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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강만필

독일 공연을 다녀와서 (3)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

- 김융희

이번 독일 방문에서 음악 공연을 제외한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은 종교 개혁을 주도했던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의 주요 무대인 비텐베르크(Wittenberg)와 바르트부르크(Wartburg)성의 답사였다. 별로 알려지지 않던 대학의 한 은둔 교수가 혼자의 힘으로 세계의 역사를 완전히 바꾸어 놓은, 그의 활동 현장의 발자취를 따라 생생한 기록들을 볼 수 있었다. 크리스챤으로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혁명의 주역 마틴 루터와 만나서, 그의 행적을 살필 수 있었던 기회는 내게 아주 특별한 인연일 것이다.

인류사에 영원히 기념될 세계의 역사가 바뀌는 사건의 발생지, 비텐베르크는 베르린에서 오우토반을 달려 한 시간여의 거리인, 그리 멀지 않는 곳에 위치했다. 비텐베르크는 인구 8만여의 조용하고 평화로운 소읍으로, 중심부에 비텐베르크 교회와 100m 이내에 대학이 함께 있었다. 교회와 대학의 중간쯤의 광장에는 루터의 동상이 있었고, 인근 건물에는 ‘종교 개혁 500주년 기념 행사’를 알리는 대형 프랭카드가 길게 내려져 있었다. 495년 전에 있었던, 반 세기도 아닌 반 밀레니엄의 뜻 깊은 대행사에, 앞으로 많은 큰 행사들이 계속 치러질 것이다.

1517년 10월 30일에 있었던 종교 개혁의 근원지로 시원이 된, 그 유명한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붙였던 곳은 여기 “비텐베르크 교회”의 출입문이었다. 나무로 짜여진 출입문이 당시엔 대학 게시판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철문으로 바뀌어 반박문을 세겨둔 기념물이 되었다. 밖에서 바라본 교회 건물은 년륜만큼이나 낡아 보였으며, 교회 내에 들어서니 중후한 스테인 그라스 벽화와 함께 장려한 내부 장식의 아름다움은 아직도 중세의 기품을 느낄 수 있었다. 동아린듯 싶은 젊은이들이 합창 연습에 열심이었다.

삼사층의 고졸한 건물들이 늘어선 거리는 한산했다. 성서 연구와 강의를 하면서 거사를 이뤄낸 루터의 생활 터요, 활동 무대였던 “구텐베르그 대학”은 특별한 출입문도 없는 평범한 일반 주거지 같았고, 켐퍼스는 마치 어느 작은 사업체의 기숙사처럼 느껴졌다. 이같은 분위기의 장소에서 기적같은 대사건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에서 나는 하나님의 섭리를 본다. 역사를 바꾼 위대한 사건, 하나님의 섭리요, 능력이 아니면 도저히 이뤄질 수 없는 일이다.

가정집 마당처럼 보인 좁은 공간의 켐퍼스에서 금방 무슨 행사가 끝났는지, 간이 무대가 철거되고 있었다. 봐야 할 곳, 꼭 보고 싶은 마음이 끌린 곳을 잘 몰겠다. 가이더의 설명도 아쉬웠으며, 우리들의 답사도 듬성 대충 끝났다. 다녀온 이후에도 그 때의 현장에 대한 무지와 놓쳐버린 일들의 궁금증은 지금도 아쉬움으로 남아있다. 루터에 대한 자료와 유물들, 유적으로는 차라리 “바르트부르크 성”이 훨씬 알차고 좋왔다. “비텐베르크”와 “바르트부르크 성”은 거리가 많이 떨어져 있어, 우리 답사의 일정도 달랐다.

마틴 루터는 1483년 11월 10일 광부의 아들로 아이스레벤(Eisleben)에서 태어났다. 그는 1505년 문학석사로 법률공부를 준비중, 낙뇌로 인한 친구의 갑작스런 죽음을 보면서 마음에 변화가 왔다고 한다. 영혼의 구원에 대한 번민 끝에 1505년 7월 17일, 가장 대표적 수도원인 에르푸르트의 어거스틴 수도원에 들어갔다. 1507년 신부 안수를 거쳐 1508년에는 작센(Saxen) 선제후 프레데릭(Frederick, 1486-1525)3세가 1502년에 설립한 비텐베르크 대학에 파견되었으며, 드디어 1512년 신학박사가 되어 신학 강의를 맡은 교수가 됐다.

로마의 교황청은 베드로 성당의 건축 헌금을 명목으로 내세워 1506년부터 “속죄권”을 발매하고 있었다. 이같은 하나님의 뜻을 외곡하며 성서의 뜻도 전혀 아닌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일을 보면서, 믿음으로 이룬 죄의 용서를 내세우며 루터는 속죄권의 부당성을 반박하는 항의문을 붙였던 것이다. 회개는 일시적 행동이 아니라 일생을 통한 회개의 심적 태도이며, 어떤 문서적 사면 없이도 진정한 회개와 믿음으로 우리는 고통이나 가책을 모두 면제 받을 수 있다. 구원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인격적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루터의 이같은 처음 동기는 속죄권 발매에 대한 교황의 권한을 부정하려는 것 보다, 신학적 토론을 위한 의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교회의 권위보다는 성경 말씀이 더 중요하다”는 그 반응은 예상보다 컸다. 황제의 임명권까지도 행사할 수 있었던 당시의 교황의 권위를 생각하면, 잘 알려지지 않는 신학 교수인 루터의 이같은 행위는 매우 위험한 무모의 짖이었다. 그러나 ‘복음의 본질은 믿음으로 이룬 죄의 용서’라며 황제의 취소를 요구한 제국 회의에서 “내 글의 내용이 하나님 말씀에 배치되지 않는한, 나는 취소 할 수 없다” “나는 결코 물러설 수도, 물러서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여기 서 있다. 하나님이시여, 나를 도우소서.”라며 마틴 루터는 꿋꿋한 자세를 굽히지 않았고, 끝까지 당당하게 버텼던 것이다.

만약 교황의 전횡이 거침없이 통했거나, 독일이 중앙 집권적 체제하에 있었다면, 루터는 순교자로 일생을 마쳤을 것이다. 비록 황제라도 강한 영주를 어떻게 할 수 없는 시대였던 것이다. 프레데릭 선후제의 구원과 도움으로 보름스로부터 귀로에 있는 루터를 비밀리에 납치하여 아이젠나흐에 있는 바르트부르크(Wartburg)성으로 데려와 강제적인 은거생활은 그를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보복을 면 할 수 있게 했다. 이곳에서의 은거생활은 매우 중요하다. 루터는 거의 감금된 체, 성서 번역에 정성을 쏟았다. 다른 성서의 번역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표현이 어렵고 서툰 라틴어 성경이 아닌, 직접 희랍어 성경을 알기 쉬운 독일어 문장과 용어를 사용한 루터의 성서 번역은 누구나 쉽고 자유롭게 성경을 읽도록 했던 것이다.

바르트부르크 성은 1067년 슈프링거 백작에 의해 높고 험한 산위에 세워졌다. 성에 얽힌 사연들로 독일문화를 이야기할 때면 뻬놓을 수 없는 유명한 고성이다. 우리는 루터가 머물렀던 좁은 방을 비롯한 루터의 기록화와 유물들을 둘러보았다. 좁은 방에는 그가 사용했던 책상과 의자가 그데로 놓여 있었다. 특히 루터의 활동을 사실적으로 그린 여러 점의 기록화는 훌륭한 미술관에 손색이 없다. 높은 곳에 위치한 고성은 여러 볼거리들과 뛰어난 경관의 전망으로 관광의 명소가 되어 찾은 관광객들로 매우 혼잡했다.

프레데릭 현자는 보복의 위험에 노출된 루터를 보호하는 방법으로 이런 불편한 시설에 은둔시켰고, 1521년에 시작된 그 결실은 불과 10개월 만에 신약성서를 번역하여 논문을 마무리함으로 거사를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교황청의 끊임없는 방해와 위협에 대한 프레데릭 현자 선제후의 계속 은둔의 만류에도 1522년 3월 6일에 비텐베르크에 다시 돌아왔다. 이단으로 정죄받아 죽음과 출교, 파문의 계속된 위협에도 비텐베르크에 돌아온 루터는 이후 줄곧 활동을 계속했다.

인간은 용서받는 죄인이다. 구원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옳바른 인격적 관계이며, 그 올바른 관계의 바탕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습으로 죄를 대신 지시고 고난받으신 하나님의 자비인 것이다. 그가 믿는 복음의 요지는 죄의 용서이며, 구원은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사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그의 의로우심을 우리에게 돌려 주셨다. 이것이야말로 우리에게 평안과 기쁨, 하나님에 대한 절대 신뢰로써 영혼을 충만케 하는 진정한 복음인 것이다. 이는 곧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우리의 절대적 믿음에 있다.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었기 때문에 더 이상 율법아래 얽메이지 않고 그리스도와 새로운 인격적 관계에서 자유하다.

루터는 바르트부르크 성에서도 “너 혼자만 옳은거냐?”는 말을 되내이곤 했다고 한다. 그는 자기 행동에 대한 단호한 입장을 취하면서 결단의 순간에는 자신이 납득 될 때까지 그 문제를 계속 검토했다. 그럼으로 자기의 길이 아니란 생각이면, 갔던 길도 과감히 포기하고 새로운 확신에 따라 행동했던 것이다.
“성인의 이름을 불러 애원하던 사람이 성인들의 숭배를 쓸데없는 것으로 반박하게 되고, 수도사가 되겠다고 서원했던 그가 수도원의 모든 것을 배척하게 되었으며, 카톨릭 교회의 한 충실한 아들이었지만 나중에는 중세 카톨릭의 틀을 박살냈으며, 교황의 한 독실한 종이었지만 교황들을 적그리스도로 간주해 버렸던” 마틴 루터의 이같은 거침없는 삶을 나는 존경한다. 그래서 나에게는 이번 독일 여행이 더욱 뜻있는 길이었다.

요즘 “한국의 기독교에 문제있다.”는 말이 공공연히 회자되고 있으며, 뜻있는 많은 이들의 탄식과 우려의 소리도 끊임 없이 듣는다. “한국의 기독교는 망해야 길이 있다.”는 유명 교수의 글을 읽기도 했다. 믿음 없는 나의 신앙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내가 크리스찬이란 사실이 부끄럽기도 했다. 오백 년 전의 상황을 오늘의 우리 현실에 재현함을 바랄 수는 없겠으나, 루터와 같은 위인이 우리에게는 왜 없을까? 싶다. 믿음으로 의를 얻는다(以信得義)는 믿음만을 위해 일생을 바친 루터를 보면서, 우리 교계의 위기 극복의 계기로 삼았으면 싶은 마음이다. (계속…)

응답 1개

  1. jhdh말하길

    성도 여러분을 지구촌 인터넷 선교사로 초빙 합니다. 이 사이트 (www.jhdh.org) 를 보시고 시간 나실 때 마다 이 사이트를 전화나 메일 댓글 등으로 열 방에 알리시면 전도가 됩니다. 성도님의 노력과 성의는 하나님께서 계산을 확실하게 하십니다.불신자 전도와 자살 성폭력 및 각종 범죄 예방에 매우 효과가 있으니 많이 활용 하시길 바랍니다.끝으로 여러분과 가정에 주 은총이 가득 하시길 바랍니다. 참고로 사이트 내용은 국내외 저명하신 분의 천국 지옥 간증과 그리고 터키 아라랏트 산 해발 5.000m 지점에 노아 방주 최근 동영상이 들어 있습니다.–극 빈국 선교 문화 사업 후원회 에서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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