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문학의 빛1-소셜 네트워크, 신화의 종언

- 심보선

사회 연결망Social Network 연구 분야는 사회학에서 오랫동안 막강한 위세를 떨치고 있다. 내가 공부를 했던 대학원에는 연결망 분야의 대가들이 포진해 있었다. 우선 해리슨 화이트Harrison White라는 일흔이 넘은 네트워크 이론의 대가가 있었다. 나는 그의 수업을 청강했는데, 학생 중 대다수가 그가 도무지 뭔 소리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단지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학생 중 하나가 그를 “헤이, 해리”라고 부르자, 그가 “음, 시대가 변했어. 옛날에는 다들 나를 화이트 교수님Professor White이라고 불렀는데 말야”라고 말해서 순간 분위기가 썰렁해졌다는 것 정도다. 비교적 젊은 사람 중에는 피터 베어만Peter Bearman이 있었다. 그는 네트워크 방법론을 역사, 의료, 종교 등의 다양한 분야에 적용한 중견 이론가였다. 베어만은 내가 화이트 교수의 수업을 들었다고 하니까 “나는 그 양반이 뭔 소리를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어”라고 말했다. 그때 나는 어찌나 반가웠던지 “미 투!”하고 외치고는 그를 와락 끌어안을 뻔했다. 그리고 던컨 왓츠Duncan Watts가 있었다(얼마 전 그의 책 『상식의 배반Everything is Obvious』이 국내에 소개됐다). 그는 네트워크 분야의 떠오르는 스타로 1960년대의 6단계 분리 이론Six degree of separation을 인터넷에서 실험하여 재해석하고 보완한 것으로 유명하다. 왓츠가 부임한 첫 번째 학기 개강 파티에 그가 드디어 나타났을 때가 떠오른다. 과장해서 기억하자면, 나는 그 자리에서 사람들이 나눈 대화들에서 “천재”라는 단어가 빈번히 등장하는 것을 엿들을 수 있었는데, 그것은 예외없이 그들이 던컨 왓츠에 대해 수군거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연결망 이론에 대해 처음부터 시큰둥해 했다. 너무나 당연하고 상식적인 주장을 복잡하고 세련돼 보이는 수학적 모델과 방법론으로 치장해서 주장하는 것이 연결망 이론의 실상인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수 학생들은 연결망 이론을 거의 숭배하다시피 했고 나는 대세를 마지못해 따라가는 것처럼 연결망 이론을 집중적으로 다루는 베어만 교수의 수업을 수강했다. 한 학기 수업을 나름 충실히 듣고 기말 페이퍼로 예술 세계 내부의 연결망을 분석하는 연구 계획서를 제출하였다. 나는 베어만 교수의 평가를 매우 궁금해 하고 있었다. 내가 과연 연결망 이론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사실은 연결망 이론을 배척한다고 해도 그것을 충분히 이해한 후 그러고 싶다는 알량하고 유치한 자존심 같은 것도 없지 않았다. 결과는 ‘A 마이너’였다. 일반적으로 대학원 수업을 들으면 교수는 기말 페이퍼에 커멘트를 붙여서 돌려주곤 했는데, 이상하게도 베어만 교수는 그러질 않았다. 나는 한참을 기다리다 베어만 교수의 연구실을 방문하여 그에게 커멘트가 달린 페이퍼를 돌려줄 것을 부탁했다. 그는 알았다면서 다음 주 쯤에 우편함에 넣어 놓겠다고 했다. 그러나 한 주가 지나서 가보자 우편함은 비어 있었다. 나는 조금 더 기다리기로 했다.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베어만에게 이메일을 보내서 페이퍼에 대해 문의를 하였다. 그는 내게 답을 하지 않았다. 다시 메일을 보냈다. 역시 답이 없었다. 조금은 화가 났지만 너무 닦달하는 것 같아 조금 더 두고 본 후 조치를 취하자고 생각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왜 그랬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비행기 안에서 학생들의 페이퍼를 채점을 하다 실수로 그것을 죄다 객실에 놓고 내리고 말았다. 그는 결국 학생들 모두에게 A 마이너를 일괄적으로 부여하는 폭거에 가까운 조치를 취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더더욱 분노했다. 적어도 학생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말해줘야 하지 않는가! 그 사건 이후로 연결망 이론에 대한 나의 관심은 사그라졌다. 마치 베어만이 연결망 이론을 연구하는 학자의 표본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런 인간이 소위 대표 학자로 칭송되는 분야라면 빤하다!’라는 식의, 말도 안 되는 삐뚤어진 심사로 연결망 이론에 대한 반감을 증폭시켜나갔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나는 지금도 그 기말 페이퍼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베어만 교수가 그 기말 페이퍼를 분실하지 않고 충실히 코멘트를 해서 돌려줬다면 나의 전공 분야는 바뀌었을 지도 모른다. 말하고 나니 좀 양심에 거리낀다. 솔직히 그러진 않을 것 같다. 어쨌든 당시에 읽었던 논문 중에 Helmut K. Anheier와 Jurgen Gerhards가 쓴 “문학적 신화와 사회구조Literary Myths and Social Structure”라는 논문이 기억난다. 이 논문은 독일의 어느 도시에 거주하는 고급문학 작가들 사이의 연결망 구조를 밝히고 그 구조를 문학적 신화, 소위 작가 숭배 신화와 연관시켜 분석하였다. 작가들 사이의 연결망은 대략 다음의 그림처럼 나타났다.

위 그림은 내가 논문을 읽고 상상을 해서 그린 것인데 저자들의 의도를 정확히 담아내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요약하자면 가운데 중심부Center에는 저명 작가들이 존재한다. 이들은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지만 정작 상호간에는 연결되지 않은 개인들로 고급문학계 내부에 존재한다. 소위 독야청청 유형의 작가들이라고 볼 수 있다. 중심부 주변에는 저명 작가들과 연결된 일군의 개인 작가들이 존재한다. 이들은 저명 작가들과 친분과 교류를 나누는 중견 작가들first junior이라 할 수 있는데 역시 상호 간의 연결은 약하다. 그 다음 주변 그룹은 저명 작가나 중견 작가들과는 연결되지 않은 채 자기네들끼리 교류하며 중심부에 도전하는 신예 작가second junior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마지막 주변부에는 무명 작가들이 엘리트와 연결돼 있거나 혹은 아무하고도 연결되지 않은 채, 인정받지 못하는 외로운 개인들로 존재한다. 논문의 저자들에 따르면 이러한 문학 세계의 관계적 구조가 문학 신화와 상응한다. 중심부의 저명 작가들을 둘러싼 소위 단독자homo singularis’, ‘고독한 작가’, ‘예언자’ 등의 신화는 숭배의 빛을 일방적으로 받으면서 자족적 개인으로 존재할 수 있는 그들의 엘리트적 지위에서 기인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중심으로부터 배제된 채 작은 서클로 존재하면서 중심에 도전하는 신예 작가들에 상응하는 것은 소위 ‘궁핍한 시인poor poet’, ‘인정받지 못한 천재misunderstood genius’ 등의 신화이다.

나는 이 논문을 읽고 매우 흥미로웠다. 하지만 동시에 의문이 들기도 했다. 나는 그 의문을 연구 계획서에 담아냈다. 90년대 초반에 독일의 어느 한 도시의 문학계에 존재했다는 저러한 연결망이 과연 2000년대의 문학계에도 여전히 존재할까? 또 다시 십년이 흐른 지금에 와서는 다음과 같은 질문이 추가된다. 특히 한국에서는 저러한 연결망이 존재한다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하지 않은가? 나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위의 그림을 대체하는 문학계 내부의 연결망을 아래와 같이 제시해본다.

위 그림의 연결망 구조는 무엇을 뜻하는가? 더 이상 중심-반주변-주변이 어떤 패턴을 통해 연결되는 구조가 문학계 내부에 뚜렷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쉽게 말하면 많은 작가들이 서로를 알고 사교를 하고 교류를 한다는 뜻이다. 그만큼 문학계의 연결망이-실질적인 친교의 관계망은 아닐지라도-촘촘해졌다는 사실이다(위의 그림은 더 촘촘하게 관계의 밀도가 그려져야 했으나 손으로 직접 그리느라 귀찮기도 하고 손가락이 아프기도 해서 끝까지 그리지 못했다). 왜 그렇게 됐을까? 무엇보다 제도적 행위자들의 등장과 그들의 증가하는 영향력이 가장 핵심적인 변수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는 저명 작가와 무명 작가가 문예창작과의 선생-학생 관계로 바로 연결된다. 또한 출판사의 편집자와 언론사의 기자, 잡지사의 편집 위원 등을 통해 작가와 작가, 작가와 기자, 작가와 편집자, 작가와 평론가가 연결되기도 한다. 매해 양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이들 매체들이 주최하는 문학상 행사에 가면 저명 작가, 중견 작가, 신예 작가, 무명 작가들을 비롯하여 편집자, 평론가, 기자 등 거의 모든 종류의 문학적 행위자들이 총출동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 문학계의 연결망 구조는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와 같은 소셜 미디어 네트워크의 구조, 즉 모두가 모두에게 수평적으로 연결되고 누구나 ‘형식적으로’ 쉽게 친구가 되는 양상을 닮아가고 있다. 요컨대 제도적 장치dispositive의 영향 아래에서 문학계의 연결망이 구성되는 것이다. 연결망의 변화와 함께 고립과 숭배, 서클과 도전 등 과거의 사회적 관계 및 행동 양식과 결합돼 있던 문학적 신화들은 사라지고 있다. 소위 신비로운 작가, 위대하고 고독한 은둔 작가, 예언자적 아우라를 가진 원로, 도전하는 신참, 인정받지 못하는 천재, 궁핍하고 가난한 천재 시인 등에 대한 낭만적 소문과 담화가 희박해지고 있는 것이다. 간혹 신화적 제스처나 말들을 구사하는 작가들이 있긴 한데, 주로 행사 뒤풀이나 언론사나 잡지사가 마련한 술자리, 심지어 트위터 상에서 그렇게 하면서 주변 사람들이나 ‘팔로워’들과 ‘소통’을 하곤 한다. 그것이 연극적이건 혹은 진심을 담고 있건, 나에게 그러한 제스쳐나 말들은 뭐랄까, ‘문학 신화의 페스티쉬’ 정도로 보일 따름이다.

일부의 글을 마무리를 하기 전에 한가지만 더 이야기하겠다. 나는 이미 제도적 행위자들이 매개하고 중재하는 수평적 연결망이 문학계의 관계적 구조를 지배하면서 문학 신화는 사라졌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수평적이라는 말은 평등하다는 말과는 명백하게 다르다. 우리는 문학 신화의 소멸과 함께 작가의 권위도 사라져가는 것을 목도한다. 그러나 권위가 사라졌다고 해서 인기와 명성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촘촘한 연결망 속에서도 여전히 중심-반주변-주변의 위계는 존재한다. 비록 모두가 모두와 연결돼 있지만 그 안에서 제도적 장치들로부터 발산되는 선망의 빛-숭배의 빛이 아니라-은 ‘이 시대의 멘토’와 같은 광고 카피의 도움을 받아 특정 행위자들에게 집중된다. 더구나 모두가 모두에게 노출돼 있기 때문에, 즉 사회적 거리가 줄어든 만큼 ‘에고 게임’의 심리적 다이내믹이 격화되면서 그 같은 선망의 빛을 자기 쪽으로 선회시키기 위한 경쟁 또한 증가할 수밖에 없다. 결국 문학계는 마치 소셜 미디어에서 그러는 것처럼 겉으로는 ‘좋아요like it’를 누르고 리트윗을 하고 팔로우를 하지만 속으로는 자신을 알리고자 하는 승부욕에 불타는 개인들의 연결망으로 숨 쉴 틈 없이 촘촘해지고 있는 것이다. -2부에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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