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것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사물이 아니라 생명입니다. 이것은 이제 나에게 ‘너’가 되었습니다. 혼자서 살던 나의 공간을 너와 나누어야 했고, 내 멋대로 쓰던 나의 시간을 너에게 할애해야 했지요. 너는 나의 쓰임을 복잡하게 만드는 참 불편한 존재입니다. 당신은 나의 글에서 고양이를 키우는 것의 장점을 읽고 싶을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먼저 사과할께요. 전 저와 함께 사는 이의 불편함에 대해 말하고자 하니까요.
원룸에 살던 때 나와 너의 동거는 시작되었지요. 난 로빈슨 크루소가 프라이데이에게 그러했듯이 너를 만나고 너의 이름을 짓는 일을 가장 먼저 합니다. 나의 것이라는 표식, 나만 온전히 그 의미에 대해 알고 있는 명사를 너에게 붙였지요, 구구, 나의 고양이, 그것이 너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언젠가 <구구는 고양이다>라는 영화를 보면서 느꼈던 마음을 담아서 말입니다. 공원을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그러다 집에 다시 머물고 싶을 땐 머물고. 영화 속 고양이는 어느 무엇도 그리 급할 것 없다는 듯한 걸음걸이로 다시 담장을 탔지요. 영화 속 그 고양이의 자세를 마음에 담아서 이름을 구구라고 지었습니다. 나와 함께 하게 된 너의 생도, 더불어 나의 생도 그러한 자세를 취하게 되면 하는 바람을 담아서.
500그람의 하얗고 아주 작은 고양이. 구구하고 부르면 나를 보고, 놀아달라고 배고프다고 아옹아옹 작은 소리로 울어대는 네가 귀여웠지요. 하지만 작은 원룸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건물이라서 네 목소리가 벽을 타고 다른 사람의 잠자리를 깨게 할까봐 가슴이 덜컥하기도 했어요. 그래서 한 여름 무더운 날에도 문을 열지 못하고 땀을 흘리며 극기 훈련을 하듯 계절을 보내기도 했지요.
너와 같이 동네 공원을 느긋하게 산책하리라는 내 바람은 너에 대해 알지도 못하면서 내가 앞서 꾼 꿈이었지요. 가까운 곳이라도 함께 외출할라치면 네 두 눈과 귀와 분홍 발바닥 살은 더욱더 붉어지고, 네 가슴은 두근반 세근반하지요. 나와 다른 감정의 너를 보면서 이 세계가 너의 눈에는 어떻게 보이는 건지 알 수 없어 망막하지요. 그리고 내가 보는 세계는 다른 생명들이 느끼는 세계 속에 얼마만큼 작은 부분일까 생각하지요.
요 작은 악마. 학교에 제출할 에세이를 쓰는 밤에는 모니터 앞에서 모니터를 가리고 책을 읽을 때면 책갈피용 책 줄을 장난감 삼아 놀면서 책 읽는 걸 방해하지요. 그래서 책들의 끈이 반절만 있을 때가 많아요. 커튼 묶는 끈도 바람이 부는 날이면 구구의 장난감이 됩니다. 물론 큰 창 아래에 놓인 물건들은 엉망으로 흐트러지지요.
사실 이런 너의 습성들은 네가 내게 올 때부터 가지고 있던 것이었지요. 하지만 나는 그것을 곧잘 잊고, 네게 화를 내기도 하고, 짜증을 내기도 하지요. 나는 너를 배려한다고 늦은 밤 나가던 외출을 삼가게 되었고, 불규칙적이던 생활 습관을 되도록 네가 예측할 수 있도록 바꾸려 애를 썼지요. 네게만은 예측가능한 동물이 되어보고자 여전히 노력하고 있지요. 그러나 여전히 나는 내 감정대로 물건을 놓고, 내 마음가는대로 생활을 변화시키고, 움직이지요. 그런 나를 볼 때면 네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요. 너는 여전히 내게 신경이 많이 가는 존재이지만 우리는 어쩌면 공동의 생활 속에서 신뢰를 쌓을 수 있는 존재가 되어가는 실험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지요.
오늘도 의자에 앉아 자판을 치는 내 무릎 위로 네가 풀쩍 뛰어들어 나의 다리 사이에서 잠을 청하네요. 이제 몸무게가 4kg가 되는 너. 난 네가 깰까봐 움직이지 못하다가 다리가 저리고 무릎이 무거워지면 몇 번을 뒤척이지요. 넌 내가 뒤척일 때마다 내 움직임에 따라 자세를 다시 잡고 잠에 들지요. 이 무게는 이제 내가 오랫동안 감당해야할 무게가 된 셈이네요. 더불어 난 내게 부족한 온기를 너로 인해 더하게 되었지요.
‘동거’의 괴로움, 그 괴로움 속에서의 존재 변이, 그 변이의 가치에 대해 생각게 하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