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들뢰즈의 삶과 사유

- 변성찬(수유너머 N)

“전자(초월성)와 후자(내재성)의 평면 위에 있을 때, 우리는 동일한 방식으로 살지 않고, 동일한 방식으로 사유하지 않으며, 동일한 방식으로 글을 쓰지 않는다.” (들뢰즈, 『스피노자의 실천철학』)

1. 들뢰즈의 삶

들뢰즈(1925~1995)의 사적인 전기에는 특별히 극적이라 할 만한 것이 별로 없다. 그의 삶에는 결정적인 단절(또는 위기)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는 대신, 일종의 커다란 휴지기가 나타난다. 그는 53년 자신의 첫 저서(『경험론과 주체성』)를 쓴 이후, 8년이 지난 62년에야 다음 책(『니체와 철학』)을 출간했다. 들뢰즈의 삶에서 가장 극적인 것은, 바로 이 8년간의 ‘구멍’이다. 이 강렬하고 독립적인 ‘지하연구’ 기간 동안 들뢰즈는 자신의 독창적인 철학적 문제설정과 그에 부응하는 새로운 스타일을 확립하고, 이후 8년 동안 거의 매년 한 권씩을 발표하는 강도 높은 저작활동을 통해서 수면 위로 등장한다.
이 시기의 작업에는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세 가지 측면이 있다. 철학사에 대한 ‘대안적 독해’를 통해 ‘내재성(immanence)의 철학’의 기틀을 마련하는 것, 문학작품에 대한 철학적 ‘비교비평’을 통해 ‘새로운 철학적 표현수단’을 모색하는 것, 정신분석(특히, 라캉의 구조주의적 정신분석)을 통해 칸트의 ‘초월론적(선험적 transcendental) 문제설정’을 재전유하는 것 등이 그것이다. 니체와 함께 철학의 역할이 ‘삶의 해방’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한 들뢰즈는, ‘삶의 억압’에 복무하는 ‘도덕의 체계’에 불과한 플라톤 이후 서구의 ‘초월성(transcendence) 철학’을 전복시키기 위해 서구철학사에서 비주류인(‘국가 철학자’가 아니라 ‘사적 사상가’의 계보에 속하는) 일군의 철학자를 내재성의 철학자로 복권시키고, 칸트의 ‘주관적 선험철학(의식의 선험철학)’을 ‘객관적 선험철학(무의식의 선험철학)’으로 전환시키기 위해 일군의 작가 및 정신분석과 연대한다(이후 가타리와의 공동작업을 통해 정신분석과는 일정한 거리를 둔다).
이 시기의 이러한 다양한 모색의 결과를 집약하고 있는 것은 그의 국가박사학위논문인 『차이와 반복』이다. 『차이와 반복』에서 그는 ‘초월성의 철학’을 ‘재현 철학’이라 부르고, 그에 대항하는 자신의 사유를 ‘초월론적 경험론transcendental empiricism’라 선언한다. 이후 이어지는 들뢰즈의 전 생애는, 가장 극적인 이 시기 동안 확립된 그의 주요 문제설정과 개념들 대한 끊임없는 반복과 변주의 과정이다. 재현 철학 비판, 내재성의 사유를 위한 기획, 초월론적 경험론 등 현란해 보이는 이 철학적 개념들에는, 어떻게 삶을 억압하는 사유로부터 벗어날 것인가(또는 어떻게 삶을 해방하는 사유에 도달할 것인가)라는 들뢰즈의 근본적인 물음이 담겨 있다. 그는 인생의 대부분을 ‘대학을 중심으로 한 공식적 지식제도’에 속해 살았지만, 그는 ‘공적 교수’라기보다는 ‘사적 사상가’에 가까웠다. 들뢰즈는 스피노자와 니체를 따라, 오로지 ‘선악을 넘어서 있는 삶의 이미지’를 그려내는 일에 전념하였다. 그것은 들뢰즈가 「스피노자의 삶」에서 말했던 바로 그런 ‘삶(a life)’, 즉 ‘내재성의 삶’이다.

2. 내재성의 사유

들뢰즈는 공식적으로 발표된 마지막 글(「내재성 : 생명」)에서 자신이 말하는 ‘내재성’이 무엇인지에 대해 다음과 같은 간결하고 강렬한 정의를 내린다. “내재성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생명(어떤 하나의 삶, une vie)이다.” 정관사나 소유격에 의해 한정되기 이전의 삶, 오로지 부정관사에 의해서만 수식될 수 있는 이 삶이 바로 들뢰즈가 말하는 내재성이다. 그것은 비-인칭적이고 전-개체적인 평면에서 비로소 드러나는 삶의 모습이다.
들뢰즈는 디킨스의 『서로의 친구』라는 작품을 통해 이 ‘어떤 하나의 삶’이 무엇인지를 이야기한다. “모든 사람이 경멸하는 한 못된 주체, 한 불량배가 다 죽어가는 채로 실려 온다. 그를 간호하는 사람들은 빈사 상태에 빠진 불량배의 다 꺼져가는 생명의 징후에 열의를, 배려를, 사랑을 보인다. 모든 사람이 그를 구하기 위해 매달리고, 이 행실이 불량한 남자는 가장 깊은 혼수상태 속에서 포근한 그 무엇이 자신에게 스며드는 것을 느낀다. 하지만 불량배가 생명을 조금씩 되찾아감에 따라서 그의 구원자들은 점점 더 그에게 냉담해지고, 또 그에 따라서 불량배는 예전의 그의 무례함과 고약함을 되찾아간다.” 즉 불량배라는 ‘인칭/인격’이 와해되었을 때 드러나는 어떤 삶, 그리하여 불량배와 선량한 사람들이라는 ‘선악(의 이분법)을 넘어서’ 드러나는 어떤 삶, 그것이 내재성의 삶이고 삶의 본래면목이라고 들뢰즈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인칭/인격’과 ‘개체성’에 앞서 모든 사람 안에 내재하는 것, 따라서 모든 사람의 인칭적 삶의 경계를 넘어서 흐르고 소통하는 것, 이 내재성의 삶은 80년 5월의 10일 동안 광주 사람들이 체험했던 ‘대동세상’을 통해 드러났던 그런 삶의 모습이기도 하다.
들뢰즈에 따르면, 초월성의 철학은 바로 이 ‘무구한 삶’을 가두고 억압하는 ‘도덕의 체계’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그 초월성의 철학과 도덕의 체계는 ‘주체(의식)의 환상’ 위에서 구성된
다. 바로 여기에 들뢰즈가 스피노자와 함께 반복했던 위대하고 반-시대적인 질문, 즉 ‘사람들은 왜 그것이 자신의 욕망이기라도 한 것처럼 스스로 노예가 되기를 욕망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정치적 질문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가 있다.

3. 재현철학 비판, 또는 초월론적 경험론

들뢰즈의 전체 사유를 관통하는 화두 중의 하나는 ‘어떻게 재현의 사유를 벗어날 것인가’이다. 재현의 사유를 벗어난다는 것, 그것은 주체를 벗어난다는 것과 동의어다. 왜냐하면 주체란 내재성의 삶 위에 자리 잡은 초월성의 형식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재현의 세계란 ‘주체와 대상의 관계’를 통해서 구성되는 세계인 바, 그것은 결국 ‘주체의 거울 이미지’로 구성된 세계이다. 인간은 ‘인간 자신(또는 경험)’을 (유비적으로) 복제하여 만들어진 완전하고 초월적인transcendent ‘이데아’나 ‘인격-신’을 만들었고, 그것을 자신의 재현의 세계의 근거로 삼는다. “사본은 자신이 다른 어떤 것(원본-이데아)을 복제하고 있다고 믿지만 실상은 자기 자신을 복제하고 있을 뿐이다. 사본이 그토록 위험한 것은 바로 이런 까닭이다.”(『천 개의 고원』,32) 말하자면, 그것은 일종의 ‘거인(프로크라테스)의 침대’인 것이다. 역설적인 것은 그 ‘침대’를 만든 자 자신이 그 ‘침대’에 의해서 고통(억압/심판)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모든 ‘동일성의 철학’, ‘재현의 사유’의 비밀이다.
재현의 세계가 가정하는 초월적인 질서는 카오스에 대한 ‘불안’에서 비롯된 일종의 ‘방어적 환상’이다. 방어적 환상을 구성한다는 것, 그것은 일종의 공포 만들기이다. 그것은 불안의 대상을 공포의 대상으로 만든다. 불안에 사로 잡힌 ‘주체’는 자신을 ‘주체’로 유지하기 위해서 ‘존재(초월성)’라는 환상, 또는 공포의 대상을 만들어낸다(왜냐하면 ‘주체’로서는 그것이 더 견디기 편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공포의 대상에 자신을 예속시킴으로써 비로소 ‘주체’로서 자기 자신을 유지할 수 있다. 이것이 스피노자가 말한 ‘폭군과 노예의 공모’가 만들어지는 매커니즘이다. 재현 또는 초월성의 논리는 언제나 이렇게 순환적이며, 하나의 원환을 그린다. ‘인간(Human)’은 불안을 견디기 위해 ‘신(Divine)(또는 순수 인종)’을 만들고(그래봐야 그 신이란 인간의 자기 투사에 불과한 것이지만), 그 ‘신’에 예속됨으로써(말 그대로 신 밑으로 자신을 던짐으로써), 비로소 ‘인간’이 된다. 이렇게 ‘인간’에서 출발해서 결국은 ‘인간’으로 회귀하는 ‘악순환’을 통해 구성되는 세계가 바로 ‘재현의 세계’이다. ‘초월론적 경험론’, 그것은 재현에 앞서 있으며 재현 이하에 있는 세계, 바로 내재성의 삶, 즉 ‘비인격적 개체성’과 ‘전개체적 특이성’의 세계에 대한 탐구이다. 들뢰즈는 앞에서 언급한 자신의 마지막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선험적인(초월론적인) 장은 내재성의 평면에 의해서, 그리고 내재성의 평면은 생명에 의해서 정의되는 것이다.” 결국 내재성의 사유와 초월론적 경험주의는 ‘삶의 해방’을 위한 사유의 다른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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