에 흐르는 “원초적 감성”이 끈덕지게 항존하고 있음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바로 2000쪽의 진실이 의미하는 것이 그것이다. 경찰특공대원들의 초기 진술서들은 그들이 국가-유기체의 부분으로 자신을 재-생하기전 그러니까 ‘2009년 1월 20일 아침 7시 20분’이 갈라놓은 균열의 지점들이 채 메워지기 전 ‘경찰특공대원 A’가 아니라 그 사건을 맞닥뜨린, 응시한 자아가 거칠게 스케치한 초벌의 그림들이 엉성하게 드러나는 ‘추상적인 선들’이다. 영화에서 김형태 변호사는 의미심장한 말을 한다. ‘적과 아가 확연히 갈라지는 전장터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그렇다면 경찰은 당연히 농성자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이 ‘상식적’이다.’ 겁에 질리고 적개심이 가득차면 일단 타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이 자연스러운 처사이다. 하지만 초기진술들에서는 ‘(화재의) 원인을 모르겠다.’는 진술들이 나왔다. 이것은 어떤 의미를 품고 있는 무지함일까? 검찰이나 언론에서 화재의 원인을 급박하게 추적하고 또 왜곡하고 있을 때, 그 화재의 목격자들은 ‘모르겠다’고 응답했다. 대신 그들은 그들의 눈이, 얼굴이, 피부가 수축하고 물들여진 것을 진술한다. ‘화재의 원인이 무엇인가’, ‘누구의 책임인가’라는 탐문은 능동적 지성의 질문이다. 이러한 능동적 지성은 수동적 무지함과 마주하자 무력화된다. 특공대원들은 다른 물음을 던진다. “(그곳은) 생지옥이었다.”는 응답. 이 어긋나는 응답은 ‘이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함축하고 있다. 국가가 2000쪽에 당혹해했던 것은 이러한 어긋남, 차이가 만들어낸 또 다른 물음들 사이에 스며있는 불온함 때문이지 않았을까?

그들이 그린 당시의 거친 스케치를 통해 우리는 ‘2009년 1월 20일 아침 7시 20분’의 진실의 표면을 볼 수 있다고 믿는다. 그것은 테러진압의 현장도 아니었고, 화염병과 신너로 나도 죽고 너도 죽자식의 막가파 자살집단이 부른 참극도 아니었다. 경찰과 농성자가 함께 내던져진 “생지옥”이었다.

시간의 첫번째 계열을 이루는 ‘습관’을 만들어내는 시간조차 이러한 물음을 형성하는 끈덕진 작은자아들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들뢰즈는 ‘습관’적 반복을 말할때 그것은 습관을 무의미하거나 부정적인 것으로만 치부하지 않고 그 안에서조차 존재하는 차이를 만들어내는 반복을 증언한다.

2. 시간의 두 번째 문 : 개발과 철거의 갱신-기억의 새로움

2009년 1월 20일 아침 7시 20분. 두 번째 시간의 계열.

영화속 시간은 다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니 과거가 마치 2009년 1월 20일을 향해 돌진해오는 것처럼 숨가쁘고 공격적으로 용산을 향해 달려온다. 과거는 두 계열로 용산을 향하는데, 그 중 하나의 시간은 2001년 롯데호텔 노동자들의 점거파업의 진압현장을 거쳐 2005년 오산 철거민 농성장으로 이어지는 계열이고, 다른 하나의 시간은 2004년 부터 용산일대 재개발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되면서 2006년 서울시가 용산 재개발 구역을 확정, 2008년 용산 국제업무 마스터플랜을 발표하는 계열이 그것이다.

그런데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것처럼 이 두계열은 개발반대와 진압/개발의 계열이 아니다. 이 두 계열은 하나의 기원을 반복하는데, 바로 권력이 꾸는 꿈으로서 ‘도시’라는 유토피아의 기획이다. 멈포드에 따르면 플라톤의 이상적 통치형태는 이상적 도시형태와 동일시 된다. 다시 말해 격리된 공간을 구축하고 안정된 질서를 획득하기 위해 이상적인 모델로서 도시가 구상된다. 권력이 꿈꿔왔던 유토피아는 이룰 수 없는 몽상이 아니라 ‘기획으로서의 유토피아’로서 구축되어왔다. 거대한 피라미드, 군항, 원자력발전소, 도시계획이 그것들이다.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도시 전체의 기획과 구상보다는 건축이 도시와 분리되어 건축이 그 유토피아의 중심으로 다시 도시를 재통합시킨다. 이제 도시속에 건축이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 건축 속에 도시를 구현하게 된다. 2008년 용산 국제업무 마스터플랜은 용산이라는 도시를 하나의 거대한 건축으로 대체하고자 하는 이 시대 권력의 꿈으로 드러난다.

그럼에도 도시는 건축물만 있는 것이 아니라 거리도 있다. 지금까지 도시에는 자본과 권력의 수직적 구축물인 건축물들이 있었고 또한 이에 저항하는 수평적 ‘거리’가 존재했다면 ‘용산 모델’과 같은 도시화된 건축에는 ‘거리’가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익명성의 ‘아무개’의 침입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 이상적 통치형태로서의 도시가 갖는 꿈이었다면 이에 대항하는 철거민들의 점거, 노동자들의 파업은 통치자의 입장에서 반도시적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도시는 구축으로서의 도시이지, 운동으로서의 도시가 아니기 때문이다.

기원이 과거의 것이 아니라 현재의 근거가 되려면 기원은 반복적으로 재현되어야 하며 또한 갱신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기원은 현재의 근거로서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따라서 기원은 노스탤지어적 태고의 신비가 아니라 가장 앞선 미래로 현재에 등장한다.

들뢰즈는 이러한 기억의 시간을 ‘재현성을 재현하는 것’ 즉 재현의 원리에 근거해 있다고 보았다. “재현은 본질적으로 단지 어떤 것을 재현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재현은 또한 그 자신의 고유한 재현성을 재현한다.”(191) 즉 기원으로서의 과거가 현재안에서 재현되기 위해서는 현재 자체가 이런 재현의 장 안에서 다시 재현되어야 한다. ‘현재’는 어떤 과거속에 둘러싸여 자기 자신을 비추면서 드러난다. 현재는 객관적 시간의 ‘지금’이 아니라 내가 불러들이고 싶은 근거 위에서 재현하는 현재가 된다.

권력의 유토피아로서 도시의 기원은 현재의 모델하우스나 미니어쳐를 통해서 드러난다. 이때 기원은 용산국제도시의 화려한 미니어쳐로 재현되면서 현재를 감싼다. 이를 통해 미니어쳐-용산의 현재는 권력의 꿈이라는 기원을 재현하고 그 기원에 따라 스스로를 되비추며 ‘이상적인 모델’이 된다. 이때 용산이 합축하는 기원에는 삶들이 배제되어 있다.

도시계획의 ‘구상’을 거처 ‘플랜’이 발표되고 모델이 현실에서 작동하는 시간, 그 시간의 한 가운데에 ‘2009년 1월 20일 아침 7시 20분’이 폭발했다. 이 폭발하는 삶은 그 존재조건 자체가 고정된 모델에 균열을 내려는 운동이었기에 애초에 ‘합의’가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도시는 권력의 유토피아로서만 존재하지는 않는다. 고소상이 구축으로서의 도시에 맞서 운동으로서의 도시를 제안할 수 있는 것(‘유체도시를 구축하라’)은 도시가 가지고 있는 이중성이 있기 때문이다. 권력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그 곳에 삶이 있어야 하고, 삶은 자의던 타의던 끊임없이 유동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도시는 늘 불안하다. 이는 역설적으로 권력이 끊임없이 모델로 유동적인 삶을 구속하려고 드는 이유이기도 하다.

<두개의 문>에는 짧고 강력한 장면이 등장하는데, 이명박 정권이 용산을 ‘넘어’ 쌍차파업을 진압하는 장면이다. 하늘에서 경찰특공대가 내려와 지붕위의 노동자들과 경주를 벌인다. 곧 한명의 노동자가 도망가다 넘어지자 서너명의 곤봉들이 넘어진 노동자를 후려친다. 관객들은 이 대목에서 무거운 침묵을 깨고 숨죽인 비명을 지른다. ‘아…!’ 이것은 무엇인가? 우리를 단숨에 과거의 한 곳으로 옮겨놓게 하는 이 짧은 순간. 80년 광주에서 한 시민이 겁에 질려 넘어져있는 것을 서너명의 군인들이 후려치던 그 사진 한장이 기억속에서 떠올려지는 것이다. 전혀 예상치 못하게 광주는 그렇게 되불려지고, 아니 우리가 과거의 광주라는 시간속으로 놓여지게 되었고 그것은 우리는 전혀 다른 시간속으로 옮겨다 놓는다. 쌍차는 더이상 쌍차가 아니게 되고, 광주는 더이상 광주가 아니게 되면서 쌍차-광주는 다른 시간의 계열로 우리를 던져버린다.

기억은 과거를 재현하는 능동적 인식의 차원도 있지만 이렇듯 비자발적이며 비의지적인 기억 역시 있다. 그래서 들뢰즈는 기억의 애매함을 지적한다. 그것은 모호함이 아니라 애매함이다. 기억은 근거로 작동되지만 근거는 “팔꿈치처럼 휘어져 있다.” 다시말해 아무리 강력한 기억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늘 동일하게 반복되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삭제하려고 하는 과거라 할지라도 우리의 의지와는 무관한 듯 우연한 계기에 튀어올라온다. 이러한 기억의 두 층위, 기억의 능동적 종합과 수동적 종합은 지나가는 현재로서의 시간이 아니라 늘 과거와 함께 공존하는 시간의 두께를 부여해준다. 그리고 이제 어떤 시간에 어떤 두께를 형성할 것인가의 문제는 우리 안으로 들어와 버렸다.

3. 시간의 세 번째 문 : 빗장이 풀린 시간

2009년 1월 20일 아침 7시 20분. 세 번째 시간의 계열.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에서 습관이 구성하는 시간과 기억이 재생하는 시간을 다루면서 그 기저에 흐르는 비의식적인 시간을 도입함으로써 시간의 균열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이는 곧 시간을 인식하는 ‘나’ 아래에 또다른 자아가 있음을, 다른 시간을 구성하는 애벌레 자아가 있음을 증언하면서 균열된 나, 분열된 자아의 존재를 보여준다. 그런데 동일성의 재현 아래에 꿈틀대고 있는 존재는 동일성의 형식아래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들뢰즈는 시간의 세번째 종합을 니체의 영원회귀적 반복이 구성하는 시간으로 제시하면서 세번째 시간의 종합이야말로 존재론적 반복이며, ‘새로운 것의 생산 안에서만 일어나는 극적인 반복이며, 이러한 반복은 주인공마저 배제한다.’고 말한다. 주인공마저 배제하는 새로운 것의 생산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나’라는 동일성의 포기이자 행위를 그 결과가 아니라 과정으로 놓는 것을 의미한다. 나라는 주체가 변하지 않고도 우리는 새로움을 포착할 수 있다. 그것은 변화하는 대상에 대한 관찰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반면 나는 행위의 결과이자 과정으로 놓여질 수 있다. 즉 운동성만으로는 ‘나’라는 동일성을 깰 수 없고, 시간은 ‘나’라는 같음의 원환안에서 돌 뿐이다. 따라서 시간을 사유하는 존재는 시간 안에서가 아니라 시간의 밖에 놓여있어야 하고, 또 존재는 매 순간의 시간속에서 죽어야 한다. 이때 죽음은 더 이상 동일하지 않은 존재의 매순간의 생성을 의미한다. 시간의 밖에 놓여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가 구체적으로 어떤 시간을 사유할때 그것은 ‘어떤’으로 묶을 수 있는 시간이다. 따라서 그 ‘어떤’이라는 척도가 작동하는 시간이다. 재개발의 시간은 재개발=발전이라는 척도가 작동하는 시간을 의미한다. 따라서 시간의 밖은 무시간이 아니라 햄릿이 말하는 ‘빗장이 풀린 시간’을 의미한다. 빗장의 축 밖으로 튕겨진 미친시간을 사유할 수 있는 존재는 더 이상 이전의, 동일성의 차원으로 수렴되는 존재가 아니기에 들뢰즈의 시간은 존재 그 자체이며, 이는 존재를 둘러싼 윤리성, 정치성의 차원으로 확장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권력의 형태든 동일성의 철학은 끈덕지게 복원-재구성되고 있기 때문이다.

<두개의 문>에서는 법정 드라마의 시간이 있다. “다 죽어”와 “(화재의 책임이)농성자에게 있다.”는 진술은 국가권력의 ‘재개발’이라는 척도가 작동되는 장면이자, 침묵의 6초와 “이러다 다 죽겠다.”는 척도의 균열이 가져오는 장면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 다층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진술들에서 우리는 희망을, 미래적 반복을 말할 수 있을까? 이러한 균열은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비극적일만큼 봉합되기에 충분한 균열이며, 동시에 희극적일 만큼 너무나 희미한 균열이다. 들뢰즈가 세번째 시간을 미래적 반복이라고 했을 때, 이 난해한 정의는 같은 것이 되돌아 오지 않는 반복을 의미한다. 즉 미래는 알 수 없는 것인데 그것을 반복한다는 것은 우리를 매번 새로운 것을 생산할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의미한다. 하지만 로젠버그가 말한 대로 역사의 배우는 과거의 옷을 걸치지 않는 한 연기할 수 없는 존재인 것처럼 존재가 매순간 새롭다는 것의 의미는 습관과 기억을 몰아내는 것이 아니라 습관과 기억을 거쳐, 그 두 반복을 세번째 반복의 조건으로 삼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두개의 문>의 감독들은 이 영화가 ‘기억과 기록을 위한 영화’라고 했다. 이것은 ‘나를 잊지 말아요’ 가 아니라 지나간 용산의 기억과 기록을 미래의 행위의 조건들이 되는 것이라고 나는 이해한다.

그렇다면 <두개의 문>에는 시간의 세번째 문이 있을까? 시간의 세번째 문은 흰 벽위에 놓여진 작품으로서의 <두개의 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그 세번째 문은 <두개의 문>을 만드는 작품행위속에서 그리고 <두개의 문>을 눈으로 상영하고 입으로 전파하는 관객들의 행위에서, <두개의 문>이 작품이 아니라 하나의 액티비즘으로 수용될 때 열리게 된다. 따라서 <두개의 문>에는 시간의 세번째 문을 향해 열려있다. 다만 이보다 더 다른 무엇이 앞으로 생성될 거라는 기대만으로 <두개의 문>에 잠재된 시간의 세번째 문은 매 순간 예고되면서.

응답 2개

  1. sydney말하길

    글 좀 쉽게 슬 수없습니까?
    필요해서 몇 번을 읽어도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으니…

  2. […] | 동시대반시대 | <두개의 문>은 시간의 세번째 문을 여는가? – 들뢰즈의 ‘시간의 세 가…_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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