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꼼

김기덕 <아리랑>에서 <피에타>까지 무슨 일이?

- 황진미

김기덕 감독이 TV 예능프로에 나온다. 이상할 건 없다. 김기덕 감독은 <아리랑>의 어떤 버전에서 예술가적 창작욕망은 물론이고 대중의 사랑을 받고 싶다는 욕망을 밝히기도 했으니까. <아리랑>이후 두 편의 영화를 찍었다. <아멘>은 개봉도 하지 않고, 영화제에서 2주간 상영한 뒤 DVD 등을 출시하지 않아 다시 볼 수 없다. 반면 <피에타>는 베니스영화제 출품과 함께 떠들썩하게 개봉하였다. 김기덕 감독은 여느 상업영화감독보다 더 적극적으로 방송에 나와 홍보에 열심이다. <아리랑>이후, 무엇이 달라졌나.

김기덕 감독이 국내 언론에 이렇게 많이 나온 적이 있었나. 있다. 2006년 <시간> 기자시사회 때 더 이상 국내개봉은 없을 거란 발언과 <괴물>의 스크린 독점에 쓴 소리를 했을 때다. <사마리아>와 <빈집>으로 국제영화제를 휩쓸었지만, 이후 <활>은 1주일간 단관개봉으로 끝났다. 국내보다 해외관객이 더 많은 감독. 김기덕 감독은 이에 대한 서운함과 자괴감을 표현한 거였지만, 여론은 들끓었다. ‘관객과 소통하지 못하는 영화제용 감독의 열등감 폭발’이란 비난이 쏟아졌다. 며칠 후 김기덕은 과하게 사죄함으로써 ‘열등감이 낳은 괴물’이란 수식을 기꺼이 껴안았다. <시간>과 <숨>과 <비몽>은 존재와 윤리에 관한 철학적 질문을 시적 영상으로 표현한 영화들이었지만, ‘난해하다’는 꼬리표만 더 얻었을 뿐, 관객의 호응을 얻진 못했다. 오히려 김기덕 감독의 조감독 출신들이 감독으로 입봉 해 작품성과 대중성을 고루 갖춘 작품들을 찍음으로써, 김기덕 감독은 신인감독을 키우는 제작자로서 더 걸맞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이 화근이었다. 삶과 죽음, 의식과 무의식을 넘나드는 작품으로, 감독의 예술적 욕망을 한껏 담은 영화 <비몽>을 찍다가 여배우가 죽을 뻔한 사고. 그리고 익히 알려진 후배 감독의 이탈. 김기덕 감독은 스스로 유폐되었다. 말이 좋아 은둔이지, 창작욕으로 들끓는 감독이 우울과 자폐에 갇혀 영화를 찍지 못하는 상황, 더 이상 영화를 찍지 못할 수도 있다는 공포와 싸우는 상황은 지옥이다. <아리랑>은 그 지옥을 생생하게 담았다. <아리랑>은 김기덕의 자아가 우울한 예술가(1)와 조언하는 상담가(2)와 관조하는 관찰자(3)와, 이 모든 국면을 종합하고 편집하여 하나의 영화로 만드는 창작자(4)로 분화해 만든 영화이다. 예술가라면 누구나 겪는 내부 분열. 열등감과 자의식 과잉, 창작의 강박과 주목받고 싶은 욕망, 여기에 증오까지. <아리랑>은 그 모든 정념을 밑바닥까지 내려가 보여준다. 후반부 김기덕은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에서 속죄를 위해 돌을 매달고 겨울 산에 오르던 자신의 모습에 눈물을 쏟는다. 증오를 해소하기 위해선 그만큼의 치열한 퍼포먼스가 필요함을 깨달고, 그는 상징적 살인과 자살을 감행한다. 카메라는 총이 되어 증오의 대상과 자신을 쏴 죽였고, 김기덕은 증오와 자폐로부터 마침내 헤어난다. <아리랑>은 격렬한 은둔의 기록이자, 스스로 은둔을 돌파하는 치유의 기록이고, 이를 통해 다시 칸영화제를 밟는 희귀한 재기의 산 기록물이다.

<아멘>은 <아리랑>을 찍으며 터득한 셀프카메라 방식으로 여배우 한명과 단 둘이 찍은 극영화이다. 이명수라는 남자를 찾아 유럽을 해매는 여자. 방독면을 쓴 사내는 그녀를 겁탈하여 임신시키고 그녀의 물건을 훔쳐간다. 방독면 사내는 여자의 주위를 맴돌며, 그녀가 곤궁해질 때마다 그녀의 물건들을 하나씩 되돌려준다. 그녀는 낙태를 결심하지만, 사내는 “아이를 낳아 달라” 간청한다. 여자는 망설이지만 어느 순간 깨닫는다. 방독면을 쓴 사내가 바로 자신이 찾아 헤매던 이명수라는 것을. 영화는 성당의 성모상을 유심히 바라보는 그녀를 통해, 방독면을 쓴 사내가 다름 아닌 신(神)의 형상이며, 그녀가 신의 아이를 잉태하고 이에 순명하는 성모의 새 판본임을 암시한다. 영화의 마지막, 그녀는 사내의 방독면을 쓰고 손으로 프레임을 지어 카메라를 응시함으로써 마침내 자신이 사내와 합일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녀가 신의 불가해한 명령을 받아들임으로써, 주체이자 신성을 획득한 것이다. 영화는 간명하고 시적이다. 대사도 거의 없이 명상과 암시로 이루어져있다. 김기덕은 최소한의 만듦새로 고도의 추상성을 지닌 영화를 만들 수 있음을 실험을 통해 입증하였다. 그러나 김기덕 감독은 <아멘>을 스스로 유폐시켜 버렸다. 이게 아니라는 듯이.

<피에타>는 <아멘>에 비해 훨씬 말이 많고, 구체적인 설명이 가득하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가 지속적으로 보여주는 속죄의 메타포를 아는 관객이라면, 진부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악마에게 복수하는 방법은 <악마를 보았다>에서처럼 더 큰 악마성으로 맞붙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불어넣은 후 그것을 갈갈이 찢는 것이다. 애착, 공감, 연민 등 사람의 마음이 생긴 악마는 속죄를 위해 스스로를 벌한다. <악마를 보았다>가 가족이 보는 앞에서 악마를 죽인다. 복수의 방향이 틀렸다. <피에타>는 악마의 가족이 되어 악마 앞에서 죽는다. 맞는 복수의 방향이다. <피에타>는 철거직전의 청계천 공업소라는 구체적인 시공간을 배경으로, 직설적인 서사로 복수와 속죄를 말한다. 18편의 영화를 만들면서 점점 정제시킨 시적 표현을 포기하고, 데뷔작 <악어> 시대로 돌아간 느낌이다. 평론가의 관점에선 명백한 퇴행이나, 김기덕은 대중을 향한 자신의 행보가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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