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실에서

현대 철학의 대부, 들뢰즈

- 유일환(수유너머N 회원)

8월 16일 카페커몬즈가 수유너머N에 방문했습니다. ‘비노동과 생존의 정치’라는 주제로 워크샵을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저도 이 자리에서 ‘공동성은 어떻게 형성되는가’라는 짧은 글을 발표했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장 뤽 낭시의 말처럼 공동체는 합일이 아니며, 오히려 합일에 대한 환상이 깨지는 순간 구성되는 것이라고 정의할 때, 잡다한 복수의 개인들은 실체적인 무엇을 공유하지 않고 어떻게 현행적인 공동체를 구성할 수 있을까요? 다시 말해, 공동체가 무엇에 의지하지 않고, 무엇에 의해 규정되지 않는 관계 자체를 의미한다면, 복수의 개인들을 하나로 묶어줄 공동성은 어떻게 형성될 수 있을까요?

저는 이 문제를 들뢰즈의 ‘존재의 일의성’개념의 도움을 받아 풀어낼 수 있었습니다. 들뢰즈는 일자와 다자의 관계를 말하며, 중심에 위치한 것은 일자가 아니라 다자라고 말합니다. 즉, 다자가 일자에 의해 규정되고, 일자에 철저히 의존하는 구도가 아니라, 오히려 다자가 만들어내는 생성이라는 운동에 일자가 의존하는 구도인 거지요. 저는 들뢰즈에게서 배운 사유의 방식대로 공동성의 문제를 정리했습니다. 전체주의적 합일과 공동성을 대비하고, 공동성은 다자가 만들어내는 운동 그 자체라고 파악한 겁니다.

“공동성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복수의 구성요소들이 함께 어떤 활동을 해서 집합적인 신체의 리듬과 사유의 리듬을 만들어낼 때 공동성은 형성된다. 이렇게 해서 잡다한 특이적인 자들이 하나로 묶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해야할 것은 공동성이란 특이적인 자들이 어떠한 하나의 이념이나 원칙을 따를 때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특이적인 자들이 공동의 활동 자체를 통해 생산해낸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에서 공동성은 전체주의적 합일과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할 수 있다. 전체주의적 합일이 공동체라는 집단을 중심에 놓고, 잡다한 개인들이 그 주위를 돌게 하는 형상이라면, 공동성은 잡다한 개인들이 중심을 차지하고, 집단으로 하여금 그 주위를 돌게 하는 형상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전체주의적 합일은 집단에 철저히 의존하는 개인, 집단으로 동일시되는 개인을 의미하지만, 공동성은 잡다한 개인들의 공동활동이 생산해내는 무엇이다. 공동성은 집단의 이념이나 감각을 먼저 상정해놓고, 이것에 개인을 동일화 시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공동성은 복수의 개인이 집합적 운동에 의해 매번 새롭게 구성되고, 또한 매번 해체되는 것이다.”(<공동성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발표문 중)

흔히 들뢰즈의 사유를 전복적 사유라고 합니다. 그는 보편적 일자를 중심으로 체계적으로 질서 지어져 있는 합리성의 체계를 비판하고 다자들의 운동에 주목함으로써 생성의 철학을 사유했습니다. 이제는 이러한 사유가 현대철학의 경향으로써 자리 잡았지만 그건 어디가지나 들뢰즈 이후의 일입니다. 푸코는 <앙띠 오이디푸스> 서문에서 “21세기는 들뢰즈의 세기가 될 것”이라고 말 한바 있습니다. 그의 예언대로 들뢰즈 이후 현대철학의 흐름은 들뢰즈 사유의 변주들로 여겨질 만큼 현 세기에 그가 서있는 자리는 거대합니다.

위클리 수유너머 이번호에는 사상가 특집으로 들뢰즈를 다룹니다. 들뢰즈는 수유너머와 인연이 깊은 사상가입니다. 수유너머는 지난 10년 간 한국사회에서 들뢰즈 담론을 형성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앙띠 오이디푸스>, <천의 고원>과 같은 텍스트를 중심으로 노마디즘을 비롯한 다양한 담론을 만들어내었지요. 또한 이러한 담론들은 학술적인 가치를 넘어서 수유너머라는 공동체를 구성하는 데에 있어 실제적 지혜를 제공했습니다. 그동안 수유너머가 만들어 온 공동체의 가치나 윤리도 따지고 보면 상당부분이 들뢰즈의 사유에서 배운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전히 수유너머에서는 들뢰즈를 공부합니다만, 포인트가 조금 바뀌었습니다. 지금 수유너머에서는 들뢰즈의 초기 저작(<차이와 반복>, <의미의 논리>)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왜 지금 다시 들뢰즈의 초기 저작에 관심을 갖고 있는 걸까요? 들뢰즈의 전체적인 사유의 흐름에서 초기 저작은 어떠한 의미를 갖고 있을까요? 변성찬의 <들뢰즈의 삶과 사유>라는 글은 이에 대한 답을 충분히 들려줍니다. 그는 들뢰즈의 사유 체계를 세 가지 측면에서 분석하는데, 이를 통해 ‘왜 <차이와 반복>을 읽는지, 그것이 어떠한 의미를 갖고 있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해결해 줍니다.

또한 쿠다, 김은영, 송하얀은 각각 <차이와 반복>이라는 텍스트에서 얻은 배움을 자신들의 문제의식과 연결하여 풀어냈습니다. 쿠다는 영화 <두개의 문>을 시간의 세 가지 종합이라는 개념으로 분석하였으며, 김은영은 들뢰즈의 차이와 데리다의 차연의 개념을 비교하였고, 송하얀은 문학 체계를 강도의 개념과 연결할 수 있는 지점을 보여주었습니다. 참고로 <차이와 반복>에 관한 세 개의 글은 수유너머N의 ‘인문사회과학 연구원’에서 공부했던 결과물들입니다. 위클리에 싣기 위해 재차 요약 정리한 글임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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