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윤회와 진보의 의미

- 남창훈(면역학자)

8차선 고속도로는 다분히 작위적인 길이다. 별로 타협하지 않고 길게 직선으로 난 길. 고속으로 주행하는 자동차의 안전을 위해 고안된 길이다. 보통 길은 타협을 통해서 만들어진다. 강물이 흐르는 궤적과 타협하고, 언덕과 산들의 생김새와 타협하고, 나무나 생태계의 분포와 타협한다. 인류를 비롯해 움직이는 생명체들이 길을 내는 원리는 이러한 타협이었다. 나는 진보를 이러한 길의 속성에 빗대 개념 지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작위적으로 곧게 뻗은 길을 따라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나는 진보라 생각하지 않는다. 이전 여러 이념들이 품 안에 보물처럼 안고 있었던 합목적성이나 시장의 합리성 등의 원리와 지향은 이처럼 작위적으로 어떤 이익을 전취하기 위해 내어 놓은 길들을 닮아 있다. 고속으로 주행하는 자동차를 위해 만들어진 고속도로처럼..

나는 오히려 순환하며 적응하면서 개선하고 진화해나가는 비선형 윤회의 진보를 믿는다. 윤회는 제자리 돌기와 전혀 다른 함의를 지니고 있다. 우리는 물과 공기와 흙들에 미만하게 널려 있는 이전 생명체들의 흔적을 매일 마주 대하며 살고 있다. 거기에는 우리의 조상과 온갖 동식물들의 조상들이 서로 아무 분별없이 섞인 채 놓여 있다. 그리고 우리는 믿기 힘들지만 이 흔적들이 재구성됨으로써 우리의 몸과 영혼을 유지하며 살고 있다. 우리는 다름 아닌 우리가 먹고 마시고 흡입하는 것들의 총체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언제나 어김없이 우리 주위에 미만해 있는 이전 생명체들의 자취들로부터 마련된다. 초원의 풀들은 전 역사를 관통해서 존재하는 물들을 마시고 햇살을 받아 힘을 얻고, 땅 속의 유기 무기질들 즉 생명의 흔적들을 몸에 받아 들여 생명을 유지한다. 초원 위를 거니는 소들은 이러한 풀들과 대지 위를 유랑하는 물들과 대기 속의 산소를 받아 들여 제 생명을 영위한다. 우리가 소를 먹을 때에는 이러한 전 과정을 거슬러 결국 온 땅과 물과 공기 속에 있던 이전 생명의 자취들을 우리 몸 안에 받아 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으로 우리는 우리의 세포를 만들고 아미노산과 지방산과 온갖 종류의 당들을 얻어 우리의 몸이 필요로 하는 곳에 그것들을 쓰게 되는 것이다. 인체의 60%정도를 차지하는 수분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 물들이 얼마나 먼 길을 돌아 우리의 몸 안에 들어와 있으며 또 잠시 후 우리의 몸을 벗어나 얼마나 먼 길을 여행할지를 상상할 수 있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떻게 유지되는지를..

이렇게 생명이 구성되는 원리를 들여다 보면 윤회의 의미를 얼핏 짐작할 수 있다. 우리가 이전 생명체들의 자취와 흔적으로부터 만들어지고 유지된다고 해서 제자리를 맴돌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전 생물체들과 구분되는 독특함들을 지니고 있으며, 진화를 통해 이러저러한 구분점들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진화란 끊임없이 일어나는 변이들 중 어떤 생체가 생태계 내에서 적응하기 위한 여러 가지 필요들과, 주위를 에둘러 긴밀하게 관계 맺고 있는 여러 타자들과의 공생의 조건을 두고 끊임없이 협상하고 타협하여 이뤄낸 과정들의 총합이다. 그래서 변이는 무분별해 보이지만 전체 체계 내에서 아주 긴밀히 조정되고 통제되는 지난한 과정을 거쳐 어떤 분별력 있어 보이는 윤곽과 경향과 원칙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재구성되면서 진화하는 생명체들의 모습을 통해 나는 비선형 윤회의 진보를 상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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