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지가 쓰는 편지

하버지의 행복론 (7)

- 윤석원(전 전교조교사)

7-2) 수행의 가능성 탐색하기

홍아야. 자꾸 어려운 얘길 꺼내서 자꾸 미안해진다. 홍아야, 네가 행복해야 하버지도 행복해지기 때문이란다. 재미없는 글 읽자니 너는 귀찮을지 모르지만 하버지의 행복론을 꺼낸 것도 그래서란다. 너도 그건 알거야. 너를 향한 나의 모든 언행이 너의 행복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것들임을.

그런데 누구나 행복해지려면 자신의 가능성을 실현해서 성숙해야 된단다. 네가 열심히 공부하는 것도 그래서이지. 그러나 교과 공부만으로는 성숙하고 행복해질 수가 없어. 교과 공부로 지식을 많이 아는 것도 네 성숙에 필요하지만 아는 것들이 네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없는 거야. 그러니까 네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아는 것들의 도움을 받으려면 어찌해야 하니? 필요할 때 꺼내 쓸 수 있도록 아는 것들을 가지런하게 정리해 둬야 하지. 정리된 만큼 문제를 잘 해결할 수 있고 그래야 성숙해질 수 있고 그래야 행복해질 수 있단다.

정리는 실현된 가능성들 즉 경험들을 체계 짓는 거야. 아는 것들끼리 관계를 따라 전후좌우 상하로 배치하고 조직하는 것이 체계 짓는 거지. 마치 네 책상 위와 책꽂이와 서랍들에 있는 책과 문방구 등 네 살림살이를 가지런하게 잘 정리해두어서 필요한 때 앉은자리에서 눈을 감고도 찾을 수 있는 것과 같이. 만약 네가 배운 것을 제대로 정리해두었다면 네가 제대로 아는지를 시험해보려고 어떻게 묻더라도 너는 쉽게 대답할 수 있을 거야. 그러니 시험을 잘 치를 수 있겠지.

그러나 시험 문제가 아니라 삶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야 안다는 것이 진짜이고 가치가 있단다. 칫솔질을 어떻게 할 것인가 누구를 반려자로 택할 것인가 등 네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어야 진짜 아는 거고 알고 있는 가치가 있지 않겠니. 네가 학교에서 배운 것은 시험을 치르거나 성적을 올리기 위해서가 아니란다. 너는 배운 것을 다 활용하며 살아야 돼.

배운 것들이 네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직접적인 도움이 안 될 수도 있지. 그러나 배운 것들로 네 반사체계, 경험체계를 얽어짜고 너는 그 반사체계로 반사하며 살게 돼. 네 반사체계, 경험체계가 너의 유일한 눈이 되어 너의 가치체계와 의미체계와 해석체계와 신념체계로 작용한단다. 그렇게 본다면 네게 간접적으로 활용되지 않는 지식이 있겠니. 만약에 네가 아는 것 즉 네 경험들이 네 경험체계의 일부라면 너에게 시급하고도 중요한 문제가 무엇인지를 찾거나, 그 문제를 푸는데 간접적으로라도 도움이 된단다.

그래서 문재해결 능력을 기르려고, 성숙해지려고, 경험체계를 정리하려는 의도적인 노력을 하게 되는데 그게 바로 수행이야. 너도 가끔은 네 방을 깨끗이 청소하고 살림살이를 제자리에 가지런하게 정리하는 날이 있잖아. 마찬가지로 네가 네 자신에게 묻고 답하면서 너 자신을 돌아보면서 쓸데없는 잡동사니 걱정은 쓸어내고 필요한 경험들을 제자리에 정리하는 수행의 시간이 필요하단다. 마음을 다스리는 시간 말이다.

내가 지금 뭐하는 거지? 그걸 왜 해야 하지? 이 상황에서 그것보다 내게 중요하고 시급한 문제가 뭐지? 왜 그게 중요하고 시급하지? 그래서 내가 무엇을 어찌해야지? 지금 내 마음을 무겁게 만드는 게 뭐지? 그게 왜 그렇지? 그래서 내가 무엇을 어찌해야지? 등등을 묻고 스스로 대답하다 보면 마음이 아주 개운해진단다. 바로 그게 마음을 다스리는 일, 경험체계를 정리하는 일, 즉 수행이야.

그런데 종교인이 기도하는 방식으로 너도 수행을 할 수가 있어. 너도 대답하는 너를 절대자나 보편자로 가정하고(결국 네 초자아이겠지만) 그가 네 질문에 대답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자문자답(自問自答)해봐. 도움이 될 거야. 하버지는 궁극적인 보편자를 가정할 수 있으나 절대자나 전지전능자는 가정이 안 돼. 그렇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하버지의 초자아가 하버지의 원초적인 자아나 타협적인 자아에게 전지하고 전능한 존재일 수 있어. 원초적 자아의 욕망을 누가 나의 초자아보다 더 잘 알고 인정하거나 거부할 수 있겠어. 또 원초적 자아의 욕구를 누가 나의 초자아보다도 더 잘 만족시킬 수 있겠어. 나는 나를 위해 사니까 나는 나에게 절대자이고 전지전능한 존재야. 홍아야, 내 말은 네가 너의 초자아를 절대자 또는 전지전능자로 가정하고 자문자답해보라는 얘기란다. 그러면 네 경험체계를 정리하는데 정말 큰 도움이 될 거야.

그런데 홍아야, 마음을 다스리기에 앞서 네가 네 마음을 다스릴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는 게 중요한단다. 왜냐하면 수행의 어려움에서 그 확신이 네게 끝없이 정신적인 에너지의 근원이 되니까. 앞에서 그 확신을 가지기 위해서 우리의 마음을 우리 스스로가 다스릴 수 있는지 수행 가능성을 탐색해 보았어. 그리고 이번과 다음번까지 수행 가능성을 더 찾아 볼 거야.

하버지, 앞에서 본능은 타고난 가능성이라고 하셨어. 씨앗의 현실성이 어떻게 실현될지는 환경조건에 따라 다르겠지만 어떤 종류의 씨앗인지를 알면 대충 그 씨앗이 지닌 가능성을 알 수는 있잖아. 그런데 씨앗의 그 가능성은 어디서 온 거야?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씨앗이 지니고 있는 가능성의 출발점이 나와?

생물은 계통에 따라 집합적으로 분류되잖아. 그런데 界·門·腔·目·科·屬·種이라는 분류단계를 잘 들여다보면 그것이 곧 진화에서 전단계의 가능성을 뛰어넘어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는 단계나 과정임을 알 수 있어. 오늘날에도 생물의 분류체계가 완전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떤 생물이든지 새롭게 진화된 가능성이 새로운 종으로써 새로운 계통을 열기 때문에 그 계통에 따르면 분류되는 위치가 있게 마련이야.

그러니까 이론적으로는 씨앗의 가능성이 열리던 한 계통 즉 한 종의 출발점까지 진화를 거슬러 올라가면 단 하나 또는 단 한 쌍의 맨 처음을 만날 수 있을 거야. 모든 종의 맨 처음이 그렇듯이 아담과 이브도 남자와 여자의 단 하나의 현실성이었지. 그런데 그 현실성은 사라졌지만 그러나 그 현실성은 하나의 종이 되어 그 종 즉 전체집합의 모든 원소에 보편적인 가능성이라는 유전 정보로 즉 가능성으로 살아 있어. 하나의 현실성이 수많은 가능성으로. 네 질문과 같이 보편적인 가능성 즉 보편자의 맨 처음이 궁금해서 아담과 이브라는 창조 신화가 만들어진 게 아닐까?

음, 그럼 맨 처음의 현실성이 본능이라는 가능성으로 지금도 살아있다는 것을 알 것 같아. 그렇다면 내 본능은 지금 내게 뭐하고 있어. 네 본능은 너를 보다 더 잘 살리기 위해서 지금 세 가지 생명활동을 하고 있단다. 네 본능은 자율 신경을 지휘하여 면역 활동과 반사 활동과 대사 활동으로 너를 운영하고 있어.

면역활동 능력은 그 생명체를 해롭게 하는 미생물이나 이물질로부터 스스로를 지켜 항상성, 건강성을 유지하는 능력이고. 반사활동 능력은 무조건 반사와 조건 반사 능력이 있는데 외부의 자극에 대하여 우리 몸과 마음을 적절하게 변화시켜서 반응하거나 적응하는 능력이야. 그리고 대사 능력은 에너지를 섭취하고 이용하고 배설하는 능력이고. 단세포 생물이나 고등 동물이나 그리고 고등동물의 모든 기관과 세포단위에서도 본능에 따라 스스로의 항상성을 지키려고 이 세 가지 생명활동을 하고 있대. 환경에 맞추어 육체적인 생명이 건강하도록 운영하는 것은 소뇌 이하에서 운영하는 자율신경계의 무조건반사 체계, 자율 프로그램 즉 기본 프로그램이야. 이것은 조건반사 체계와 함께 인간의 두 가지 운영체계 중에 하나이지.

그렇다면 어떤 종이든지 환경에 맞추어 다 잘 살아갈 수 있는 본능 즉 운영체계가 있는데, 다른 종과 비교하면 종마다 운영체계의 능력에 왜 차이가 생겨? 인간과 아메바가 할 수 있는 일이 분명히 달라. 그건 인간이 다양한 환경조건에서 다양하게 반사할 수 있는 능력을 진화과정에서 정보라는 가능성으로 물려주고 물려받아 더 많이 축적했기 때문이지. 일반적으로 고등동물일수록 더 많은 가능성을 축적했으므로, 기존의 본능 즉 운영체계로부터 더 많은 자유를 얻었어. 운영체계가 업그레이드 된 거지. 그래서 주어진 상황, 즉 환경이라는 조건에 따라 본능에 입력된 행동방식에 얽매이지 않고 더 알맞은 행동방식으로 반사할 수 있게 된 거야.

그래서 유전될 수 있는 무조건 반사방식도 더 복잡해졌지만 그보다는 유전되지 않는 조건 반사를 이전보다 훨씬 더 잘 할 수 있게 됐어. 그런데 발생 과정만으로 볼 때 조건반사를 위한 대뇌피질은 사실 무조건반사의 생명 운영을 돕는 보조프로그램으로 생겼어. 척수에서 연수로 소뇌로 변연계로 대뇌피질로 연장되는 진화 과정에서 임시 필요에 따라 생긴 거지. 그런데 이 보조프로그램 덕분에 조건반사라는 완전히 새로운 가능성이 열렸어. 포유류의 경우 후천적으로 학습된 행동 방식이 본능적인 행동방식을 뛰어넘는 경우가 많아진대. 이를테면 흙 묻은 고구마의 흙을 털어먹을 줄만 알던 원숭이들의 무리 안에서 한 마리가 물에 씻어 먹는 것을 본 다른 원숭이들이 거의 모두가 씻어 먹게 되었다는 거야.

그러면 인간에게 두 가지 운영체계 중에 어느 쪽이 더 중요해. 둘 중에 하나만 없어도 생명을 부지 못하니 비중을 따질 수는 없어. 그러나 조건반사 운영체계의 중요성이 다른 동물보다 훨씬 커졌어. 인간에 와서는 생리작용을 하는 무조건반사를 돕기로 했던 보조적인 운영체계의 비중이 기본적인 운영체계 못하지 않게 중요해졌어. 신념을 지키기 위해 생명을 포기하는 인간도 생겼으니까. 한 인간의 인격, 개성 즉 정체성은 조건반사 체계의 반사 성향을 가리켜. 남들이 그 성향을 안다면 그 성향에 대하여 훨씬 적절하게 반사할 수 있지. 그래서 인격이나 개성을 나타내는 조건반사 체계가 무조건반사 체계를 대표하게 돼. 반사 방식을 나타내는 개성이나 인격을 존중하는 만큼 조건반사 운영체계를 존중한다는 거야. 그리고 한 인간이 죽은 후에도 그 인간의 가치는 고기값이 아니라 그의 조건반사 운영체계에 담겨 있던 지혜에 있어.

그런데 하버지, 왜 하나의 인간 행동을 놓고 유전된 것이다, 학습된 것이다 하고 논쟁하는 경우가 많은 거야. 그렇단다. 논쟁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은 고등동물일수록 본능의 범위, 선택 가능한 행동방식들, 가능성을 더 많이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이야. 원숭이가 흉내내기를 잘한다는 것은 공감뉴런이 발달하여 학습 가능성을 많이 가지고 태어났다는 증거야. 여기서 공감뉴런은 감정적인 공명만이 아니라 이성적이 이해나 의지적인 동화 작용까지 아주 폭넓은 조건반사 능력 즉 학습 능력을 뒷받침하고 있어.

그런데 특히 인간의 행동은 사회화 과정에서 학습의 영향을 많이 받게 마련이야. 20여년의 사회화 과정과 그 동안의 학습으로 사회생활에서 독립된 개체로 살아갈 조건반사 체계를 갖추지 못한다면 적절한 조건반사 행동을 못할 수도 있어. 독립하기 위해 20여년의 오랜 준비기간이 필요한 것은 오로지 풍부하고 정리된 조건반사 체계를 갖추기 위해서야. 이를 위해서 인간의 대뇌 피질이 부피도 제일 크고 주름도 제일 많아졌대. 뿐만 아니라 대뇌피질 여러 곳에 공감뉴런이 풍부해서 사회적인 자극이나 조건에도 적절하게 반사할 수 있게 되었대. 그럼, 대뇌피질로만 본다면 인간이 다른 동물보다 아주 많은 학습 능력을 타고난 거네. 그렇지.

그런데 태어날 때부터 대뇌피질이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 조건반사 능력 즉 학습 가능성도 타고난 본능임이 분명해. 그래서 원숭이가 고구마를 물에 씻어먹는 것조차도 타고난 행위 즉 본능적인 행위로 보일 거야. 그러나 다른 원숭이 무리는 대부분은 씻어서 먹을 줄 모른다는 사실로 보아 씻어 먹는 것은 원래의 본능적인 선택지에는 없었던 행동방식이므로 본능과는 구분되는 학습의 결과로도 볼 수가 있어. 이처럼 학습 가능성은 본능이지만 학습 내용은 본능이 아니므로 논쟁이 생긴다는 것을 알게 돼.

아하, 학습 가능성과 학습 결과를 구분하지 못하는 데서 생기는 논쟁이구먼. 그런데 하버지, 미로를 만들어 놓고 한쪽 끝에 먹이를 놓아두면 쥐는 처음에는 냄새를 맡으며 여기저기 헤매다가 결국 먹이에 도달한대. 그러나 이것을 몇 번 되풀이하면 출발점에서 먹이까지 가는 동안 점점 불필요한 행동이 줄어든대. 이걸 조건 반사라고 하잖아. 그러면 조건 반사와 학습은 같은 거야? 조건 반사를 학습으로 이해한 너는 정말로 똑똑하구나. 그래, 조건에 맞게 반사 행동을 할 수 있는 능력이 학습 능력이지.

조건 반사는 한 번 경험한 것을 기억에 남겨 두었다가 새로운 자극이 들어오면 그 자극에 성공했던 이전의 행동방식을 호출하는 거래. 그렇다면 주어진 상황 즉 환경이나 조건에 알맞는 행동방식을 찾아내는 능력이 조건반사 능력이고 결국은 학습 능력이네. 그런데 시행착오를 줄여서 조건반사 능률 즉 학습능률을 올리려면 성공한 경험을 먼저 많이 기억해둬야 돼. 또 주어진 자극이나 조건에 알맞는 행동방식을 빨리 호출하려면 기억된 것이 잘 정리되어 있어야 되고. 결국 인간이 다른 동물보다 조건반사를 잘할 수 있는 것은 기억과 호출을 잘할 수 있기 때문이네.

하버지, 대뇌피질이 학습 즉 조건 반사를 담당한댔잖아. 그럼 공부를 잘 하려면 좋은 머릴 타고나는 것이 중요해 노력을 많이 하는 것이 중요해. 아하, 너도 학습가능성과 학습 결과를 혼동하고 있구나. 홍아야, 둘 다 옳은 말이야. 둘 다 있어야 하니까. 왜 그러니? 네가 필요조건과 충분조건으로 설명해봐. 둘 다 옳다는 것은 둘 다 필요한 조건이라는 뜻이고 그러나 둘 다 있어야 잘할 수 있다는 말은 둘 다 갖춰야 충분 조건이라는 뜻이야. 그렇지. 넌 언제나 똑똑하구나. 하버지의 손자이고 제자로구나. 조건 반사를 잘할 수 있는 대뇌피질과 거기에 노력하여 가치 있는 학습내용을 체계적으로 많이 축적하는 것 두 가지가 다 필요할 뿐만 아니라 둘 다 갖춰야 공부를 잘할 수 있는 충분조건이 되니까 그런 논쟁은 아무 의미가 없는 논쟁이야.

대뇌가 조건 반사를 담당하면 무조건반사는 어떤 곳에서 담당하는 거야? 작은 골 즉 소뇌는 근육운동을 하기 위해서는 조건 반사를 하고 평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반사를 하니까 양쪽 다하는 셈이지. 문제를 해결하려면 어떤 근육들을 사용하여 어떤 동작을 만들어야 하는 지 계획을 세우는 일은 전두엽이 하지만 실제로 동작을 할 때는 작은 골 즉 소뇌에서 근육들을 조절해야 된대. 그러니까 소뇌는 대뇌의 조건반사에 참여하기도 하지만 몸의 평형을 유지하는 활동을 할 때는 무의식중에 무조건 반사를 한다는 거야. 대뇌는 조건 반사를 소뇌는 조건 반사와 무조건 반사를 그리고 숨골이나 등골은 모두 자율신경으로 면역이나 심장 박동, 호흡 ,소화 등의 생리작용을 담당하는 무조건 반사로 생명을 운영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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