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에서 ‘강도’ 개념

- 하얀(수유너머N)

I. 들뢰즈의 감성론

기존의 동일성의 철학, 재현의 철학에서 감성은 여타의 인식능력에 의해 파악될 수 있는 것만 파악하고, 공통감 안에 관계하는 대상으로서만 그것을 포착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인식능력에 의해 파악될 수 없는, 공통감의 밖에 위치하는 감성이 남아 있다. 들뢰즈는 감성적인 것의 존재가 진정한 사유를 촉발하는 것으로 보고 “사유되어야 할 것으로 이르는 길에서는 진실로 모든 것은 감성에서 출발한다”(DR, 322)라고 말한다.
들뢰즈는 말라르메의 『책』이나 조이스의 『피네건의 경야』과 같은 현대 예술에서 감성적인 것의 존재의 예를 들고 있다. 이들 작품에서 사물들의 동일성과 읽는 주체의 동일성은 중심을 이탈하고 와해되며 동시에 허상이 된다. 이때 허상을 들뢰즈는 동일성과 중심성을 전복하는 행위로, 즉자적 차이를 포괄하는 심급이자, 두 개 이상의 발산적 계열들을 포괄하는 심급으로 본다. 이 허상을 통해 우리는 더 이상 무엇이 원본인지 모상인지 구분할 수 없는 사태에 직면하게 된다. 이러한 것이 바로 재현이하의 실재성이 드러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허상 안에서 계속되는 불일치로 드러나는 차이의 차이, 인식능력의 경험적 실행에서는 감각될 수 없지만 동시에 오로지 감각밖에 될 수 없는 ‘어떤 것’이 바로 감성적인 것의 존재이다. 들뢰즈는 감성적 존재자보다 선험적인, 재현 이하의 실재성의 영역을 구성하는 감성적인 것의 존재에 주목한다.
그런데 들뢰즈에게 감성적인 것의 존재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것의 존재 이유인 “강도”에 있다. 그렇다면 강도란 무엇인가.

2. 순수 차이 자체, 강도

동일성의 철학에서는 이성이 통일성을 부여하기 이전, 감성이 수용한 표상들을 ‘잡다’라고 부른다. 들뢰즈는 동일화되는 잡다로 이해될 수 없는 지점이 있음을 주목하고 잡다와 차이를 구별한다. 오히려 차이를 통해서 소여는 잡다로서 주어지는 것이다. 차이는 잡다가 아니며, 변화하는 현상들의 배후에 있는 충족이유이다. 그리고 현상은 즉 두 개 이상의 다질적 계열들, 불균등한 질서들의 소통에 힘입어 나타나는 섬광이다.
그렇다면 다질적인 것, 불균등한 것들의 계열들, 이런 현상 이하의 차이들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가령 ‘덥다’와 ‘춥다’의 대립되는 개념보다 더 실재적인 것은 덥다와 춥다 사이의 다양한 스펙트럼이 아닌가? 이는 지성적 영역으로 포착할 수 있는가? 이 극단 사이에서 펼쳐지는 스펙트럼들 또한 나와 타인의 덥다-춥다의 서로 다른 기준들, 우리는 이를 감각할 수밖에 없다. 차이는 하나의 동일한 척도로는 측정될 수도 포착될 수도 없는 것으로서 무엇, 즉 ‘강도’이다. 순수 차이이자 차이의 불균등한 관계들을 형성하게 하며, 이를 감성적인 것으로 표현하는 것이 바로 강도이다.
들뢰즈는 강도를 설명하기 위하여 ‘깊이’, ‘공-간’ 같은 개념을 사용한다. “깊이는 자기 자신 안에 거리들을 봉인하고 있으며, 이 거리들은 다시 겉으로 드러난 크기들 안에서 자신의 주름을 펼치고 연장 안에서 자신을 개봉해 간다”(DR, 같은 쪽). 이렇게 되는 데에는 강도가 어떤 감각불가능성과 감각적 필연성이라는 양방향성(역설, para-doxa) 안에서 자신을 드러낼 수밖에 없음으로 인해 생겨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차이 안에서 존재는 깊이와 강도의 동맹을 맺는다.(DR, 같은 쪽)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러한 깊이와 강도 간의 이상한 동맹으로부터 반드시 물리적 외연과 연장, 질, 감각질 등이 발생한다는 점이다. 들뢰즈는 이 감각적 경험의 초월적 조건으로 강도량을 제안한다. 이를 테면 여기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이 책 『차이와 반복』은 하나의 ‘실재적 경험’인 것이지 일반화된 어떤 경험이라고 볼 수는 없다. 이런 의미에서 가능한 경험의 조건들이란 실재 자체를 포착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실재 자체를 알기 위해서는 그 경험 전체가 기반을 두는 실재적 조건들을 봐야 하는데, 그것이 깊이 혹은 공-간(spatium), 강도이다.

3. 깊은 것-탈근거, 무바탕-어두운 전조-문학 체계

앞서 ‘서론’에서 밝혔다시피 들뢰즈는 예술작품, 특히 문학작품을 통해 이러한 강도량과 관련된 진술들을 하고 있다. 이에 대해 살펴보기 전에 우리는 문학적 표현이 근거하는 어떤 ‘바탕’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들뢰즈에게 ‘바탕’이란 “‘깊은 것’의 투사”라고 일컬어진다(DR, 491). 바탕이나 형상은 이러한 깊이에 기반하고 있다. 즉 이 깊이로부터 “주름이 펼쳐지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표현’된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이러한 공-간으로서의 깊이가 시간과 관련되는 지점이다. “이런 깊이의 종합은 현재와 과거의 공존은 물론이고 가장 먼 과거를 증언하고 있다. 여기서 순수하게 공간적인 종합들이 이미 규정된 시간적 종합들을 다시 취한다는 것은 하등 놀랄 필요가 없는 사실이다. 즉 연장의 밖-주름운동은 첫 번째 종합, 습관의 종합이나 현재의 종합에 의존하지만, 깊이의 안-주름운동은 두 번째 종합, 기억의 종합과 과거의 종합에 의존한다. 게다가 또한 깊이 안에서는 ‘근거 와해’를 예고하는 세 번째 종합이 임박하여 들끓고 있음을 예감해야 한다”(DR, 492). 여기서 강도는 명시적으로 두 번째 시간의 종합과 연관되면서 세 번째 종합을 예감한다. 이 세 번째 종합으로 강도들을 소통하게 하는 것은 바로 어두운 전조이다.
“이 전조는 (…) 마치 음각처럼 패여 있으면서 번개의 길을 전도된 방향에서 미리 규정한다”(DR, 같은 쪽). 규정하지만 그것은 보이지 않는다. 아니면 “거꾸로만 보일 뿐”이다(DR, 269). 전조는 강도들을 소통시킴으로써 표현되지만 이것은 또한 그러한 표현의 효과 아래로 숨어든다. 이것은 일종의 “전치의 공간”이면서 “위장의 과정”이라고 할 만하다(DR, 270). 들뢰즈는 이에 해당하는 예를 ‘문학체계’에서 빌려오고 있다. 언어적 측면에서 언어가 맡게 되는 어두운 전조의 역할은 “[문학]체계 전반 안으로 어떤 최대한의 유사성과 동일성을 유인한다”(DR, 273). 이것을 그는 “에피파니”라 부른다.
이는 “체계 안에서 어두운 전조의 활동에 힘입어, 서로 공명하는 계열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사태이다”(DR, 같은 쪽). 종합하자면 들뢰즈에게 강도의 바탕에서 일어나는 공명과 소통은 ‘어두운 전조’로 인해 가능해진다. 이때 문학체계의 언어든 언표주체든 소통의 가능성은 항상 강도와 그 강도의 소통 즉 어두운 전조에 달려 있는 것이다.

4.문학체계의 강도론을 위하여

사실 이 소략한 글은 들뢰즈의 감성론과 강도론 전체를 아우르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런 와중에서도 한 가지 이 글이 전략적으로 취하려고 하는 것은 들뢰즈 감성론이 미학과 맞닿아 있고, ‘문학체계’를 들여다보는 참조점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이론적 전략을 미학의 한 분야, 들뢰즈 강도론의 한 ‘효과’로서 ‘문학체계의 강도론’이라고 부를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개념은 무엇보다 강도들을 소통시키며 세 번째 시간을 예고하는 ‘어두운 전조’라는 개념이다. 들뢰즈가 말하는 어두운 전조가 기능하는 소통은 강도들을 연관시켜 줌으로써 서로를 서로에게 환원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를 보존하고, 개체화의 지점에 이르기까지 이 차이화의 역량을 보존한다.
‘문학체계의 강도론’은 여기서부터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지각 불가능한 ‘어두운 전조’는 문학텍스트의 언어들을 통해 표현된다는 것이 들뢰즈의 주장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 난해한 개념을 예증하면서 문학을 가져올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과연 텍스트의 심층에 들끓고 있는 어두운 전조, 강도량들은 어떻게 ‘측정’(양적인 측정만이 아니다)될 수 있을 것인가? 하나의 등장인물이 ‘주체’로 고정되는 것이 아닌 그 주체의 ‘이전(以前)’이 가늠되어야 한다. 그 ‘거리’ 말이다. 그런데 도대체 문학체계에서 ‘거리’는 어떤 것인가? 다시 한 번 ‘도대체’(!) 이 거리는 어떻게 ‘측정’(다시 한 번 말하지만 양적인 의미만이 아니다)될 것인가? 이것이 문학체계의 강도론을 확립하기 위해 남은 숙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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