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생정치 시대, 지킴이의 개입과 실천

- 고병권(수유너머R)

한 5년 싸우면 승리한다는 분명한 보장이 있는 경우 누군가는 기꺼이 싸우려 할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싸움이 한정없는 것이라고 느낄 경우에는 단 1년을 버티는 것도 쉽지가 않다. 2 천 년대 이후 한국 사회의 여러 투쟁들이 장기투쟁의 형상을 취하고 있다. 짧게는 수백 일에서 수 년에 걸친 점거 농성들이 빈번하게 일어난다. 이들 투쟁을 현재의 용례에 따라 ‘장기투쟁사업장’이라고 부를 수는 있지만, 내가 보기에 이들 투쟁에서 ‘장기’는 단지 ‘긴 시간’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차라리 ‘긴 투쟁’이라기보다 ‘무한정한 투쟁’의 형상을 띠고 있다.
단지 긴 시간이 문제라면 ‘진지전’을 수행하면서 한 걸음씩 나가면 되겠지만 투쟁의 시공간은 그렇게 안정적이지 않다(진지전은 시공간의 안정성, 전선의 안정성을 전제한다). 마치 오늘 고용되었지만 내일 해고될지 모르고 오늘 여기서 일하지만 내일은 어디서 일할지 모르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불안정한 시공간, 그 영속적 불안정성이 투쟁의 형태에도 나타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투쟁은 당장 내일 끝날 수도 있지만 한없이 계속될 수도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다루어야 하는 것은 ‘긴 시간’이 아니라 ‘무한정한 시간’이다.

2천 년대 이후의 투쟁들이 자주 ‘무한정한’ 것이 되어가는 이유는 일단, 갈등을 합의하거나 대의하는 기구로부터 이 주체들이 추방된 자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 철거민들, 장애인들, 농민들, … 이들은 합의기구나 대의기구들에 의해 대표되지도 않지만, 사실은 그 이전에 합의에 의해서, 대의에 의해서 사회적 배제를 경험한 자들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이들의 투쟁은 개별적인 정책이나 제도보다 사회의 기본 원칙들, 그러니까 주류 집단의 ‘사회적 합의’ 내지 대의기구들의 ‘결탁’으로 이루어진, 정책의 기본 지향과 충돌하기 마련이다. 신자유주의라 불리든, 시장의 자유라 불리든, 사유재산권이라 불리든, 국책사업이라고 불리든, 이 사회 주류들이 (때로는 명시적으로 때로는 묵시적으로) 합의한 사회의 기본 원칙들이 수정되지 않는 한 문제 해결의 전망이 나오기 어렵다. 사회의 원칙과 합의에 저항하고 있기에 이들 투쟁의 대부분은 근거 없고 무책임한 ‘억지’처럼 보인다. 그리고 바로 이런 측면, 다시 말해 자신들의 목소리가 체계적으로 배제되어 있고, 자신들이 사회의 기본 인식이나 원칙과 싸우고 있다는 사실이 이 주체들을 지치고 낙담하게 만든다.

물래길을 가꾸는 두물머리의 지킴이들. 사진: 양평매일뉴스

물래길을 가꾸는 두물머리의 지킴이들. 사진: 양평매일뉴스

과연 어떤 투쟁의 형식이 이 ‘무한정’의 상황을 다룰 수 있을까. 어떤 투쟁의 형식이 상황의 무한정성이 주는 피로와 낙담을 이길 수 있게 할까. 물론 투쟁의 참호를 방문하고 물질적 지원과 심리적 지지를 보이는 것은 장기 투쟁을 이어가는 중요한 버팀목이 될 수 있다. 하지만 투쟁이 긴 시간을 버텨내는 일이 아니라 무한정의 시간을 다루어야 한다면, 참호 속 병사들에게 ‘더 버티라며’ 제공하는 후방지원은 우리 시대의 연대 방식으로는 한계가 있어 보인다.

내가 ‘지킴이’라고 불리는 활동가들의 유형에서 하나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나는 ‘지킴이’를 2천 년대 한국 투쟁이 배출해낸 소중한 가능성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이룬 성취나 그들의 규모 때문이 아니라, 그들 존재가 보여준 어떤 가능성 때문이다.

나는 ‘지킴이’라고 부르는 이들을 2006년 평택의 ‘미군기지 이전 반대’ 투쟁에서 처음 보았다. 대추리와 도두리를 농민들과 함께 지켰던 사람들. 그들 중에는 어떤 조직에 속했던 이들도 있지만 개별적으로 마을에 들어와서 살게 된 이들이 많았다. 나는 1980년대 현장에 위장 침투했던 운동가들과 이들을 이렇게 비교하곤 한다. 80년대 현장침투 운동가들은 대체로 ‘사건 이전’에 현장에 들어간다. 이들의 목적은 말 그대로 ‘사건’을 일으키는 것이다. 파업을 하고 민주노조를 세우는 것. 이 ‘사건’의 ‘의미’는 개입 이전에 이들에게 이미 주어져있다. ‘역사의 진보’를 위해서든, ‘민주주의’를 위해서든,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서든. 중요한 것은 거기에 부합하는 ‘사건’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2천 년대의 지킴이들은 ‘사건 이후’에 현장에 들어간다. ‘사건 이후’라고 했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사건의 ‘발발‘ 이후이고, 아직 그 사건의 ‘의미’가 결정되지는 않았을 때이다. ‘이미’ 사건은 발발했지만 ‘아직’ 그 의미가 결정되지 않았을 때, 이들은 그 ‘의미’의 생산을 위해 개입한다. 처음에는 개발과 관련된 주민들의 재산손실이 문제였을 수 있고 불충분한 이주 비용이 문제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킴이들이 개입하면서 투쟁의 의미는 ‘민주주의’가 되기도 하고, ‘생태’나 ‘공동체’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지킴이들이 그런 가치를 사람들에게 교육하거나 주입시킨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역사적으로 주어진 의미가 있던 80년대야말로 그것을 먼저 학습했거나 체득한 이들이 그런 계몽자 역할을 하려 했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아는 지킴이들은 그런 것으로 무장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하나의 유형으로서 이상화하자면, 지킴이들은 주민들과 함께 싸우고 살아가면서 공동으로 의미를 생산하고 그 과정에서 그 ‘의미’를 또한 배우는 사람들이다.

2006년 평택의 지킴이들의 선언. "평화를 지키러 이곳에 왔다". 사진: 평택시민신문

2006년 평택의 지킴이들의 선언. "평화를 지키러 이곳에 왔다". 사진: 평택시민신문

내가 ‘무한정’ 투쟁이라는 시대 규정에서 ‘지킴이’를 새로운 활동가의 유형으로 발견하는 것은 다음의 세 가지 이유에서다. 우선, 지킴이들은 ‘사는 것’과 ‘싸우는 것’의 수렴 속에서 존재하는 활동가들이다. 사실 ‘단기투쟁’의 경우 우리는 일시적으로 일상을 중단하고 싸움에 들어갈 수 있다. 하지만 ‘장기투쟁’ 내지 ‘무한정 투쟁’에 들어가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일상이 ‘투쟁’인지 ‘삶’인지를 더 이상 구분하기가 어려워진다. 사건의 현장에 들어가 일상의 삶을 공유하는 ‘지킴이’의 존재는 ‘싸우는 것’이 ‘살아내는 것’ 속에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둘째, 지킴이의 존재는 연대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며칠 전 ‘두물머리’에서 만난 한 지킴이는 내게 연대의 새로운 차원을 시사해주었다. 그는 거기서 지난 몇 년 간 농부들과 함께 농사를 짓고 그 동네에서 살아왔다. 처음에 거기 결합하게 된 계기를, 그는 ‘가슴의 무너저내림’ 내지 하나의 ‘병’으로 묘사했다. 내 일은 아니지만 내 가슴이 무너지는 체험, 그것은 분명 연대가 시작되는 중요한 순간이다. 그런데 그에게는 연대의 다른 차원이 그곳에서의 삶을 통해 새로 만들어졌다. 몇 년간 농사를 지으면서 그는 여느 농부들처럼 자신이 길러낸 작물들, 자신이 형성한 사회적 관계들을 갖게 되었다. 두물머리의 ‘강제철거’는 자신이 사랑하는 타인을 철거하는 것이기 이전에, 바로 자기 자신을 철거하는 일이 되었다. 한편으로 그는 ‘당사자’가 아닐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는 ‘당사자’였다. 그는 당사자와 외부세력을 가로지르는 선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셋째, 지킴이가 주민들과 구축한 삶은 분명 투쟁의 한 형식이었지만, 사실은 투쟁을 통해서 그들이 도달하고 싶은 삶의 형식이기도 했다. 마치 쌍차의 ‘와락’이 투쟁의 형식이지만 또한 육아와 치유, 공동체 체험의 공간이고, 이 투쟁이 끝나도 구축해야 할 중요한 삶의 형식이듯이, 그리고 용산의 카페 레아가 투쟁의 공간이면서 일상적으로 여러 사람들, 심지어 외국에서 온 활동가들까지 함께 할 수 있었던 소중한 공간이었듯이, 또 신촌의 두리반이 투쟁의 공간이면서 동시에 인디 밴드들의 소중한 공연 공간이었듯이, 그리고 또 두물머리에서 농부들과 지킴이들이 구축한 생태적 농업공동체가 그들이 지향하는 삶의 형식이듯이. 지킴이와 주민들은 투쟁의 공간에서 자신이 지향하는 삶을 실험하고 구축하면서, 자신들이 지키고 싶은 것, 자신들이 지향하는 바를 또한 생산해냈다.

내 생각에 무한정의 문제를 다룰 수 있는 것은 이 경우 뿐이다. 즉 자신이 살고 싶은 삶의 형식 속에서 투쟁의 형식을 발견하는 것 말이다. 일단 당면한 투쟁의 중요성이 있지만 그와 동시에, 자신이 지향하는 삶의 형식과 투쟁의 형식을 빨리 수렴해가야 한다. 그때 무한정의 시간은 그만큼 두렵지 않은 것이 될 수 있다. 생정치의 시대, 생명이 착취당하는 시대, 바로 그 때문에 생명을 지키고 가꾸는 것, 생존을 지속하고 가꾸는 것이 중요한 투쟁인 시대, 지킴이의 ‘존재방식=투쟁방식’은 분명히 우리에게 뭔가를 보여주고 있다.

응답 2개

  1. 고추장말하길

    지난 번 우리가 긴 우중산책에서 나누던 이야기들… 지영에게 이러저런 이야기를 듣고 싶었는데, 좀 아쉬웠지. 지난 번 디온과는 이야기를 조금 나누었지만 상황이 좋지 않아 나중을 기약해야 했어. 사건은 항상 거기에 적합한 사람들을 만들어내는 것 같아. 너무 종교적인가? ~ ㅋㅋ

  2. 낙타말하길

    병권선배,대추리 때 만난 지킴이 친구들과 일본 노숙자 운동을 하는 분들을 떠올리면서 읽었어요.
    자신의 병이 두물머리와 결합하게 해 주었다는 것, 그것이 연대의 중요한 순간이라는 것, 깊이 공감해요.
    존재방식과 투쟁방식이 서로 수렴해 가지 못해서 얼마나 괴로웠던가를 생각해 보게 되었어요.
    정말 좋은 글,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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