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지가 쓰는 편지

하버지의 행복론 (8)

- 윤석원(전 전교조교사)

7-3) 수행 가능성 탐색하기

하버지가 맨 처음 운영체계라는 얘길 꺼내셨는데 그게 반사 작용과 무슨 상관이야? 처음 얘기에서 너무 멀리 온 게 아냐? 그렇지 않아. 본능이라는 운영체계는 면역활동과 반사활동과 대사활동을 하는데 그중에 반사활동이 중요하다는 얘길 하려던 참이야. 우리의 본능 즉 운영체계는 지금도 무조건 반사로 우리의 생명을 이끌어 가고 조건 반사로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가고 있어. 조건반사와 무조건반사 두 가지 반사 능력이 운영체계의 핵심이거든.

무조건반사 능력은 소뇌 이하의 연수와 척수에 있는 자율신경조직이 생리작용으로 우리의 몸을 운영한댔어. 그리고 조건반사 능력은 복잡한 문명생활에서 적절하게 반사하여 우리의 삶을 운영하고 있고. 삶 자체가 대뇌의 조건 반사 활동이니까. 그리고 조건반사 활동 즉 학습활동은 대뇌가 진선미를 경험할 수 있는 가능성을 실현한 결과야. 그러므로 바람직한 인간의 가능성을 실현하여 좀 더 잘 살고 싶다면 우리는 무조건 반사보다 조건반사 쪽에서 성장 가능성 또는 수행 가능성을 더 찾아보자는 거야.

여기서 본능을 무조건반사로만 한정하려는 관점도 있어. 그러나 누구나 대뇌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사실은 조건반사 가능성, 즉 학습 가능성도 타고난 능력이고 본능이라는 뜻이야. 인간의 합리적인 사고활동도 결국은 인간이 항상성을 지킬 뿐만 아니라 더 큰 만족을 얻어 행복하려는 본능이 진화시킨 무조건반사의 한 가지야. 조건반사도가 무조건 반사의 하나라는 이 뻔한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인간을 항상성이라는 유기적인 관점에서 볼 수 있어.

맨 처음 꺼낸 얘기였는데, 컴퓨터의 운영체계와 인간의 반사체계는 어떻게 달라? 홍아야, 너는 다르다는 것을 알고 묻는 것 같구나. 아니, 그냥 다를 것 같아서. 하나의 정보를 입력했을 때 컴퓨터의 반사 즉 출력 결과는 항상 똑같으나 인간은 외부 자극 즉 입력정보가 똑같아도 매 번 다른 감정과 행동을 반사해. 목말라서 처음에는 물을 허겁지겁 마시다가 나중에는 거들떠보지도 않지. 어린아이에게 까꿍하면 까르르 웃다가 나중에는 심드렁해져.

같은 자극이나 조건인데 반사행동이 달라지는 것은 조건반사 행동이 외적 자극이나 조건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줘. 생명체는 언제나 항상성을 지킬 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가능성을 더 잘 실현하여 더 큰 만족을 얻으려는 욕구 즉 더 잘 살려는 욕구를 가지고 있어. 그래서 생명체는 욕구라는 내적 자극을 민감하게 반사하게 마련이야. 반사행동은 그러므로 내적 자극과 외적 자극이라는 두 힘의 벡터로 조절될 수밖에 없어. 그래서 출력된 정보가 컴퓨터의 입력 정보와 같이 1 대 1로 대응하지 않으므로 본인이 아니면 어떤 감정이나 행동이 출력될지 아무도 알 수가 없어. 그 까닭은 외적인 자극 즉 입력된 정보는 대개 관찰되지만 욕구 즉 내적 자극이라는 보이지 않는 변수 때문이야.

그게 알 수 없어. 같은 운영체계가 깔린 컴퓨터는 반사체계가 같으니까 똑같이 반사하잖아. 그런데 왜 사람은 사람마다 반사체계가 다른 거야? 짧은 시간 동안 관찰하면 똑같은 사람의 반사 행동방식은 언제나 똑같아 보여. 그러나 어려서부터 성숙하고 늙어 죽을 때까지 길게 보면 행동방식이 아주 많이 달라. 그건 환경조건이 달라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반사체계도 달라졌다는 증거야. 또 처음에는 무조건반사 체계와 조건반사 체계가 똑같았던 일란성 쌍둥이조차도 다른 환경, 상황, 조건에서 자라면 다른 경험이 축적되어 조건반사 체계 즉 경험체계가 달라지기 때문에 서로 다른 신념을 가지고 대립할 수도 있어.

생명체는 환경, 상황, 조건에 알맞는 행동방식을 찾아내야 욕구를 채우며 더 잘 살 수 있잖아. 그래서 성공한 행동방식들 즉 성공한 경험들이 무조건반사체계에 유전자로 기록되어 축적되거나 조건반사체계에 기억되어 축적돼. 그리고 또 다시 그 축적된 반사체계로 적절한 반사행동을 찾고 그것을 다시 기록하거나 기억하여 축적하고. 이렇게 경험으로 경험하게 되는 경험의 순환 구조 때문에 반사체계는 언뜻 보면 항상성 즉 동일성을 유지하는 듯이 보여.

그런데 왜 세월이 지나거나 환경이 바뀌면 인간의 반사체계가 달라져. 인간이 살아가는 환경과 상황과 조건은 끝없이 바뀌기 마련이라서 언제나 새로운 반사 행동 방식을 찾아야만 더 잘 살 수 있어. 그래서 오랜 세월 동안 자꾸 새로운 반사행동 방식을 기록하고 기억하여 축적하다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반사체계는 조금씩 달라지게 마련이야. 그래서 더 잘 살려고 변하는 환경에 이렇게 적응한 결과가 조건반사를 더 잘 할 수 있는 인간 종을 진화시켰고 또 서로 다른 환경에 적응한 결과가 인간 개체의 서로 다른 반사체계 즉 개성을 만들었어.

반사체계, 경험체계 즉 운영체계가 달라지게 마련이고 달라져야 한다면 우리가 의도적으로 바람직한 경험들을 모아서 바람직한 반사체계를 만들어낼 수도 있잖아. 여기서 바람직한 변화 즉 성숙과 수행의 가능성을 찾을 수 있었어. 여태까지 우린 그걸 찾고 있는 중이야. 이제 우리는 의도적인 성숙 행위 즉 수행이라는 것이 가능하다는 대답을 얻은 거야. 이제 어떤 반사체계가 바람직한 것이고 그렇게 되려면 무엇을 어찌해야 되는지 알아봐야할 차례구나.

하버지, 조건반사활동을 하지 않는 동물들은 무조건반사 활동만으로도 살아가는데 부족함이 없었을 텐데 대뇌와 조건반사활동은 왜 생긴 거야? 홍아야, 그건 좀 다른 얘긴데. 아무튼 먼저 무조건반사의 목적부터 알아보자. 무조건반사는 외부의 어떤 자극에 대하여 우리 몸이 기계적으로 반응하는 거야. ‘기계적’ 반응이라는 말은 대뇌에서 어떻게 행동을 해야 좋을지 따져보지 않고 소뇌 이하의 연수나 척수에 입력된 프로그램(작동방식)에 따라 저절로 그러니까 무의식적으로 행동한다는 뜻이지. 그러나 ‘기계적’이라는 말이 의도나 목적이 없다는 뜻은 아니야. 자율신경계의 기계적인 무조건반사는 오히려 아주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어. 무조건반사체계는 외부에서 어떤 자극이 미치더라도 우리 몸을 건강하게 지키자는, 항상성을 유지하자는 방향과 목적으로 반사하게 마련이야.

홍아야, 지금, 무조건반사 활동의 목적이 뭐랬지? 우리 몸을 건강하게 지키는 것. 그런데 나는 조건반사가 생긴 이유를 물었어. 그래, 알아. 흔히 무조건반사에 따른 생리작용을 정신 작용과 분리시키려는 것은 생리작용을 대뇌의 자의식 위로 떠올릴 수 없기 때문이야. 그러나 생리작용이 소뇌 이하의 무의식 속에서 이루어지지만 무의식 또한 의식 활동이야. 의식은 물리·화학적인 관점에서는 신경전달 물질에 의한 전기적인 자극으로써 정보를 소통하는 작용이야. 그러나 소통된 정보 내용 즉 의식 내용은 분명히 물질로 환원되지 않는 정보야. 그리고 우리 몸 안에서 무의식적으로 정보를 소통하여 생리작용을 하는 목적은 외부의 자극에도 불구하고 우리 몸의 건강을 지키려는 거고.

하버지, 무조건반사의 목적이 아니라 조건반사가 왜 생겼느냐고! 아, 그래. 그 이유는 더 잘 살려고 생긴 거야. 대뇌가 조건반사를 하는 목적도 무조건반사와 마찬가지로 우리 몸과 마음의 건강을 지키고 보다 더 행복하게 살려는 데 있어. 소뇌 이하에서 항상성을 지키려는 것이 면역활동이나 무조건반사활동이나 대사활동 등의 생리작용을 잘하여 몸의 건강을 지키려는 자율신경계의 가장 본질적인 목적이랬어. 그리고 대뇌에서 항상성을 지키려는 것이 환경이나 조건에 알맞는 조건반사행동으로 만족을 느끼며 더 행복하게 살려는 대뇌의 가장 본질적인 목적이고. 환경조건은 끝없이 변하게 마련이므로 우리는 끝없이 새로운 반사행동을 찾아내야 더 잘 살 수 있어. 그 목적을 달성하려고 대뇌와 조건반사가 생긴 거야.

여기서 ‘항상성’이란 말은 정신 신경학자인 다마지오가 쓴 말로, 외부에서 어떤 자극이 미쳐도 체온이나 호흡이나 맥박 등을 본래대로 되돌리려는 성질, 또는 정상을 되찾으려는 성질이야. 그러나 하버지는 생명체의 본능, 운영체계의 궁극적인 목적이 ‘더 잘 살기’라고 믿기 때문에 생존만으로는 만족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그래서 결국 본능 또는 운영체계를 항상성을 지키려는 ‘나’나 ‘자아’라기보다는 ‘더 잘 살려는 나 또는 자아’라고 믿어. 더 잘 사는데 무조건반사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던 인간은 진선미에 대한 경험 가능성을 더 많이 실현하여 조건반사 가능성을 더 많이 축적한 종이야.

그런데 동물과 인간의 자아가 어떻게 달라? 동물들이 자기의 의식을 의식할 수 있는 자의식이 없다면 나가 ‘나’인줄을, 주인이 ‘주인’인 줄 모르는 나 즉 자아일 거야. 그러니까 동물들에게는 목적 그 자체로서의 나라는 무의식적 자아가 있을 뿐이지 자아개념은 없다는 거야. 자의식과 자아개념이 없대서 살려는 생명의지의 주체인 자아가 없는 것은 아니야. 조건반사 능력이 인간에 비해 미약하기 때문에 동물의 자아는 현재적인 관심에만 끌려 다니고, 과거와의 연속성을 의식하거나 미래의 나를 상상할 수는 없는 자아일 거야. 아마도 동물의 자아는 잘 살려는 욕구의 주체인 본능 즉 무조건반사적인 운영체제일 거야.

그러나 문명생활을 해야 되는 인간은 무조건반사 체계의 본능만으로는 생존하거나 번영할 수가 없어. 하긴 조건반사 능력 즉 학습 능력이 없었다면 애당초 문명도 없었을 테지만. 문명생활을 해야 하는 현대인에게는 정신적 의식적 이성적인 조건반사 운영체계가 생리적 무의식적 본능적인 무조건반사 운영체계 못하지 않게 중요해졌을 거야. 하지만 한 생명 즉 하나의 목적을 향하여 서로 돕고 있는 두 운영체계의 비중을 따진다는 것은 전혀 무의미해. 그런데 인간에게는 조건반사에서 최고의 가치인 신념을 지키려고 육체적인 생명을 포기하는 경우도 있어. 그러므로 다른 종의 자아와 비교하여 생명의 운영이 아니라 삶의 운영에서 조건반사체계의 역할 비중을 따지는 것은 인간의 삶과 행동방식을 이해하는데 필요할 거야.

인간의 조건반사체계는 동물들처럼 단순히 무조건반사 체계를 보조하는 프로그램이 아니야. 진선미를 경험할 수 있는 인간의 모든 활동영역을 지원하는 매우 다양한 응용프로그램들의 융합이야. 만약에 누가 우리에게 그가 어떤 사람이냐고 물으면 무조건반사 체계의 반사 성향인 그의 생리작용이나 건강 상태보다 먼저 우리는 그의 조간반사체계의 반사 상향 즉 개성을 소개하잖아. 듬직하다든지, 신경질적이라든지, 보수적이라든지 등등. 그러고 보면 자의식을 가지고 있고 개성을 드러내는 조건반사 운영체계가 무조건반사 운영체계를 포함한 자아를 대표하고 있어. 그만큼 조건반사 운영체계를 중시하는 거지.

조건반사 체계가 자의식을 가지고 있고 개성을 드러내기 때문에 삶에서 중요하다는 말씀은 좀 엉뚱한 것 같아. 사람이 자의식이나 개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사는 것은 아니잖아. 아, 홍아야, 자의식은 자아개념을 가지게 하고, 개성은 반사체계의 반사 성향을 나타내므로 그 사람의 반사방식 즉 삶을 이해하는데 중요하댔어. 그러나 네 말대로 자의식과 개성이 우리의 삶의 목적도 아니고 삶에 직접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야. 반사체계가 자의식과 개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데 중요하다는 게 아니야.

우리는 조건반사체계, 경험체계를 우리의 유일한 안경으로 삼아 사물을 보고 가치를 판단하거나 의미를 해석하며 살아가니까 조건반사체계가 중요하다는 거야. 그래서 새로운 깨달음이 있을 때마다 그 깨달음에 맞추어 기존의 경험체계의 경험들을 재배치하고 재조직하여 자아를 수정하고. 다시 수정된 조건반사체계로 사물을 보고 판단하고 해석하고. 그러니까 이렇게 순환하는 조건반사 활동이 우리의 삶이고, 우리의 삶은 조건반사체계의 활동이라는 의미에서 조건반사체계가 중요하다는 거야. 조건반사체계가 우리의 삶을 운영하고 있으니까.

영장류에서 갈라진 호모 일렉투스가 가장 많은 가능성을 축적하고 먹이사슬의 맨 꼭대기에 서서 여유를 가지고 문명을 건설할 있었어. 그리 된 데는 조건반사 능력을 진화시켰기 때문이라는 데에 아무도 이견을 내놓을 수 없을 거야. 인간은 보다 행복하려고 진선미를 더 잘 경험할 수 있는 대뇌의 조건반사 가능성을 진화시켰어. 그 결과 어느 동물보다도 환경조건에 조건반사를 더 잘 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운영체계를 지니게 돼. 그래서 다른 동물의 자아에 비한다면 또 하나의 정신적, 자의식적, 이성적, 개성적인 자아를 가지게 된 거야.

하버지, ‘초자아’라는 말도 있잖아. 그게 뭐야. 혹시 그건 조건반사와 상관이 없는 건가? 그래, ‘자아’라는 화제에서 나올 말이구나. 초자아란 양심이라고도 하는데 어렸을 때 애착을 느끼던 보호자의 행동방식을 닮은 ‘나’야. 사랑하는 대상의 삶을 닮아있는 ‘나’지. 취학 이후의 사회화 과정에서는 내면화된 한 사회의 도덕적인 가치 즉 내면화된 질서를 가리키기도 하고. 그런데 여기서 ‘닮다’ ‘내면화하다’라는 말들은 엄마나 어른들의 도덕적인 행동방식이 옳다고 믿고 그것을 마음에 아로새기는 조건반사 즉 학습 행위야. 그래서 초자아도 조건반사 즉 학습 과정으로 만들어지지.

초자아의 반대말로는 원초적 자아라는 말을 쓰는데 본능적인 자아를 가리켜. 무조건 반사를 하는 본능적인 자아는 육체적인 욕구를 만족시키서 쾌락을 얻으려 해. 그러나 초자아는 도덕적인 가치를 추구하기 때문에 원초적인 자아의 이기적인 쾌락추구를 억압하게 돼. 그러나 대부분 우리의 일상적인 자아의 모습은 원초적 또는 본능적 자아의 이기적인 쾌락만을 추구하거나 초자아의 도덕적인 원칙만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어중간한 선에서 타협하는 자아야.

하버지, 그러면 자아도 초자아처럼 만들어지는 거야? 아니야. 모든 생명의 자아는 생명이 스스로의 항상성 을 지키려는 의지와 노력 때문에 생기고 또 진화돼. 그래서 자아는 ‘항상성을 지키려는 주체’ 또는 ‘더 잘 살려는 주체’라고 정의할 수 있지. 특히 인간의 자아는 건강이라는 무조건반사 체계의 항상성만이 아니라 신념이라는 조건반사 체계의 항상성을 지키야 되는 의무도 동시에 가지고 있어. 두 항상성 중에 택일해야하는 경우 어떤 인간은 조건반사 체계의 궁극적인 가치와 목적인 신념체계라는 정신적인 항상성을 지키려고 무조건반사 체계의 육체적인 항상성을 포기할 수도 있어. 그러나 대개의 인간은 이와 같이 육체와 정신의 두 항상성을 지키려는 두 가지 반사 체계, 두 가지 운영체계 두 가지 자아의 협력과 조화로 때로는 대립과 갈등으로 살아가고 있어.

앞에서 컴퓨터에도 운영체계가 있다 하셨는데 그럼 자아도 있을까? 컴퓨터에도 항상성을 지키려는 주체가 있다면 그게 컴퓨터의 자아가 아닐까. 그게 무얼까. 컴퓨터에서 다른 프로그램의 간섭이나 방해를 물리치고 또 응용프로그램이 진행되도록 하드웨어 자원을 제공하며 응용프로그램 사이의 정보 소통을 조정하는 최고의 권력기구가 무얼까. 컴퓨터에서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목적이 되는 것이 무얼까. 그게 바로 네가 말한 운영프로그램 즉 운영체제야. 굳이 컴퓨터에서 자아를 찾는다면 그걸 거야.

그럼 그게 인간의 자아와 어떻게 달라. 생물의 자아는 본능 즉 무조건 반사로 운영되는 프로그램이랬어. 그런데 인간의 자아는 조건반사로 운영되는 프로그램이 하나 더 있다고 했었고. 그래서 인간은 이 두 가지 운영체계가 서로 협력한댔어. 그렇다면 홍아야. 인간과 비교한다면 컴퓨터에 뭐가 없니. 컴퓨터의 운영체계는 무조건반사만 하고 조건반사는 못하니까 조건반사할 수 있는 운영체계나 자아가 없지. 그래 바로 그거야.

그럼, 조건반사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는 뭘까. 무조건반사는 기계적이랬어. 그래서 컴퓨터는 입력한 대로 출력하지만 인간은 똑같이 입력해도 매번 달리 반사할 수도 있댔어. 왜 그렇다고 했지? 인간은 내적인 욕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외적 자극만으로 반사할 수 없댔어. 입력된 조건이나 자극을 내적 욕구에 맞추어 조절해야 하기 때문에 똑같은 입력, 똑같은 자극이나 조건에도 달리 반사한댔어.

달리 반사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어. 환경조건은 계속해서 달라지게 마련이니까 거기에 알맞게 반사히려면 계속해서 새로운 행동방식을 찾아내야 돼. 만약에 새로운 행동방식을 찾아내어 욕구를 만족시켰다면 그건 새로운 경험이야. 그런데 그 새로운 경험을 입력하려면 그 새로움에 맞추어 기존의 경험들을 재조직하고 재배치해서 반사체계 자체를 수정보완해야 돼. 그래서 조건반사체계가 수정·보완되면 또 다른 새로운 행동방식으로 반사할 수밖에 없어.

그러나 컴퓨터의 반사체계 즉 운영체계는 보다 상위 단위인 인간이 바꾸어 놓기 전에는 스스로 바꿀 수가 없어. 그러나 인간의 반사체계는 스스로가 아니면 다른 누구도 바꿀 수가 없어. 자아를 스스로 수정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가 컴퓨터와 인간 자아의 차이야. 그래서 인간은 달라진 조건반사체계로 같은 자극이나 조건에도 달리 조건반사하는 거야. 뿐만 아니라 생명체의 무조건반사체계도 스스로를 수정하고 있어. 그 개체는 모르지만 새로 알게 된 행동방식 즉 새로 얻은 가능성이 무조건반사체계의 유전자에 기록되고 축적되는 진화과정에 놓여 있어. 진화과정을 압축해서 본다면 무조건반사도 조건반사와 다를 것 없어. 새로운 단계마다 수정·보완된 무조건반사체계가 새로운 행동방식을 반사해왔음을 알게 돼.

여기서 다시 한 번 우리는 컴퓨터와 달리 스스로가 반사체계를 수정할 수 있다는 사실과 환경조건의 변화 때문에 수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확인한 거야. 이 두 사실이 우리가 찾고자 했던 수행 가능성의 근거야. 항상성 즉 연속성을 유지하면서도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가기 위해 우리의 반사체계는 계속해서 바꿀 수 있고 바뀌어야 한다는 이 두 사실이 수행 가능성에 대한 하버지의 확신의 근거야. 홍아야, 인간이 운영체계, 경험체계, 반사체계, 해석체계, 의미체계 가치체계, 신념체계를 스스로 바꿀 수 있다면 의도적으로 그리고 바람직하게 바꾸자는 얘길 하고 싶었단다. 그렇게 쉬운 얘기가 쉽게 안 풀어져서 이처럼 길어졌으니 많이 많이 미안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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