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잃어버린 관계를 찾아서

- 남창훈(면역학자)

무엇을 안다는 것은 무얼 뜻할까? 배낭여행이 되었건, 기획관광이 되었건, 여행을 하고 난 뒤 사람들은 어느 장소에 대해 안다고 생각한다. 그곳을 오감을 동원하여 직접 체험했다는 사실이 이러한 판단을 가능케 하는 것 같다. 하지만 과연 몇 시간 혹 며칠 동안의 체험을 통해 무엇을 제대로 아는 것이 가능할까? 여행뿐만이 아니다. 요즘 인터넷의 위키피디아를 통해 사람들은 아주 홍수 같은 정보를 아주 손쉽게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어떤 사건과 인물, 장소에 구애 받지 않고 우리는 간단한 검색어 만으로 그 정보를 얻고 그를 통해 그 대상에 대하여 알게 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빅뱅’이나, ‘테라토마’와 같은 아주 전문적인 지식에서부터 ‘파리’나 ‘프라하’와 같은 지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아주 실용적인 지식까지 우리는 이러한 수단을 통해 아주 손쉽고 빠르게 체득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이렇듯 아주 광대하고 끝없는 지식과 정보의 바다 속에 잠겨 있다. 광범위하게 조성된 사회간접자본과 국가간 경계를 허무는 다양한 조치, 초고속 교통수단의 대중화, 인터넷을 통한 가상공간의 형성, IT분야의 급속한 발전 등이 맞물려 우리는 한 개인이 세상을 실시간으로 마주 볼 수 있는 시대에 살게 된 것이다. 그 가운데 ‘안다는 것’의 정의가 아주 빠른 속도로 바뀌고 있다. 이 변화는 어떤 경향을 내재하고 있는데 그것은 갈수록 우리의 지식이 피상적이고 파편화되어 간다는 사실이다. 득템 하듯 세상을 구성하는 퍼즐 조각 조각 들을 습득하지만 막상 그 퍼즐이 모두 맞춰진 세상의 모습에는 별 관심이 없다. 어느 곳에 침착하여 깊이 있게 파고 들어가는데 투여되어야 할 에너지가 넓은 정보의 바다 위를 빠른 속도로 유영하는데 쓰이고 있다. 우리에겐 어떤 사물이나 대상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그 특질을 꿰뚫어 볼 시간도 그리 해야 할 이유도 없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하기에는 너무 많은 사물과 대상들이 우리의 오감을 자극하고 우리의 관심 영역 안에 들어와 버렸다. 사물과 대상을 피상적으로 알게 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어떤 사물이 다른 사물과 갖게 되는 관계성을 소거한 채 분절화되고 파편화된 대상으로서 사물을 인식하는 경향을 파생시킨다. 이렇게 얻어진 지식은 참 무기력하고 여러모로 왜곡되어진 것이기 십상이다. 그러한 지식 가운데 안주하게 될 때 세상은 어떤 유기적인 사물들이 서로 연결된 총체이기 보다 서로 무관한 수거물들로 차곡차곡 쌓여진 창고의 모습에 가깝게 된다.

인식론에서 사물을 인식하는 과정은 ‘보는 것’에서 ‘행동하고 반응하는 것’으로 그리고 다시 대상으로부터 어떤 반작용을 받고 이에 대응하는 일련의 순환을 내포하고 있다. ‘사물을 인식하는 것’과 ‘그 사물에 대한 지식을 지니는 것’ 사이의 거리는 대부분의 경우 너무 멀어서 서로 무관해 보이기까지 하다. 그렇다고 우리가 어떤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니다. 지식을 습득하고 상식의 폭을 넓히는 것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도움을 준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대상에 대하여 관심을 갖도록 만드는 계기가 될 수도 있고, 어떤 대상을 심도 있게 이해하기 시작했을 때 그 대상과 다른 대상간의 숨겨진 연관을 알아채게 하는 힌트가 되기도 한다. 문제는 습득된 지식이 이러한 역할을 수행할 때에만 유의미한 수단일 수 있다는 것을 우리가 망각할 때 생긴다. 지식은 살아 있지 않다. 그것은 우리의 창의적인 호기심과 서로 연결 되었을 때 우리가 탐구의 발걸음을 옮기는데 도움을 주는 교통수단이거나 나침반과 같이 기능할 따름이다. 살아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이며 우리 자신과 관계하는 세상의 대상들이다. 호기심이란 우리가 살아 있다는 다른 표현이다. 아무리 많은 계기들 속에서 다양한 과정을 통해 우리가 감각한다 할지라도 우리가 그 미지의 대상을 향해 한걸음 발을 떼지 않는다면 우리가 본 것은 우리에게 인식되어지지 않는다.

호기심으로부터 출발한 과학연구가 필요한 것은 이러한 사정들 때문이다. 연구는 미지의 원시림에 처음 발을 들여 놓는 것과 꼭 닮았다. 우리는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잘 모른다. 눈을 감고 손을 더듬어 코끼리를 인지해 가는 과정처럼 질척거리는 원시림에 우리의 오감이 직접 가 닿아야 그 안에 있는 실체들에 조금씩 접근하기 시작할 수 있다. 기이한 모양의 나무들과 그 안에 둥지를 튼 커다란 새, 형형색색의 꽃들로부터 풍겨 나오는 향기들, 땅이 어떻게 패였고, 어디쯤에서 샘물이 흘러나오는지 우리는 그 안에 발을 들여 놓아야 알 수 있다. 원시림에는 길이 없기 십상이지만 우리는 천천히 발걸음을 떼며 길을 만들어 뒤에 오는 사람을 배려하기도 할 것이다. 얼마를 가다가 잠시 멈춰 휴식을 취한 곳을 사람들은 이렇게 저렇게 이름 붙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이렇게 길을 가는 방향이 어떤 뚜렷한 목적지를 향한 것은 아니다. 원시림을 지나 무엇이 나올지 모르는데 목적지를 정한다는 것이 부질없을 것이다. 다만 우리는 곳곳에 펼쳐진 휘황찬란한 장관들 속에 감탄하고 행복해하면 된다. 곳곳마다 우리는 배낭에서 카메라를 꺼내 길가다 만난 풍경을 그 안에 담고자 하는 유혹을 받을 것이고, 그 기록은 다른 사람들에게 이곳을 설명하는데 유용한 자료로 쓰이기도 할 것이다. 길을 가다가 언덕을 만나고 또 어느 정점을 만나 그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더 먼 곳을 조망하는 일도 있을 것이다. 그 곳에서 우리는 지나온 길이 어떻게 생겼는지 새삼 다시 돌이켜 보며 그것이 기존에 길 안에서 느꼈던 모양과 다르다고 놀라기도 할 것이고, 앞으로 가야 할 길이 어떤 형세를 지녔는지 가늠해보기도 할 것이다. 자연과 세상을 탐구한다는 것은 이렇게 미지의 장소에 한걸음씩 발을 들여 놓는 것과 닮아 있다. 그런데 요즈음 느끼는 것은 탐구의 목적이 갈수록 뚜렷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이뤄지는 탐구의 대부분은 그것이 돈이 된다는 조건 아래서 허가되고 수행 되어지며 평가되어진다. 돈이 아닐 경우에도 노벨상이나 세계적 명성 등이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탐구는 기존 미지의 탐험가가 일궈 놓은 길 위에서 열매만 골라 따먹는 비열함을 그 속성으로 하고 있다. 문제는 그 비열함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탐구는 그 뚜렷한 목적 지향성이라는 속성으로 말미암아 아주 뚜렷한 편향을 지니게 된다. 그 편향은 우리를 원시림 가운데 어느 곳에 몰입하게 만들고, 갈 길을 혼동하게 만들고, 종국에는 그곳을 착취하고 파괴하도록 만든다. 뚜렷한 목적 없이 호기심에 기반하여 이뤄지는 탐구는 탐구하는 대상과의 깊은 교감을 대전제로 하는 것이다. 탐구의 목적을 굳이 기술하자면 ‘자연을 이해하고 그 속성을 통해 우리 자신을 알아 가는 것’ 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부를 축적하고 이를 재생산하기 위해 자연과 세상을 탐구한다면 우리는 대상을 어떻게 활용하면 될지에만 관심을 집중시킬 것이다. 이 일련의 편향된 과정들을 통해 대상과의 교감을 잃는 순간 우리는 한가지 중요한 것을 잃게 된다. 그것은 탐구를 하는 주체 즉 우리 인간이 이 세상 가운데 지니는 의미가 무엇인지 영영 잊어버리고 종국에는 그러한 주제에 대한 관심조차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악순환을 통해 어느 날 우리는 괴물이 되어 버린 자연과 세상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그것은 필연적인 귀결이다. 자연과 세상에게는 그것이 가야 할 순리의 길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지니고 있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그 길을 가로막고 더 많은 착취와 파괴를 일삼을 것이다. 우리가 그들과 어떻게 관계 맺어야 할지 까마득히 망각한 채 이루어지는 이러한 행위들은 한가지 거대한 망상 아래서 이뤄지는 것이다. 바로 그것은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잘못된 신화로부터 기원한다. 창세기의 오역으로부터 기인한 이 신화를 통해 우리는 세상을 정복하고 이용하고 소모할 대상으로 여겨왔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이러한 망상의 첨점 위에 서 있다. ‘돈이 된다면’ 이라는 잘못된 집착이 우리를 파국으로 몰고 가고 있다.

어릴 적 누구에게나 있던 작은 세계를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잃어 버린 채 살고 있다. 그 대신 우리는 거대한 창고 같은 세상을 매일 매일 마주 한 채 살고 있다. 그 거대해 보이는 세상은 사실은 ‘가상의 진실’이기 십상이다. 우리가 그 세상을 조금씩 더 알아간다고 생각하는 순간 사실 우리는 그 대상으로부터 조금씩 멀어졌던 것은 아닐까?. 앙상한 지식의 골조를 통해 관계가 망각되거나 소거된 채로 이해된 세상은 단지 그것이 불충분하게 이해되어졌기 때문에 문제인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그 이해의 과정이 그들을 소외시키고 대상화시키고 착취하는 것이었기에 문제인 것이다. 까닭에 지금 서둘러 각성하고 다시 마음 먹어야 할 것은 ‘어떻게 세상과 관계해야 할지’와 ‘어떻게 세상과 교감해야 할지’와 같은 주제들일 것이다. 관계와 교감의 통로를 깨트려 부순 것은 우리 인간이다. 그것을 회복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어느 날 괴물이 되어 버린 그 대상들과 조우할 것이다. 그리고 그 보다 더욱 무서운 것은 바로 어느 날 거울 앞에서 바라 본 우리의 모습 역시 괴물의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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