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일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 타카하시 아츠토시(카페 커먼즈)

올 여름이 오기 전 일본에서 생활보호 수급자를 향한 공격이 있었다. 사람들은 여러가지 이유로 일하지 못해 수입이 없는 사람들에게 이유도 묻지 않고 하나로 뭉뚱그려 돈을 주는 데 토를 놓았다. 정치가들은 생활보호 기간을 한정해야 한다, 현물지급 해야 한다 등 여러모로 제한을 둬야 한다며 불만을 제기했다. 많은 사람들도 그러한 불만에 동의하고 있는 듯 했다. 금융자본주의의 노예처럼 일을 해야만 하는 사람들. 일본어로 ‘사축(私蓄)’, 즉 회사가 키우는 동물이라는 말이 있다. 그들은 자신의 여가시간에 망령이 되어 생활보호 수급자나 니트 앞에 나타나 일하라고 소리치며 채찍질한다. 지옥 같은 풍경이다. 사람이 사람을 채찍질 하는 풍경이 지옥이라는 것은 아니다. 어디에도 갈 수 없고 어쩔 수도 없는 [사람들에게], 간접적인 방식으로 채찍질하는 구도야말로 지옥이 따로 없다. 때리는 쪽도 맞는 쪽도 자신의 불만을 일상적인 대처법으로, 쾌락으로 때우면 그만이다. 괴로움은 그보다 더한 괴로움으로 마비시키면 그만이다. 누구라도 이러한 구도 속에서 타인의 행복을 진실로 바라지 못한다. 이러한 사태는 이제 막 시작되지 않았다.

나는 은둔형 외톨이(‘히키코모리’) 방문 활동을 오랫동안 필생의 일lifework로 삼고 있다. 은둔형 외톨이 상태에 있는 사람을 일 년 정도 꾸준히 찾아가 집밖으로 함께 나가고 사회와 잇는 일이다. 집을 방문해도 방문을 닫고 나오지 않아 좀처럼 만날 수 없는 사람도 있고, 집에 가자마자 만날 수 있는 사람도 있다. 곧바로 만날 수 있어도 함께 밖으로 나오는데 2년 이상 걸린 사람도 있으며, 만나기까지 시간이 걸려도 만나면서 바로 집밖으로 나오는 사람도 있다. 이 활동을 일본의 많은 이들은 일반적인 일로 보지 않는다. 이러한 활동을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면 아주 기특한 일을 한다며 궁금해 하는 이도 있지만 이상한 눈으로 보는 이도 많다. 그 큰 이유 중 하나는, 은둔형 외톨이는 내버려두는 게 상책이라는 인식일 것이다. 은둔형 외톨이 중 많은 이들은 스스로 원해서 틀어박혀 있는 것은 아니다. 이대로는 안 된다고 꾸준히 생각하면서도 밖으로 나오려는 결심을 하기 어려운 사람들이다. 타인에 대한 불신 때문에 도와달라고 하기도 쉽지 않다. 무엇보다 삶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먹고 사는 것이 당장은 힘들지 않기 때문에, 앞날을 막연히 불안해하는 것을 빼면, 인간관계도 구체적인 고민도 없는 경우가 많다. 방문활동을 상담활동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실제로는 찾아가는 내가 더 상담을 받는 편이다. 이들의 부모는 대부분 한 번쯤 집에서 내쫓으려 한다. 그러나 이들도 자신들이 그렇게 되도록 만든 바깥 사회를 믿지 않으며, 자기 아이도 믿을 수 없어 내쫓지 못한다. 틀어박혀 지내는 그들의 의지는 변하지 않은 채 생활이 안팎으로 파탄날 때까지 10년 20년 소중한 시기를 그저 방안에서 보내게 된다. 부모 중에는 자신의 아들이 일을 하지 않는 것이 부끄럽고 남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아서 직업 안내소에도 보내지 못한 채 어저면 좋을지 상담하는 사람도 있다. 이는 극단적인 사례지만, 많든 적든 일본에는 이처럼 ‘세상에 대한 체면’이 있다. 부모도 은둔형 외톨이 본인도 ‘세상에 대한 체면’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상담도 못하고, 상태를 은폐한 채 스스로를 계속 숨긴다. 세상은 부모에게도 왜 틀어박히게 놔두느냐며 불신의 눈총을 준다. 부모는 그 책임을 져야 하기에 쫓아내지 못하고, 그렇다고 비난받는 것도 싫어 될 수 있으면 숨기려 한다. 자신과 아이가 능력도 없고 노력도 모자라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이며, 그로 인해 사회에서 불필요한 사람이 된 것인 만큼 사회적으로 부끄러워야 할 존재라고 생각한다. 부모 세대보다 일자리(고용)가 줄고, 일하는 환경도 나빠지고 있다는 것은 익히 들어 알고 있지만, 그런 것은 남 얘기일 뿐이다. 원래 다른 사람은 믿을 수 없으며 의지할 수도 없기에 사회를 바꾼다는 발상까지 미처 못 한다. 결국 틀어박히게 된 것을 자기책임으로 돌려버린다. 타인을 불신하는 나쁜 개인주의가 거기 있다. 부모들은 많이들 자식이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두다 보니 은둔형 외톨이가 되었다고 말한다. 그들이 틀어박히면 더욱더 자신이 알아서 하게 맡길 수밖에 없다고 한다. 물론 본인의 의지는 중요하다. 누구와도 관계 맺지 않고 틀어박히는 일 자체가 목적이라면 그나마 낫다. 반면 틀어박히는 일이 진심이 아니라면 [나가려는]의지는 몇 년이 지나도 좀처럼 생기지 않는다. 바로 이 점에서 그들 앞에 나처럼 뜻대로 되지 않는 타인이 나타나는 활동의 의미가 있다.

한 명의 은둔형 외톨이 경험자가 집 밖으로 나와 지역사회나 경제 속에서 무언가를 하려면 타인들과의 수많은 만남과 도움, 계속적인 관계와 장소, 오랜 시간과 여러 노력, 자금이 필요하다. 잘 생각해 보면 그것은 지금의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에서 무리다. 방치할지 배제할지 강제적으로 수용할지말고는 다른 대안이 없을 것이다. 행정기관(정치)에서 현재 실행하려는 것은, 은둔형 외톨이를 성가시게 여기는 부모와 의료가 결탁해 보다 개인적인 문제로, 병으로 간주해 생활을 보장하는 길을 모색하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면 니트를 일하게 해서 더 많이 세금을 받기 위해 직업 훈련 등에 투자하려는 움직임 정도다.

병으로 몰아가는 것은 배제를 뜻할 뿐 어떤 해결도 될 수 없으므로 언젠가 또 다른 문제로 나타날 것이다. 니트도 투자해 봤자 회수도 할 수 없고 강제로 노동시장에 수용할 수도 없다는 것을 안다면 어차피 사업도 안될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민간(차원)에서 한 명의 은둔형 외톨이에 대해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지원을 계속 하는 이유는 그 활동 자체가 재미있기 때문도 있지만, 틀어박혀 지내는 사람 속에서 앞으로의 사회적 가능성을 보기 때문이다.

은둔형 외톨이를 지원하려면, 일하지 않아도 그 행동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관계를 계속 이어갈 수 있는 장소, 일하고 싶을 때에는 일할 수 있는 장소를 동시에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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