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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강만필

독일 공연을 다녀와서(4) -아름다운 우정, 괴테와 실러.

- 김융희

이번 독일 방문중 가장 가보고 싶었던 곳은 바이마르였다. 바이마르는 라이프치히에서 고속버스로 한 시간여의 거리에 있다. 인구 6만 여의 “독일의 작은 파리”라 불리는 문화 예술의 도시이다. 특히 중세엔 문예의 중심지로써, 괴테를 중심으로 문학, 음악, 조형미술에 관계된 위인들이 활동했던 곳이다. 일찍이 20세기 초에 조형예술의 직업학교인 바우하우스, 리스트 음악학교가 문을 열었고, 1919년에는 독일 최초의 민주주의 헌법인 “바이마르 헌법”이 제정되어 바이마르 공화국이 탄생된 곳이다. 그 작은 도시에는 지금도 세계에서 모여든 관광객들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나의 바이마르에 대한 관심과 인연은 좀 이색적이며 꽤 오래전 부터였다. 첫 째는 예술과 삶의 일치에 자극제로 건축과 디자인에 일대 변혁을 일으킨 현대 미술운동의 중심지요, 건축, 디자인, 공예를 아우르는 종합 예술학교인 “바우하우스”가 처음 바이마르에서 시작된다.
시대를 앞서간 러시아의 전위미술운동을 이끌었던 아방가르드의 핵심 구성원들이 갑작스런 국가 체제의 변화로 인한 활동 제약으로 칸딘스키, 배프스너,등 많은 멤버들이 결국 고국을 등지고 유럽 미국 등지로 자발적 망명길에 오르게 된 것이다.
1919년 발터그로피우스(Walter Gropius)가 칸딘스키등, 러시아의 아방가르드들과 시작한 바우하우스의 “예술이 대중의 생활속으로 들어와야 한다”는 주장은 세계 미술에 영향을 끼첬고, 이후 바우하우스의 영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기능에 맞는 디자인이 가장 아름답다”는 바우하우스의 공예미학은 미국의 추상미술에도 영향을 끼쳤다. 이같은 미술 경향의 변화는 러시아의 아방가르드로부터 시작되어 독일의 바우하우스를 통한 전세계에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바이마르는 현대미술의 시원지이다.

바우하우스에 대한 관심이 나의 직업에서 오는 생활속의 체험이었다면, 두 번째의 또 다른 관심은 나의 어린 시절 추억에 얽힌 오랜 감동의 체험에서 연유한다. 나는 벽촌의 시골에서 중학교를 다녔다. 서점은 물론 문화 혜택이란 5일마다 열린 오일장의 난전이 전부였었다. 장날엔 시장 한켠에 두세 평의 넓기로 책을 펼쳐 팔고 있었다. 학교엔 도서관도 없는 처지에, 이것이 교과서 이외의 책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던 것이다. 나는 시간만 되면 장날엔 어김없이 책 곁에 쪼그리고 앉아 책을 구경하는 것이 큰 기쁨이요 즐거움이였다.
책은 춘향, 흥보전과 같은 촌인들의 읽을거리인 옛 이야기책들이 주류를 이루었고, 만화와 어설픈 장정의 문학서적들, 그리고 성인용 ‘야담’과 중고생을 위한 ‘학원’과 같은 잡지도 만날 수 있었다. 읽고 싶고, 갖고 싶었던 모두가 부러웠던 책들이었다. 우리들에게 인기였던 잡지 ‘학원’이 나올 때가 되면 나는 밤잠을 설치며 기다리기도 했다. 가끔씩 어렵게 장만한 책들은 보물처럼 애지 중지, 수시로 꺼내 읽어서 닳아 더러는 낡아 빠지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행복한 추억이다. 그 시장에서 구입해 읽었던 책들, 특히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레미제라블” “렌의 애가” “보물섬”“괴도 루팡” 등…, 순정 모험 탐정류의 문학서적들은 반 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나의 가슴을 설레게하는 아름다운 일로 고이 간직되고 있다.

[젊은 베르테르는 오월의 봄날 아름다운 자연에 둘러싸인 조그만 마을에서 법관의 딸인 로테를 만나며 알게된다. 로테에게는 알베르토라는 약혼자가 있었다. 베르테르는 사랑하는 로테와 이룰 수 없는 사랑을 잊기 위해 작별 인사도 없이 홀연히 다른 곳으로 떠났으나 결국 단념치 못한 체 다시 돌아왔다. 그러나 로테는 이미 알베르토와 결혼해 있었다. 베르테르는 알베르토에게 권총을 빌리러 갔으며, 로테는 먼지를 턴 권총을 그에게 건네준다. 어느 겨울의 한밤중, 베르테르는 그 권총으로 자살을 한다.] 감정이 가장 왕성한 시절, 밤을 지세워 가슴 조이며 읽었던 책으로 아직도 내 기억에 생생히 남아있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줄거리이다. 괴테는 자기가 쓴 이 작품을 두고 “만약 일생중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자기를 위해서 쓴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시기가 없다면 그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라고 했다. 나폴레옹도 전장에서 일곱 번을 읽었다는 책이다. 괴테는 만인들의 청춘상으로 영원한 명작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비롯한 ‘파우스트’, ‘빌헤름 마이스터’등과 더불어 주옥같은 많은 시를 쓰면서 평생을 활동했던 곳이 바이마르이다.

독일 공화정의 바이마르 헌법과 바우하우스의 탄생지이며, 대 문호 괴테의 활동 무대였던 바이마르는, 내가 알고있는 가장 아름답고 진실한 우정의 현장으로 영원히 기억될 곳이다. 그 숭고한 우정의 현장을 직접 밟아보고 싶었던 생각이 이번 방문으로 이루어지라는 생각은 전혀 안했다. 그런데 바이마르가 이번 우리의 답사지역에 들어있었고, 다른 지역의 답사와는 달리 대강의 설명을 마친 가이더는 여기선 모두가 각자 자유롭게 시간을 보내라는 것이었다. 일행들과는 좀 유다를 수 있는 나의 관심에 대한 배려 같기만 했다. 우선 괴테의 광장에서 5분여의 가까운 ‘괴테의 집’을 찾았다. 그런데 마침 휴일로 문이 잠겨있다. 나의 실망이라니,.. 다시 이제는 바우하우스를 찾았다. 5분여의 거리에 늘 책에서 보았던 눈에 익은 건물이었다. 통유리로 내부가 훤히 보이는 산뜻한 건물에는 책을 읽는 학생들의 모습이 보이며, 벽을 등지며 담소를 나누는 학생들도 있다. 큼직한 문을 밀치고 들어서니 강의실이다. 슬적 훔쳐보니 학생들로 가득 메운 계단식 강의실에서 무슨 행사들에 모두 열중이다.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다 화장실을 만났다. 독일에서는 줄곧 화장실에 대한 관심이다. 이곳에서는 돈을 받지 않는다. 그럼 그렇지!
길건너에 바우하우스의 기념품 판매소가 있다. 바우하우스 디자인의 개성 넘친 세련된 생활용품들이 진열되어 있다. 값은 그리 비싼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가난한 여행자에게는 눈즐김으로도 감사해야 한다. 찬찬히 여유롭게 감상하며 시간을 보냈다. 멀지 않는 곳에 실러의 집이 있고 국민극장이 있으며 다른 여러 볼거리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현대 미술관, 괴테광장, 바우하우스 미술관, 괴테와 실러의 다정한 동상이 서있는 국민극장, 실러의 거리에 황색 건물인 실러의 집, 화려한 마르크스 광장, 괴테의 집, 리스트의 집, 바이마르 성, 도보 산책의 일룸 공원, 모두가 볼거리로 역사와 로멘틱의 아름다움을 담고 있는 기념물들이다. 바이마르의 시가는 그렇게 넓지 않아 두어 시간이면 거의 돌아볼 수 있다. 1919년 국민의회가 열려 바이마르 헌법이 제정되어 독일 제국이 공화국이 되는 탄생지요, 괴테가 연출자로 있으면서 그의 <파우스트>, 실러의 <빌헬름 텔>이 초연되었고, 리스트나 슈트라우스도 궁전악단의 단장으로 활동했던 곳, 18세기로부터 바이마르 예술에 영향을 끼쳐온 “국민 극장”을 보았어야 했다. 그런데도 처음의 관심과는 달리 나는 결코 괴테의 발자취를 외면했다. 무었이? ‘괴테의 집’ 휴관의 상심이 이같은 모든 나의 관심을 꺾어버린 것이였다.

독일의 사상과 문화 예술의 위대함을 생각하면 우리는 칸트와 그의 영향을 받은 괴테, 그리고 실러를 먼저 떠올리게 된다.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 1749-1832)와 실러(Friedrich Von Schiller, 1759-1805)는 독일 고전문학을 대표하는 양대 시인이다. 특히 바이마르에서 창조한 위대한 문학적 업적은 괴테가 실러와 만나면서 더욱 큰 업적을 이루어 냈다. 괴테는 프랑크 푸르트에서 태어났다. 그가 26세에 바이마르 대공인 카를 아우구스트의 초청을 받아 청년기 이후 평생을 바이마르에서 살았다. 실러(Friedrich Von Schiller, 1759-1805)는 당시 독일 문단의 중심지였던 바이마르를 28세 때인 1787년에 처음 왔다가 2년 후 예나의 대학 객원교수를 지냈다. 괴테의 부름을 받아 1799년에 두 번째로 다시 돌아와 6년 동안의 마즈막 생을 바이마르에서 지냈다. 괴테의 저택과 실러의 저택은 그리 멀지 않았다. 스위스의 전설에서 빌미를 얻어 1804년에 완성한 실러의 희곡 “빌헬름 텔”은 궁정극장(지금은 국민극장)의 총감독인 괴테가 직접 연출을 맡아 초연되었고, 실러는 발표 이듬 해인 1805년에 죽었다.

두 사람의 삶의 길은 차이가 많다. 나이 어린 실러보다 괴테는 20여 년을 더 살았다. 괴테는 부유한 생활에 장수를 누린 영화와 부귀를 모두 가졌지만, 실러는 의식주의 해결마저도 순탄치 않았다. 우정을 나누는 기간을 괴테는 자신의 지위와 명성을 다해 실러를 도와주려 애썼다. 바이마르로 초청하여 집이 없는 그에게 임시로 자신의 집을 빌려주고, 집을 작만하는데도 많이 도와주었다. 창작활동에 도움을 준 것은 물론, 생활비에도 세세 부분까지 신경을 썻다. 실러는 10년의 년하였음에도 둘의 우정은 끝까지 잘 지켜젔다. 두 사람은 다같이 병약해, 괴테는 몸을 움직이기도 힘든 병중의 처지에도 실러의 문병을 다녔고, 병상에서 친구인 실러의 부음을 들으면서는 말도 못이은 체 통곡한 괴테였다. 괴테의 사후의 실러에 대한 배려와 지극 정성의 우정을 그린 글을 읽으면서, 나는 참을 수 없어 울어 버렸다. 생시를 함께 했던 것처럼, 잃어버릴 뻔했던 유골을 되찾아 자기의 유택 가까이에 유택을 마련해 지금은 함께 잠들어 있다. 내 주변의 매마른 현실을 보면서, 그들의 우정을 나는 마음으로 감동하며 진정의 우정을 그리워할 뿐이다.

나는 독일 공연을 떠나는 직전에 우연히 ‘위치우이’의 ‘유럽 문화 기행’(유소영, 심규호 옮김, 중앙m&b 간행)을 읽게 되었다. 괴테와 실러의 관계를 처음 읽으며 너무 재미 있었다. 특히 많은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되어 유익했다. 여행기를 쓰고 출판해준 모든 이들의 고마움을, 소년시절 읽었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함께 고이 간직한다. 이와같은 바이마르에 대한 기대와 관심은 첫 번째 방문지인 ‘괴테의 집’에서의 일로 인한 내 실망을 이해하여 주시기를 바라며, 오늘은 여기서 끝내야 할 것 같다. 오늘은 괴테와 실러의 시로써 끝내며,
바이마르에 대한 더 쓸거리는 다음 드레스텐편에서 다시 쓸가 한다. (계속)

들장미 -괴테-

어린이는 한 떨기 장미 보았네
들에 피어있는 장미
피어난 향긋한 아침의 향기
달려가 떨기 속을 바라보았네
웃음 머금은 장미.
장미, 장미, 붉은 장미.
들에 피어 있는 장미.

어린이는 말했네. “나는 꺾겠다.
들에 피어있는 장미!“
장미꽃은 말했네. “너를 찌르리
나는 가만 있지 않고
기념으로 너를 찌르리라.“
장미. 장미. 붉은 장미.
들에 피어 있는 장미.

개구쟁이 어린이는 꺾고 말았네.
들에 피어 있는 장미.
장미는 가시로 찌르면서
껶이지 않으려 몸부림쳤으나
끝내 껶이고 말았네.
장미. 장미. 붉은 장미.
들에 피어 있는 장미.

낯선 곳에서 찾아온 아가씨 -실러-

가난한 목자들이 사는 어느 산골에
매년 봄이 되어
첫 종달새들이 공중에 떠오를 때면
한 아가씨-경이롭고 아름다운 아가씨가 나타났다.

그녀는 이 산골 아가씨는 아니었다.
어디서 오는지를 누구도 몰랐다.
떠날 땐 황급히 이별을 고했기에
누구 하나 그녀의 행방을 쫒을 수 없었다.

그녀 곁, 가까이에 서면 황홀했고
누구나 가슴이 마구 뛰었다.
그렇지만 그 위엄, 그 지고함 때문에
친숙하게 될 수 없었다.

그녀가 올 땐 꽃과 과일을 가져왔다.
저 먼 들판에서 익은,
태양빛이 다른 그 곳
더 행복한 자연에서 익은 과일과 꽃을.

그리고 누구에게나 선물을 하나씩 주었다.
이 이에게 과일을, 저 이에게는 꽃을
젊은이나 지팡이를 짚은 노인에게나,
누구나 선물을 받아 집으로 돌아갔다.

그녀에게 모여드는 이들을 반겨주었고,
사랑하는 한 쌍이 그녀에게 다가왔을 때
이들에겐 그녀는 가장 좋은 선물을 주었다.
꽃 중에서 가장 예쁜 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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