앎과 향연

자기배려와 자연

- 강민혁

요즘 나는 달리기에 몰두하고 있다. 덕분에 몸도 가벼워지고, 잦은 병치레도 사라졌다. 그만큼 달리기는 뒤늦게 찾아온 친구 같다. 하지만 달리기도 다른 운동 못지않게 부작용이 클 수 있다. 그래서 행여 허리라도 삐끗할까봐 노심초사하며 달려왔다. 하지만 부작용은 이런 나를 보란 듯이 무시하며 불청객처럼 찾아왔다. 몇 주 전 뭔가에 홀려서 평소보다 두 배 가까이 뛰고 말았다. 아뿔싸, 1시간 뒤에 무릎 아래 장딴지가 퉁퉁 부어 일어날 수 없게 되었다. 아래쪽을 쥐어보니 근육이 심하게 뭉쳐있었다. 왼 다리 아래쪽은 이미 돼지 뒷다리처럼 부어올라, 조금만 움직여도 신음소리가 절로 흘러나온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오른 다리 아래쪽도 같은 지경인데 웬일인지 손쉽게 움직여졌다. 그러나 의식적으로 양 쪽 장딴지를 직접 짓누르면 아픈 것은 매한가지였다. 조금 시간이 지나니까 왼쪽 다리는 움직일 엄두를 내지 못했지만, 오른쪽은 조금씩 사용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참으로 기묘했다. 의식하지 못할 뿐이지 실제 아프기는 매한가지인데도 ‘아픔’에 대한 느낌이 완전히 다르니 말이다. 그래서 우리가 느끼는 ‘아픔’이란, 혹시 ‘여러 다른 아픔들보다 좀 더 아픈 것’일 뿐이지 않는가하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그러니까 내 몸 안에는 내가 아프다고 느끼는 것 말고도 다른 아픔들이 수없이 많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 동시적인 아픔들 중에 상대적으로 더 아픈 것만을 아프다고 느끼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이렇게 생각하자, 모든 감각들이 다 그렇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온갖 소리들이 있지만 더 큰 소리로 들리는 것만 듣고 있고, 온갖 색깔들이 있지만 더 잘 보이는 색깔만을 보고 느끼는 것이 아닐까? 더 중요한 것은 이런 비대칭적인 감각들 때문에 시시각각 세상이 달라 보인다는 사실이다. 왼쪽 다리의 감각으로 느끼는 세상은 오른쪽 다리의 감각으로 느끼는 세상에 비하면 더 고통스러운 것이다. 이쯤 되자 내가 알고 있는 세상이 도대체 무엇일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주, 감각되어진 타자

에피쿠로스는 감각들에 대해서 절대적인 신뢰를 보냈다. 에피쿠로스는 우주가 물체(soma, 신체적인 것)와 허공(kenon/asomaton, 비신체적인 것)으로 구성되었다고 본다. 물론 ‘나’―일단 이렇게 부르기로 하자―도 그런 물체들 중 하나다. 우주는 물체들이 허공을 메우면서 구성된다. 그리고 물체와 물체 사이―이 사이가 ‘허공’이라 불리는 ‘비신체적인 자연’이다―에는 각 물체들로부터 빠져나온 물질들이 흘러 다니고 있다. ‘나’라는 물체가 다른 물체들을 느끼게 되는 것은 바로 이 물질들을 통해서이다. 이 느낌이 흔히 말하는 시각, 청각, 후각 같은 감각들일 것이다.

“ [….] 외부 대상과 모양이 같은 영상들(typoi)이 있다. 이러한 영상들은 우리에게 보이는 외부 대상보다 훨씬 얇다. 왜냐하면 그러한 복합체가 주변 공기 중에서 형성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속이 비고 얇은 것들을 형성할 기회가 없지 않으며, 외부 대상이었을 때 가졌던 상대적 위치와 순서(ten hexes thesin kai basin)를 그대로 유지하는 유출이 불가능하지도 않다. 우리는 이러한 영상들을 모상들(eidola)이라고 부른다. [….] 외부 대상과 색깔과 모양이 같은 영상들이 외부 대상으로부터 흘러나와 각 크기에 따라서 우리의 눈이나 마음으로 들어올 때, 외부 대상이 우리에게 자신의 색과 모양을 가장 잘 각인시켜준다.”(에피쿠로스, <헤로도토스에게 보내는 편지>)

위 인용문은 시각에 대한 에피쿠로스의 간략한 이론이다. 이 내용이 실험을 통해 확인된 과학적 사실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부분은 ‘나’와 ‘세계’가 관계 맺는 방식에 대한 에피쿠로스의 사유 구조다. 에피쿠로스의 설명에 따르면, 외부 대상으로부터 ‘영상(typos)’이라는 물질이 떨어져 나온다. 그 영상이 공기를 통과해 우리 망막에 부딪힘으로써 이른바 ‘시각’이라는 감각이 가능해진다. 여기서 말하는 ‘영상’이란 외부 대상의 표면에서 떨어져 나온 매우 얇은 막이다. 즉 외부 대상인 사물 일부가 얇게 벗겨져 얇은 막의 형태로 빠져나온다. 그리고 그 막은 사물 원래의 모습을 간직한 채로 공기를 통과해 ‘나’의 망막과 접촉한다. 이때 비로소 ‘시각’이라는 감각이 생기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후각, 미각, 촉각 같은 감각들도 코, 혀, 피부 같은 감각기관이 외부 사물에서 흘러나온 물질들과 접촉하면서 발생한다. 따라서 ‘나’는 외부사물과 접촉하는 순간 감각하게 된다. 즉 감각은 물질들의 마주침으로 발생하는 것이다. 이른바 ‘자연’의 물체들은 허공을 떠도는 물질들을 통해 연결되는 셈이다. 이를테면 ‘감각’은 이 연결을 알려주는 일종의 신호다.
아울러 감각으로 도달한 물질들은 마음으로 들어가 추론(사유)을 일으키는데, 바로 이 추론이 ‘개념’을 만든다. 이를테면 감각적 영상들이 반복되면 마음속에 일반 개념(polepsis)이 생기는데, 에피쿠로스는 이 일반 개념도 감각으로부터 나온 것이므로 감각과 마찬가지로 진리의 기준이 된다고 생각했다. 이처럼 에피쿠로스는 감각에 대해서 절대적 신뢰를 갖고 있다. 감각에는 오류가 없다고도 하였다. 따라서 에피쿠로스는 감각이 가능하다면 모든 감각적 증거가 옳다고 간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감각 그 자체는 항상 옳지만, 감각이 불분명하거나 확인해야할 필요가 있는 경우는 발생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감각은 언제나 옳지만, ‘나’에게 불분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감각에 의지해서 모든 탐구를 진행해야 하며, 확증을 필요로 하는 것(prosmenon)이나 불분명한 것(adelon)을 판단할 증거를 가지려면, 전적으로 마음의 직접적 영상 포착(tas parousas epibolas dianoias)과 다른 어떤 판단 기준의 직접적 포착(tas parousas epibolas hotou ton kriterion)에 의존해야 하며, 마찬가지로 우리 안에 존재하는 느낌들(pathe)에 의존해야 한다.”(에피쿠로스, <헤로도토스에게 보내는 편지>)

물론 외부대상이 감각기관을 통해서만 ‘나’에게 도달하는 것은 아니다. 감각기관으로 감지하지 못할 정도로 미세한 물질로 흘러나왔기 때문에 기존 감각기관으로는 도저히 알아 낼 수 없는 경우가 그렇다. 이런 경우는 감각 자체가 불분명해진다. 따라서 이런 것들은 다른 방식으로 포착해야 하는데, 에피쿠로스는 이를 위해 두 가지의 포착 방식을 설명하고 있다. 우선 ‘마음의 직접적 영상 포착(tas parousas epibolas dianoias)’. 시각을 예로 든다면 큰 영상은 눈이라는 감각기관으로 들어가지만, 아주 미세한 영상은 마음으로 직접 들어간다. 다시 말하면 감각기관으로 포착되지 않는 물체들은 감각기관을 거치지 않고 마음으로 직접 들어갈 수도 있다. 이를테면 신의 영상은 너무 미묘해서 감각에 의해 파악되지 않고, 우선 마음(dianoia)속으로 곧장 들어와서 거기서 포착된다. 앞서서 감각으로 도달한 물질들도 마음으로 들어가 추론을 일으킨다고 했었다. 이를 연결해 말한다면 ‘추론(사유)’은 몸 표면의 감각기관으로 통해서 들어오는 물질과 직접 마음으로 들어온 물질 두 가지를 재료삼아 구성된 물체이다. 그 다음은 ‘판단 기준의 직접적 포착(tas parousas epibolas hotou ton kriterion)’. 너무 멀거나, 방해물들이 많아서 대상물을 정확하게 감각할 수 없는 경우, 우리는 가까이 가서 보거나 듣거나 해야 한다. 따라서 경우에 따라 감각은 수동적이기만 한 게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능동적으로 대상물을 포착하기를 요구한다.
결국 몸 표면에 있는 기관에 의해 포착을 하든, 마음에 의해 포착을 하든 모든 것은 ‘감각’이라고 해야 할 듯하다. 어쩌면 마음도 눈, 코, 입, 귀와 같은 또 다른 기관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아주 미세한 물질을 감각하는 기관 말이다. 아무튼 감각기관에 의해서 포착되어 일반 개념이 되었든, 마음으로 직접 들어와 포착되어 일반 개념이 되었든, 우주는 물질의 운동을 통해서 마음으로 흘러들어간다. 이 모든 것들은 ‘물질’이다. 개념조차도 말이다.
여기에 이르면 감각(‘마음의 감각’을 포함해서)이란 우주의 축소판인 ‘물질’이 ‘나’에게로 다가와서 구성한 것이 된다. ‘나’는 감각을 통해서 우주의 갖가지 사물들을 손님들로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감각되어진 타자들, 바로 우주는 그렇게 타자인 채로 ‘나’에게로 들어온 셈이다. 우주의 갖가지 물체들이 타자인 채로 허공을 가로질러 나의 코로, 입으로, 귀로, 혀로, 심지어는 마음으로 들어오고 있는 것이다. 감각은 일종의 ‘타자에 대한 환대’인 셈이다.

영혼, 감각이 탄생하다.

그런데 좀 더 관심을 갖고 살펴야 할 것은 이런 감각을 일으키는 ‘나’라는 존재도 물체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에피쿠로스가 영혼을 설명하는 부분을 보자.

“<영혼이란 미세한 입자들로 구성된 물체(soma)이며, 몸 전체에 고루 퍼져 있고, 열기와 혼합된 바람과 매우 유사하며, 어떤 관점에서는 바람과 닮은 반면 다른 관점에서는 열기와 닮았다>고 생각해야 한다. 한편 바람이나 열기보다 훨씬 더 미세한 제3의 부분이 있는데, 이것은 아주 작기 때문에 몸의 나머지 구조와 더 잘 조화될 수 있다.”(에피쿠로스, <헤로도토스에게 보내는 편지>)

에피쿠로스에 따르면 영혼은 바람이나 열기와 다를 바 없는 물체(soma, 신체적인 것)다. 감각은 이 영혼이라는 물체로부터 발생한다. 특이한 점은 감각이 우리의 통념과 달리 ‘몸’으로부터 발생했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에피쿠로스는 놀랍게도 몸은 오히려 감각능력을 스스로 가진 적이 없다고 말한다. 에피쿠로스에 따르면 몸과 함께 태어난 어떤 것, 즉 영혼이 몸에게 감각 능력을 주었기 때문에 몸이 감각을 느낄 수 있게 될 뿐이다. 하지만 영혼은 자신 안에 있는 원자들의 운동 때문에 스스로 감각의 속성을 지닌다. 그리고 이런 운동 과정에서 영혼은 몸과 관계를 가짐으로써 몸에게 감각을 전달한다. ‘나’의 영혼은 감각의 속성을 ‘가능성’으로서 갖고 있다가 몸과 접촉하면서(일종의 운동) 몸으로 전달시키고, 그 몸에서 감각을 ‘현실화’시킨다. 따라서 몸의 일부가 소실되더라도 몸은 영혼이라는 물체를 품고 있는 한 결코 감각을 잃지 않는다. 또한 영혼이라는 물체는 같이 있던 몸이라는 물체가 해체되면 운동을 할 수 없게 되어 더 이상 이전과 같은 능력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에 감각을 잃게 된다. 그래서 에피쿠로스는 이런 감각을 ‘우연적 속성’이라고 규정했다. 왜냐하면 영혼은 스스로 감각의 속성을 갖긴 하지만, 오로지 운동을 통해서 몸이라는 물체와 관계해야만 그 감각이 현실화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기묘한 전복을 지켜본다. 이 세계는 물체와 허공으로 구성되어 있다. 물체와 물체 간에는 감각에 의해서 연결되는데, 그 감각은 물질들의 이동으로 발생하였다. 그런데 감각의 속성 그 자체는 몸 안에 있는 영혼에 의해서 ‘가능성’으로 이미 생성되어 있었다. 오로지 외부 물질이 이동하여 몸에 부딪혔을 때, ‘현실화’되어질 뿐이다. 다시 말하면 감각은 영혼 속에 언제나 이미 ‘가능성’으로서 아로새겨져 있다가, 외부 사물이라는 타자가 ‘나’에게 다가오면 비로소 현실화된다는 말이다.
이런 구도의 특이성은 감각이 외부 물질의 속성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 자체가 갖고 있는 가능성으로부터 출발한다는 점이다. 외부 대상 물질이 ‘나’에게 아무리 다양하게 찾아오더라도, ‘나’의 영혼이 다른 감각의 가능성을 품고 있지 않았다면, 기존 방식 그대로 그 물질들과 접촉할 것이다. 이를 달리 말하면 외부 사물과 ‘나’는 고정된 감각만을 갖게 될 것이라는 말이고, 그것은 ‘나’와 사물들 간의 관계가 하나로 고정될 뿐이라는 말로 이해된다. ‘나’와 사물들 간의 관계는 내 영혼이 갖고 있는 ‘감각의 가능성’에 따라 고정되기도, 변하기도 하는 것이다. 아울러 이런 가능성은 영혼 안에 있는 물질들의 운동에 따라 아주 다양하게 현실화될 수 있을 것이다. 가능성은 정의상 무한하기 때문에, ‘나’와 사물들과의 관계 또한 무한하게 열려있는 셈이다.

자연-복합체, 타자들과의 관계

그런데 물체들은 복합체이고, 그 복합체는 갖가지 ‘구성 요소들’―우리는 이를 이른바 ‘원자’라고 알고 있다―이 결합되어 구성된다. 따라서 당연히 구성요소들이 재배열되거나, 빠져나가거나, 추가되면 복합체의 모습은 바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원자들에 과도한 관심을 가질 필요는 없다. 에피쿠로스는 모든 것은 물체(soma, 신체적인 것, 질료)라고 했다. 오로지 그것은 허공(asomaton, kenon 비신체적인 것)인 것과 구별되는 의미에서 ‘신체적인 것’들을 말하는 것이었고, 원자는 그런 신체적인 것(물체)들의 특수한 형태로서 지칭되어진 것일 뿐이다. 여하튼 중요한 것은 우주는 물체들(신체적인 것들)로 구성되어 있고, 그것들은 끊임없이 재배열되면서 다양한 복합체를 구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복합체들은 어떻게 생성되는가? 이것에 대해서는 반(反)에피쿠로스주의자였던 키케로(Cicero)에 의해서 에피쿠로스의 관점이 역설적으로 설명되고 있다.

“에피쿠로스는 만약 원자들이 그 무게에 의해 아래로만 움직인다면 그 운동은 확정적이며 필연적으로 될 것이므로 어떤 것도 우리의 지배 아래 있지 않게 될 것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이러한 필연성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수단을 창안했는데, 이것은 데모크리토스에게는 없는 것이었다. 그는 원자들이 무게와 중력으로 인해 아래로 운동함에도 불구하고 아주 작은 이탈을 만들어낸다고 말했다”(키케로, 『신의 본성에 대하여』, 맑스의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고병권 번역본에서 재인용)

여기서 우리는 에피쿠로스의 그 유명한 ‘클리나멘(clinamen)’을 마주하게 된다. 에피쿠로스는 허공에서 이루어지는 원자들의 운동을 세 가지로 가정했다. 첫 번째는 직선으로 낙하하는 운동, 두 번째는 원자가 직선에서 벗어나면서 생기는 운동, 세 번째는 많은 원자들의 충돌을 통해 정립되는 운동이다. 바로 두 번째 ‘원자가 직선에서 벗어나는 운동’이 이른바 ‘편위 운동[사선 운동]’이다. 이 편위 운동이 발생하는 이유는 뜻밖에도 우연적이다. 필연성이란 존재하지 않고, 우연적으로만 그런 편위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편위는 아무런 ‘원인 없이’ 발생한다. 에피쿠로스에게 운동은 아무런 원인이 없다. 이 말은 편위가 거꾸로 아주 다양한 원인에 의해서 일어난다고 바꾸어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나의 필연적인 원인이 아니라, 셀 수 없이 많은 원인이 이 편위라는 사건에 개입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단 하나의 원인으로 규정할 수 없다는 뜻에서 ‘우연적’이며 ‘원인 없이’ 발생한다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자연법칙의 필연성을 찾으려는 당대 자연학자들의 숙명론적 태도[heimarmene]를 극도로 비판하면서, 에피쿠로스는 우리가 믿어야할 것은 신이 아니라 우연이라고 단언하였다.

“[….] 그[자연의 목적을 잘 계산한 사람-인용자]는 운명(숙명)―어떤 이들은 운명을 만물의 여주인이라고 불렀지만―을 비웃으며, 우리의 행동―이들 중 어떤 것은 필연에 따라 생겨나며, 어떤 것은 우연에 의해서, 또 다른 것은 우리의 힘에 의해 생겨난다―을 결정할 힘이 우리 안에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사려 깊은 사람은 다음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필연에는 아무런 책임도 없으며, 우연은 유동적이며, 우리 힘에 의해 생겨나는 일은 다른 주체를 가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행동에 대해서는 칭찬이나 비난이 따라붙도록 되어 있다.> 정말로 자연철학자들이 주장하는 운명의 노예가 되는 것보다는 신에 대한 신화를 따르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에피쿠로스,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편지>)

아마도 원자론과 클리나멘은 에피쿠로스가 우리 자신의 숙명을 깨트리기 위해서 행한 사유의 결과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연성’이라는 ‘잠재적 가능성’의 세계로 표현되었다. 그런데 앞서서 우리는 영혼이라는 것조차 물체(soma, 신체적인 것)이며, 자신 안에 있는 원자들의 운동 때문에 스스로 감각의 속성을 지닌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이것을 ‘감각의 가능성’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영혼조차 원자들[특수한 신체로서의 원자들]의 운동에 의해 재배열되고. 빠져나가고, 추가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영혼도 하나의 복합체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영혼이라는 물체도 매우 다양한 원인에 의해 구성되어질 가능성을 언제나 이미 품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단 하나의, 필연적인 영혼이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 복합체에 대한 에피쿠로스의 설명은 외부 대상에 대한 인식을 정초 지으려는 의도이기 보다, 바로 이 영혼-복합체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라고 보아야 한다. 영혼은 일반적인 사물들과 다를 바 없다. 어쩌면 ‘나’라는 것도 구성되어진 감각일 것이다. 숙명론이라는 것도 구성되어진 감각들 중 하나의 감각만을 고정적으로 지속될 때 발생하는 태도인 듯하다. 결국 감각이란 물체와 물체가 결합하여 복합체를 만들어내는 일종의 회로이다. 이 회로의 변화가능성은 언제나 이미 영혼 속에 아로새겨져 있다. 이를 받아 다시 정리하면 ‘자연’이라는 복합체는 사전에 구성되어진 고정된 구성물인 것이 아니라, 물체와 물체가 감각에 의해 결합되면서 시시각각 변해가는 복합물이다. 결국 자연-복합체 자체가 고정된 실체로서 존재할 수 없고, 오로지 결합방식에 따라 다양하게 변해간다는 말이다. 따라서 자연-복합체는 고정된 물체로서 존재할 수 없게 된다. 차라리 물체와 물체간의 관계 그 자체가 자연-복합체의 전부라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우리는 앞서서 우주는 감각되어진 타자라고 했다. 그렇다면 자연-복합체는 감각을 통해 ‘나’에게 찾아온 타자들과 영혼이 구성한 관계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관계를 표현하고 있는 것은 물질과 물질이 맞부딪히며 생성되는 ‘감각’이다. 아울러 그 감각은 언제나 이미 영혼 안에 ‘잠재적 가능성’으로 품고 있었다.
여기에 이르면 그리스의 자연에 대한 이해가 다시 ‘자기’로 회귀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 세계는 물체(신체적인 것)와 허공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나’라는 물체는 외부 사물들의 물질들을 감각기관이나 마음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감각한다. 바로 이 감각을 통해 자연-복합체가 구성되고 있는 셈이다. 아울러 ‘나’는 이 감각을 통해 자연-복합체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감각의 차이에 따라 매번 달라질 수 있는 참여인 것이다. 그러나 그 감각은 현실화되기 이전에 언제나 이미 ‘나’의 영혼-복합체 속에서 ‘가능성’으로서 갖고 있었다. 따라서 자연-복합체, 즉 타자들과의 관계로서의 자연은 ‘나’의 영혼-복합체 안에서 이루어지는 물질 운동에 달려 있는 셈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에피쿠로스의 자연학에 대한 태도도 명확하다.

“[….]우리가 개별 원인에 대해 상세하게 탐구(historia)할 경우, 천체가 뜨고 지는 현상과, 일식과 월식, 그리고 회귀선과 이런 종류의 현상들에 대한 지식은 인간의 행복―우리가 현상들을 앎으로 인해서 얻게 되는―에 기여하는 바가 없다. 오히려 위의 현상들에 관해 자세히 알고 있지만 ‘천체의 본성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 ‘이런 현상이 생기는 주된 원인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두려움을 가지게 된다. 어쩌면 상세한 지식을 가지는 사람들의 두려움이 더 클 수도 있다. [….] 따라서 우리는 느낌과 감각―일반적으로 사람의 느낌과 감각이건 개개인의 느낌과 감각이건―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판단의 각 기준에 따라 주어진 모든 분명한 증거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런 것들을 연구함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속에 근심과 두려움이 생기는 원인을 올바르게 추적할 것이고, 천체 현상과 때때로 발생하는 다른 현상들의 진정한 원인을 앎으로 인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가장 큰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에피쿠로스, <헤로도토스에게 보내는 편지>)

에피쿠로스는 모든 원인이 가능하다고 본다. 따라서 여러 원인 중 단 하나의 원인을 명백한 법칙으로 판단하는 것을 무모한 짓으로 여겼다. 모든 원인을 긍정하는 것, 즉 모든 우연적 사건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따라서 자연을 외부 대상으로 분리하고, 주체가 법칙을 인식하는 것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에피쿠로스는 오히려 이 모든 것이 영혼 안의 감각가능성으로 존재하고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에피쿠로스에게는 바로 이 영혼의 감각가능성을 파악하고 조절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으로 된다. 그래서 에피쿠로스는 대상 사물에 대한 경험과학과 실증적인 지식들-주로 데모크리토스의 지식들-을 비웃었다. 에피쿠로스는 그런 지식들은 원래 목표했을 ‘궁극의 지식’에 도저히 도달할 수도 없을뿐더러, 오히려 이미 얻은 지식에 대한 ‘불안’으로 귀결될 뿐이라고 생각했다. 에피쿠로스의 ‘지식’은 ‘자기’가 자연-복합체에 참여함으로써 자기 안에 구성된다. 그것은 영혼에 아로새겨져 있던 수많은 감각가능성을 다룰 줄 아는 자가 매번 새로운 자연-복합체에 ‘자기’를 참여시키는 것이다. 이처럼 ‘자기배려’는 끊임없이 새로운 감각을 통해 매번 새로운 자연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아울러 그 참여와 더불어 기존의 ‘자기’는 자연-복합체 안에서 해체되고 만다. 바로 이것이 에피쿠로스의 ‘아타락시아(ataraxia, 마음의 평안)’이고, ‘자기배려’이다. 그것은 감각을 단련하는 자기배려, 매번 새로운 자연을 구성하는 자기배려, ‘자기’조차 그 자연-복합체의 구성원으로 참여하는 자기배려, 따라서 결과적으로 매번 해체되는 자기배려이다.

다시 앞으로 되돌아가본다. 내 몸의 아픔은 여러 아픔들 중 단지 더 아픈 것들을 말할 뿐인 듯하다. 아마도 그것은 내 영혼 속에 언제나 이미 아로새겨져 있던 어떤 가능성들 중 단 하나의 가능성이 현실화되어 나타난 아픔일 것이다. 다시 말하면 어떤 위계와 가치가 왼쪽 다리를 더 아프게 인식하도록 위치 지워졌을 거라는 말이다. 아마도 오른쪽 다리는 평소에 자주 쓰던 다리라는 습관적인 사고가 무의식적으로 이 아픔에도 작동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생각에 이르자 나는 나의 아픔조차 내가 스스로 알지 못한다는 생각에 내 자신이 더욱 의심스러워졌다. 아니, 나는 아픔조차 스스로 아프지 않고 무언가에 의해서 거짓으로 아팠던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나는 내가 알지 못하는 아픔들로, 아니 조작된 아픔에 시달리고 있을지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 몸조차 내 것이 아닌 것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나의 감각을 누군가에게 빼앗겼다는 느낌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도 들었다. 아픔 자체가 감각이라면, 그것은 외부 사물과 ‘나’라는 신체가 만나며 구성된 자연-복합체의 특수한 국면일 뿐이라는 생각이다. 어쩌면 감각되어진 아픔들 때문에 ‘나’는 자연으로 끊임없이 회귀하며, 자연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는지 모른다. 아픔 자체가 나에겐 자연에 참여하는 소중한 회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다른 아픔들을 찾는 것, 바로 그것이 나에겐 새로운 자연에 참여하는 방법이 될 거라는 생각이다. 병을 고친다는 것, 어쩌면 그것은 ‘어떤 아픔’을 ‘다른 아픔’으로 바꾸고, 다른 자연에 참여하는 모험이라고 해야 할 듯하다. ‘나’의 품안에서 가능성으로 존재하고 있을 수많은 아픔의 회로들을 찾아내고 탐구하는 것, 그리고 그 새로운 회로들에 내 자신을 위치시키는 것. 그것이 어쩌면 ‘자연을 인식하는 자연학’이 아닌, ‘자연에 참여하는 자연학’ ‘자기배려하는 자연학’이 아닐까 생각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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