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강만필

농사 일지, 다섯 번 째.

- 김융희

입추가 지나며 유별났던 무더위도 한풀 꺾였다. 이제 처서가 다가 오고 있다. 기후가 이상하게 변하고 있다며 마치 지구의 종말이라도 맞은 듯, 호들갑을 피우며 들떠 요동치던 인구도 이젠 시들해졌다. 자연의 대순환은 말 없이 묵묵히 순리적일 뿐이다. 모두가 경거 인심의 지랄짖들인 것이다. 이제는 겨울준비를 위한 가을채소의 파식을 서둘 때이다. 모종으로 심는 배추는 좀 여유가 있으나, 무, 갓과 같은 씨앗으로 심는 것들은 서둘러야 할 것 같다.

요즘 장포를 바라보는 나의 마음은 따분하다. 이상의 기후 탓인지, 개으름뱅이 내 심보 일련지는 잘 모르겠다. 무배추의 어린 싹들이 예쁘게 쑥쑥 자라고 있어야 할 저 가장자리에 가슴까지 웃자란 바랭이풀들의 무성한 꼴들이 나를 질리게 만든 것이다. 해마다 겪는 잡초와의 전쟁이 금년에는 더욱 치열하다. 저놈의 바랭이풀은 반드시 어릴 때 잡아야 되는데 그렇질 못했으니 여간 골칫거리가 될 것이다. 초전에 박살을 못해 아쉽다.

지난 겨울엔 눈도 별로 내리지 않은데다, 봄에도 비는 내린둥 만둥이었다. 가믐은 여름까지 계속되어 심한 몸살을 겪었다. 대지의 목마름으로 만물이 타들어 갔다. 탓이라면 날씨 이전의 무모한 인간 짓이거늘. 제 탓은 감춘 체, 이상 기후 날씨 탓의 볼멘 소리로 천지가 진동했다. 칠월이 다 지나서야 비다운 비가 내렸다. 겨우 생명을 유지하며 비실데던 작물들이 생기를 보이며 전열을 다듬어 제자리를 찾고 있었다. 그러나 바지랭이는 보이질 않았다.

바랭이풀은 늦게 무성하다. 열흘 이상 비운 사이에 훌쩍 자라서 제 세상을 만들어 버렸다. 어릴적 그놈은 귀엽고 손만 대면 쉽게 뽑힌다. 그런데 금방 번쩍 자라면서 마디를 만들며 튼실한 마디엔 수염뿌리까지 돋는다. 이렇게 영역을 넓히며 줄기는 빠르게 이웃들과 함께 어울려 버리면 다루기가 쉽지를 않다. 마디는 굵어져 단단하며 잔뿌리까지 돋아서 전력해도 뽑히질 않으며, 뽑혀도 그 마디에서 끊기고 만다. 그놈은 천상 초전 박살이였어야 했는데, 외유로 한동안 비운 사이에 이 지경이 됐다. 그렇기로 제초제나 기계를 델 수도 없고…

바랭이풀이 제거되어야 가을 채소를 파식할 것인데… 저놈의 풀을 제거 할려면 비가 내려 땅이 촉촉해야 그나마도 가능하다. 어제 내린 비로는 어림도 없다. 내일이면 비가 내린다니 기대를 해보지만, 며칠동안 힘겨룰 생각을 하면 마음이 편칠 않다. 그래 “천하지대본”이라는 농사가 오늘날 “천하지대천업”으로 외면당했나 싶다. 너무 힘들 때면 나 역시 그만 두고 싶을 때가 없지 않다. 별로 재미도 소득도 없으면서, 힘든 농삿일을 계속 하겠다는 것은 그저 부질 없는 짓이란 생각이 든다. 그러나 결코 농사를 그만 두는 일은 없을 것이다.

싱겁고 맹랑한 짖으로 엉뚱하게 바랭이에 대한 분풀이 엄살이 컸다. 나는 독일 공연의 세 번째 여행기를 쓰고 있었다. 가물거린 기억력을 달래며 겨우 끝낼 즈음이다. 갑작스런 컴퓨터의 다운으로 화면이 사라져 버렸다. 낡은 컴퓨터가 요즘들어 바짝 고장이 잦더니 드디어 이지경이 됐다. 거의 컴맹인 나는 속수무책이다. 다시 기억을 되살려 보지만 혼란과 아쉬움의 분노만 크다. 뒤틀린 심사로 바랭이풀이 걸린 것이다. 그동안 등저온 농사 일지를 쓰자.

장포의 고추밭이 떠오른다. 연하고 아삭해서 아삭 고추라고도 하는, 별로 매웁지도 않으면서 맛이 있어 즐겨들면서 이웃에게도 나누어 인기가 있는 오이고추 때문이다. 지금까지 늘상 인기가 있어 열린 쪽쪽 땃던 것을, 올해는 손 볼 틈이 없어 제 때에 맞춰 따질 못했다. 시기를 놓친 아삭 고추는 전혀 제 맛이 아니다. 아삭은 커녕 질기고 딱딱해 맛이 형편 없고 매웁기까지 했다. 잘 맺은 열매도 제 때에 따 줘야 제 맛의 고추를 들 수 있음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호박이 처음엔 제법 열리더니 지금은 풀숲이 묻혀 가물대고 있다.

이제 농사 문제는 풀이 주제다. 이미 바랭이와의 전쟁은 시작되었다. 낫과 갈구리를 챙긴다. 쇠시랑도 요긴할 것 같다. 아직 꽉 싸메어 있는 예초기도 대기시켜야 한다. 아무래도 넓은 면적에 많은 양을 처리하는데는 중무장이 필요하다. 그러고 보니 남들은 벌써 예초기가 등장 했나보다. 멀리서 예초기를 돌리는 엔진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초전 박살을 못내 좀 힘겼겠지만, 무기는 갖춰졌으니 이제 늦장 박살이 나의 각오이다. 창공에 맑은 햇살이 내려 쬐이는 수확의 계절이면 나의 승전가가 장포에 울려 퍼지리라….. 가을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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