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불신에서 축제의 공유로

- 니시지마 아키라

한국과 일본 두 나라 민중은 서로 적대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두 국민은 서로를 불신했다. 나는 일본이 패전하기 한 해 전인 1944년 태어났다. 전후 [한국의 경우 해방 후] 일본 공산당원으로 지낸 아버지는 병으로 활동을 접고 오사카의 슬램인 가마가사키(釜が崎)에서 나날이 삶의 의욕을 잃고 있었다. 여덟 살 무렵이던 나는 사회 구조에 대해 잘 몰랐지만, 가마가사키에 많은 조선인, 오키나와 출신인, 해방 동맹 사람들의 한숨을 늘 지켜보며 자랐다. 나는 그저 가난해서 억압된 생활을 했지만, 그들은 모두 정치적인 압력 때문에 가마가사키까지 쫓겨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중 조선인-한국인은 전쟁 전부터 억압적인 정권 때문에 조국에서 강제 연행되었고, 그들의 해방을 위해 싸우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의무교육도 받지 못하고 부랑자처럼 생활했지만, 한편으로 싸구려 여인숙의 어슴푸레한 방에서 베니아 합판과 모르타르담을 통해 들리는 파칭코 가게의 소음과 군함 행진곡에 괴로워하면서 억압된 사람들의 원한을 느꼈다. 그 원한은 분명 가장 밑바닥의 일본인을 향한 것이라고 믿지 않았지만, 전쟁 전부터 계속되던 일본 정부의 억압에 정당히 반격한 것인 만큼 나의 머리 역시 강하게 치는 일이었다.

나는 코리안을 북한과 대한민국으로 나누어보진 않았지만, 아버지의 정치적인 영향 때문인지 늘 그들의 조국은 조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일본 정부와 언론이 북한을 ‘공포정치’라고 떠들어댈 때도 나는 20여년 전까지 ‘남쪽’ 정부가 더 공포정치라고 느꼈다. 그것은 한국, 일본, 미국과 연결되는 군사정권의 공포였다. 나는 45년 전, 그러니까 대학시절 학원투쟁 시대 한 재일한국인과 어울리며 많은 점을 배웠다. 그는 입관법 위반 혐의로 자유를 잃고 우파 좌파 모두에게 간첩으로 몰리고 있었다. 나는 그의 집에 매일같이 드나들며 그의 이야기를 일본어로 적어 내려갔다. 그는 일본어를 잘 했지만 한자가 섞인 일본식 문장 표현만은 서툴렀다. 지어낸 것인지 직접 겪은 것인지, 여하튼 그는 전후 한국의 공산 게릴라 투쟁을 이야기했다. 그가 여러 가지 장면을 묘사하면, 나는 질문을 곁들여 가장 적절한 일본어 문장으로 바꾸었다. 그는 흥에 겨울 때 가끔 격한 한국어로 소리치듯 “일본 개놈!”이라고 말했다. 이 말은 “일본인 개새끼”와 같이 심한 욕설로, 여러 번 설명을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어떻게 글로 표현해야 할 지 그 당시 몰라서 나는 하는 수 없이 카타카나 그대로 표기했다. “이르본 케~놈”은 “일본인 개놈”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적절할 때도 있었고, 별안간 아무 맥락도 없이 나온 말이었을 경우 나중에 그가 직접 지우기도 하였다. 돌아보면, 그의 감정이 치밀어 올랐을 때 눈앞에 있는 일본인인 나에게 뱉은 말이었는지도 모fms다. 당시 그와 나는 둘도 없는 친구였지만, 아끼는 마음과 미움이 뒤섞여 그런 말이 무심코 튀어나왔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나는 2년 동안 그의 집에 드나들며 마치 문하생처럼 집필을 도왔다. 때로 그의 식욕에 놀라기도 했다. 불고기는 물론, 불고기를 싸먹는 상추가 접시 가득 쌓여 있어도 눈 깜짝할 사이에 다 없어지곤 했다. 내가 두세 장 먹는 사이 그는 20~30배를 순식간에 다 먹어치우곤 했다.

그 무렵 도쿄에서 김대중 납치사건이 일어났다. 민주국가인 일본의 일류호텔에서 어둠을 틈타 주요인사가 유괴된 것이다. 한국과 일본 정부 모두 무슨 일을 저지를지 알 수 없는 존재로서 의심은 최고도에 달했다. 군사정권이던 한국에 대한 공포감은 북한에 비할 바 아니었다. 한국인에 대한 나의 감정은 나를 가르쳤던 그의 인품에 의해 크게 바뀌었지만, 한국 국가에 대한 불신감은 오래도록 바뀌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도 긴 어둠의 시간을 거쳐 푸른 하늘이 나라를 비추게 되었다. 군사독재가 붕괴한 것과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경제발전은 역시 때를 같이 하고 있던 것인지. 어쩐지 두렵던 나의 스승은 지금은 돌아가셨다. 젊은 한국인 친구들은 밝고 근심 걱정이 없다. 일본인에 대한 원망이나 원한이 처음부터 없던 것처럼 밝다. 그 역사를 우리가 잊을 수는 없지만, (잊어서도 안 되지만) 적어도 그들의 축제에 한 잔의 탁주를 들어 함께 ‘건배’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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