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역사를 지우고 싶은 사람들

- 오항녕

역사를 공부하다보면 사람들의 기억이 사라지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자연적인 훼손과 인위적인 파괴. 그 중 더 결정적인 이유는? 안타깝게도 인위적인 파괴 쪽이다. 먼저 자연적 원인 잠깐.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태풍 볼라벤이 올라오고 있다. 바람, 비의 피해를 걱정하고 있다. 전에 국가기록원에 근무할 때 한 지방자체단체에서 침수된 기록물의 복원에 대한 의뢰를 받은 적이 있었다. 침수(沈水)는 전통적으로 기록에 대해 가장 큰 자연적 위협이었다. 특히 종이는 일단 물을 먹으면 떡이 되다시피 해서 복원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물에 잠겨도, 습한 곳에 있어서 물을 먹어도.

인간이 제일 위험했다

하지만 언제나 문명의 흥망이 그렇듯이, 자연적인 이유보다는 인위적인 이유가 기록의 생명에는 더 치명적이다. 지구에도 그렇듯이 문명에도 인간이 가장 위협적인 존재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인간의 무엇이 위협일까? 요즘 같아서는 인간 자체가 위협이다.
조선시대에 실록을 편찬했다는 사실은 다 아는 일이다. 앞으로 우리가 다루게 될 내용이나 주제도 실록의 도움을 많이 받을 것이다. 그런데 그 실록의 생존은 기록에 대한 인위적인 위협에 관해 대표적인 사례 두 가지를 보여준다. 하나는 모여 사는 인간 자체가 위협이라는 것과, 하나는 인간이 벌이는 전쟁이라는 위협이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 때 바그다드 국립박물관을 폭격하는 장면을 본 분들이 많을 것이다. 화염속에 박물관이 휩싸이고, 그 뒤에 약탈이 뒤따르고. 박물관의 위치를 몰랐을 리 없기 때문에 더 야만적인 행위였다. 이슬람 문명, 아니 메소포타미아 5천년 문명에 대한 명시적 폭력. 유네스코와 ICA(국제기록평의회)에서 파괴를 비판하는 공동성명을 냈다.
한국전쟁 당시 남한과 북한의 종이 쪽지에 쓰인 기록이란 기록은 미군의 푸대자루에 담겨 미국으로 수송되었다. 그래서 한국 학자들은 지금도 현대사를 연구하려면 미국 국립기록청(NARA)로 가야 한다. 미군은 전쟁 수행 중에도 점령지에서는 맨 먼저 기록부터 주워담았다. 아직 정리되지 않은 기록들은 쉽핑넘버(선적번호)가 매겨진 채로 아직도 NARA 수장고에 처박혀 있다. 그 처박혀 있는 시간만큼 그 시대의 역사는 구멍이 뚫려 있을 것이다.

아, 지우고 싶다

조선시대에는 처음에 한 질을 간행했던 실록은 손실의 위험 때문에 여러 질을 간행하게 되는데,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네 군데의 사고(史庫)였다. 한양 궁궐 안에 있는 춘추관(春秋館)을 비롯, 충주(忠州), 전주(全州), 성주(星州) 사고가 그것이었다. 양성지(梁誠之) 같은 사람은 사고가 관청과 붙어 있어서 화재가 염려될 뿐 아니라 또 나중에 외구(外寇)의 우려도 있다고 지적했다.

불행하게도 이 예측은 정확히 맞아 떨어졌다. 중종 33년 11월 성주사고에 불이 났다. 사고가 관청 옆에 있었다는 것은 읍치(邑治) 지역에 있었다는 말인데, 요즘으로 치면 면사무소나 군사무소 옆에 두었다는 의미이다. 아마 관리가 편해서 그리 했던 듯한데, 결과적으로 인재(人災)를 피할 수 없었던 셈이다.
선조 25년 4월 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피난을 떠났다. 그 무렵 무력한 조정을 비판하듯 궁궐과 관청에 불이 났다. 조선시대 연구자들은 누구나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남은 사료가 현격히 차이가 나는 데 놀란다.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이전과 이후의 기록량은 어림잡아 1:100. 이전 사료는 실록 빼면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다 어디 갔을까? 누군가 가져가고 탔을 것이다.
아예 역사를 모으고 정리하는 단계부터 생기는 파괴도 있다. 임진왜란(그러고 보니 올해가 임진년이다. 7갑자!)을 겪은 선조 바로 다음에 즉위한 광해군. 초반에는 여러 학파와 정파가 참여한 가운데 민생을 위한 개혁정책도 추진했는데, 중후반으로 가면서 아주 망가진 시대였다.

사라진 이순신과 의병들

바로 이때 선조시대의 역사를 편찬하던 이이첨(李爾瞻) 등에 의해 대대적인 역사왜곡이 일어난다. 실록은 편찬단위가 왕대(王代)이고, 왕이 죽은 뒤에, 그러니까 다음 왕이 즉위하면 편찬을 시작한다. 이이첨은 자신을 포함한 몇몇 사람만 치켜올리고, 상대편 사람들은 다 깎아내렸다.
이러다 보니, 인조반정이 일어난 뒤 선조실록을 수정하라는 논의가 시작되었다. 그 수정 논의에는 반정을 주도한 서인(西人)은 물론, 반정에 협력한 남인(南人), 광해군 대북(大北) 정권에 비판적이었다가 낙향하거나 귀양 갔다가 복귀한 북인(北人)이 동참했다. 그런 북인으로는 《지봉유설》의 저자, 이수광도 있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선조수정실록’이다. 수정실록에는 사론도 바로잡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선조실록에 빠진 기사를 대폭 보완한 것이다. 첫째, 의병활동의 보완이다. 곽재우․고경명․정인홍․손인갑․김천일․조헌․영규․유종개의 의병활동, 이광․윤국형의 백의종군, 김덕령의 무고한 죽음, 의병장 이산겸이 무고로 하옥되었던 일 등등. 왜 그랬을까?
해전에서의 승리로 임진왜란의 전세를 바꾼 이순신에 대한 기록도 수정실록에서 보완에 관심을 기울인 기사이다. 《한산기사(閑山記事)》라는 자료가 보완된 것이 아닌가 싶은데, 수정실록에서는 이순신의 승전, 이순신과 원균의 틈이 생긴 이유 등이 상세히 수록되어 있고, 당시 조정이 원균의 편을 들었으며 그로 인해 이순신 하옥되고 원균은 이순신의 수군제도를 변경하여 패배했다는 수군 운영 상황을 알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남기는 사람, 지우는 사람

못된 생각을 하자면, 수정실록을 만들었으니 앞서 만든 선조실록을 없애고 싶다. 뭐, 어차피 왜곡된 기록인데……. 이런 생각, 물론 수정실록을 편찬했던 사람들도 했었다. 수정실록 편찬자들은 주묵사(朱墨史)의 원리를 기본정신으로 제시한다. 주묵사란, 원래 기록은 검은 먹, 고친 부분은 빨간 먹으로 남기는 것이다. 그것은 ‘한 시대의 전형(典刑)을 후대에 증거로 남기는 것’, 즉 원문 기사와 수정 기사를 구별하여 남김으로써 ‘보는 사람’들이 그 사실에 대한 객관성과 시비를 판단하게 하는 데 있었다.
사실 주묵사는 고친 기사와 원래 기사를 구분하는 편리한 방법 이상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 ‘편의성’을 실무 당사자의 편의성이 아니라, ‘역사를 수정하는 태도’라는 사회적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선조실록을 폐기하지 않고, 자신들이 편찬한 수정실록과 함께 남겨두었다. 판단은 후세사람들의 몫이라며.
그로부터 또 얼마 뒤. 광해군일기의 수정 시도가 있었다. 아, 슬픈 광해군일기. 인조반정 이후 편찬되기 시작했으나 예산이 없어 간행되지 못하고 지금까지 전해지는 일기. 조선에서 유일한 케이스이다. 왜 예산이 없느냐고? 내일모레 나올 나의 책,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을 보라. 광해군대 재정 파탄의 결과이다. 농업경제에서 재정이 파탄되었을 때,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오래. 그 와중에 두 차례 호란을 겪었다.
광해군일기의 수정 시도. 사관(史官) 윤의제(尹義濟)가 적상산(赤裳山)에 갔다가 실록에 윤효전(尹孝全)의 악행이 매우 자세히 쓰여져 있는 걸 보고 돌아와 그 아비에게 말했다. 그 아비가 크게 놀라 연인(漣人 허목(許穆))에게 부탁하여 조정에서 개정 논의를 시작해달라고 부탁했다. 그 아비는 윤휴(尹鑴)라는 사람이다. 윤효전의 아들. 윤효전은 임해군의 옥사에서 앞장섰다가 공신이 되었다. 김제남(金悌男)을 죽이고 영창대군을 귀양 보냈다가 이듬해 쪄 죽인 계축옥사(癸丑獄事) 때 대사헌으로 사건을 초반에 주도하다가 무슨 일인지 지방관으로 내려갔고, 광해군 11년에 죽었다. 광해군대의 권간(權奸) 이이첨(李爾瞻)과 붙었다 등졌다 했다. 인조반정 이후 관작이 추탈되었다.
문득 역사 해석에 핏줄, 집안이 중요할 때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이첨도 그의 고조부가 이극돈(李克墩)이었다. 이극돈이 누구냐고? 연산군 때 무오사화(戊午士禍)를 일으켜 성종 때 성장한 상식/공정 세력 사림(士林)을 도륙한 인물이다. 이이첨, 윤휴. 역사를 지우고 싶은 사람들. 결국 자신들의 역사만 남기고 싶었던 사람들이다.

응답 1개

  1. 항상말하길

    다른 글 서핑하다가 잠시 들어왓엇는데
    글 잘읽고 갑니다 생각많이 하게하는 글입니다
    공명심이 뭔지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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