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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대반시대

수니가 사람말을 할 줄 몰라 다행이다

- 숨(수유너머R)

나를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들이 어김없이 하는 질문이 있다. “수니는 잘 있어?” 수니랑 같이 산지 5년째, 서울생활을 오롯이 함께 했으니 사람들이 그리 물어보는 것도 당연하다. 수니는 방황과 불면으로 점철된 내 이십대 후반의 산 증인이다. 아니 증묘라고 해야 하나.

수니가 나를 만난 사건은 그녀에게 있어선 마른 하늘의 날벼락이었을 것이다. 수니에게 나랑 같이 살래, 라고 직접 물어보지는 않았으니. 도시에 사는 동물의 운명은 참으로 폭력적이다. 그들의 삶에 끼어드는 인간의 손길은 사랑과 관심으로 포장되기도 하지만 일방적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수니도 처음 우리집에 왔을 때 침대 밑에 숨어서 한참을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어쩌겠어, 살아야지. 수니는 완벽하게 낯선 영역을 조금씩 제 것으로 만들어나가기 시작했다. 동시에 나도 적응해야했다. 인형처럼 귀엽기만 하면 좋을텐데 자꾸 깨물어대는 수니 때문에 자다가 일어나서 울어버린 적도 있다. 내 손등과 발등은 고양이 손톱자국으로 얼룩져갔다. 수니는 나를 상대로 몸을 부풀리며 적을 위협하는 연습을 하기도 했다. 장판을 죄다 물어 뜯어놔서 손님을 초대하기 민망할 정도가 되어 갔다. 야행성이라 밤마다 우다다다 방안을 뛰어다녀 뜬 눈으로 밤을 지새기도 했다. 고양이라는 생물의 습성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수니도 아마 나랑 같이 사는 게 쉽지 않았을 거다. 나도 호락호락 당하지만은 않았으니까. 장판이나 전선을 물어뜯다가 콧등을 얻어 맞곤 했다. 자꾸 손톱 발톱을 깎아주려고 하니까 짜증도 났을 것이다. 한 달에 한번은 목욕을 시켜주었으니 얼마나 싫었을까. 나는 이제 수니 손톱발톱은 손도 안 댄다. 수니는 내가 잠드는 시간 같이 잠들어준다. 장판도 가끔만 물어뜯는다. 서로가 싫어하는 행동을 하는 횟수가 줄어들어 갔고 우리는 동거인과 동거묘로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수니와의 경험에서 매우 특별하게 기억되는 것이 두 가지가 있다. 한번은 내가 잠들지 못하고 침대위에서 뒤척이고 있을 때였다. 베개에 머리가 닿기만 하면 잠이 드는 체질인데 아마도 무척 괴로웠나보다. 찢어지는 마음을 어쩌지 못하고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누웠다. 불도 꺼놓은 깜깜한 밤에, 온 우주에 나 혼자인 것 같아 어쩌지 못하고 누운 그 밤에, 차분차분, 수니가 고양이 걸음으로 걸어왔다. 그리고 내 옆에 가만히 앉았다. 수니의 레몬빛 눈동자가 고요히 나를 향했다. 조용하고 부드러운 수니의 목소리. 에옹… 나는 아직도 그 밤을 잊을 수가 없다. 수니가 무슨 말을 했는지 이해할 순 없다. 아무도 없던 그 밤에 수니가 내 옆에 있었다는 것을 기억할 뿐.

두 번째 경험은 수니가 출산을 할 때였다. 미처 중성화수술을 하지 않았는데 발정기가 왔다. 수니의 우렁차고 관능적인 울음소리는 마술피리였다. 동네 숫고양이들은 우리집 창문 앞에서 장사진을 이뤘다. 실연의 아픔으로 허벅지를 찌르고 있던 나는 에라, 너만이라도 마음껏 사랑을 즐기렴~하고 방충망을 가위로 잘라주었다. 수니는 쏜살같이 나갔다. 밤새도록 사랑의 유희를 만끽하는 건지, 싸움을 하는 건지 모를 괴성을 지르며 동네를 돌아다녔다. 그 결과 수니는 임신을 했다.

두 달을 채운 후 출산 하는 날. 수니는 그 전날부터 유독 나의 다리에 제 몸을 부비적댔다. 임박한 출산의 예고로 인한 불안 때문이었다. 이내 양수가 터지고 진통이 오기 시작하자 내 무릎 위에서 힘을 주며 끙끙대기 시작했다. 그 때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더라. 중성화 수술 미리 해줄걸, 그날 밤 나는 왜 독거처녀의 외로움을 애꿎은 수니에게 투사했을까 등등. 대여섯 시간의 진통 끝에 수니는 다섯 마리의 새끼를 낳았고 그 중 두 마리는 내가 탯줄을 잘라주었다. 그런데 출산 후 수니가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출산 전과 후를 가르는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었다. 당연히 밥주고 똥치워주는 사람의 레벨과 지 새끼를 받아준 사람의 레벨은 다르겠지.

사람들도 특별한 경험들을 통해 친밀한 관계로 발전한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사람과 고양이가 같지는 않다. 조금 더 생각해보고 얘기하자면, 나는 사람 친구보다는 고양이와 사는 것이 더 좋다. 왜냐하면 편하기 때문이다. 너무 솔직했나? 여기서 말하는 편하다를 오해하시지 말길 바란다. 앞에서도 충분히 이야기했듯이 고양이와 함께 사는 것은 불편하다. 많은 것을 감수해야 한다. 털이 많이 날리기 때문에 청소도 두 배, 세 배로 해줘야 한다. 매일 밥을 챙겨줘야 하고, 매일 화장실 모래를 갈아주어야 한다. 고양이가 요구해서라기보다는 내가 그와 함께 살기 위해서는 그 노동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양이와 사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집사라고 표현한다. 집사들은 고양이에게 굴종(?)하면서도 희열을 느끼는 이상한 존재다. 그러면 무엇이 편하다말인가?

수니는 나에게 무엇인가 되어주기를 요구하지 않는다. 나도 마찬가지다. 되어주기를 요구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수니는 사람말을 할 줄 모르고, 나는 고양이말을 못 알아듣는다. 수니와 나 사이에는 소통불가능, 이해불가능으로 인한 단절의 공간이 유유히 흐른다. 우리는 서로에게 요구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해시켜야한다, 이해하여야 한다, 너는 나의 무엇이 되어주어야 한다, 등으로 서로를 괴롭히지 않는다. 다만 내가 너에게 하고 싶은 것, 할 수 있는 것을 깜냥껏 할 뿐이며 그 속에서 오는 기쁨이 고양이와 나를 묶어주는 끈이 된다. 수니가 사람말을 할 줄 몰라 다행이다. 내가 고양이말을 못 알아듣는 것도 수니에겐 다행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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