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장애등급제ㆍ부양의무제 폐지 농성장을 다녀와서

- 고손

지난 9월 4일, 광화문 역사 내에서 무기한 농성중인 장애등급제ㆍ부양의무제 폐지 농성장에 다녀왔습니다. 9번 출구 해치 광장 쪽 통로에 자리 잡은 농성장에는 서명을 받는 책상 두 개, 그리고 무기한 농성을 위한 간이 천막이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제가 언론을 통해 접한 농성 첫 날은 10시간 넘게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는 불안한 상황이었습니다. 그 후에도 이리저리 전해들은 첫 날의 분위기가 워낙 험악했던 탓에 농성장으로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걱정이 앞서 긴장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제가 찾아간 농성장은 마치 원래부터 그 곳에 있었던 것 마냥 당연하고 평온한 분위기였습니다. 서명을 하고 엽서를 적을 수 있는 작은 공간, 우리 사회 공통의 문제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과 장기적으로 이야기 나눌 수 있는 그런 공간을 공공장소에서 한 자리 함께 쓰는 게 그렇게나 극렬하게 막아야 할 만큼 안 되고 어려운 일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장애등급제ㆍ부양의무제 폐지 공동행동(이하 공동행동)은 지난달 200개의 장애인ㆍ인권단체ㆍ빈곤단체ㆍ노조들이 연대하여 출범했습니다. 현장을 총괄하시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조직실장 김정하님의 말씀에 따르면 공동행동 결성 배경에는 대선을 맞아 이번 기회에 이 문제를 정치권과 확실하게 매듭짓자는 목표가 있다고 합니다.

광화문역이 농성장으로 선정된 이유는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곳이기도 하지만 근처에 청와대와 복지부, 정부청사 등 관련 기관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농성장은 빈곤단체와 장애인 단체가 주축이 되어 기본적으로 요일당번제로 운영되고, 지방분들은 일주일 정도의 일정을 가지고 올라오신다고 하셨는데 제가 간 날은 부산 분들이 계셨습니다. 제가 만나 뵌 분 모두가 남다른 말솜씨와 유머감각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농성장이 재미있다고 생각했다면 좀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솔직히 저는 공동행동 분들의 유머감각 덕분에 농성장에 있던 내내 즐거웠습니다. 특히 서명을 하고는 싶은데 이게 어떤 내용인지는 잘 모르겠다며 머뭇머뭇 다가온 여고생들에게 알기 쉽고 간결하게 설명해주시는 장애여성공감대표 배복주님의 모습은 매우 인상 깊었습니다. 배복주님 외에도 농성장에 계신 분들 모두가 나름의 방식으로 시민들에게 부양의무제와 장애등급제의 문제점에 대해서 짧은 시간 내에 이해시키실 뿐 아니라 심정적으로도 금세 공감하게 만드는 힘이 있으신 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시민 분들을 일단 서명을 받는 책상 앞까지 모셔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습니다. 선뜻 다가오셔서 서명이나 엽서쓰기에 참여해주시는 분들도 계셨지만, 전단지를 받아들고서도, 서명을 요청하는 목소리를 듣고서도 갸우뚱 하시며 지나치시는 시민 분들이 더 많았습니다. ‘장애등급제ㆍ부양의무제 폐지’라는 슬로건이 시민들에게 직관적으로 다가가지 않는다는 문제가 시민 참여의 어려움으로 연결되고 있었습니다. 농성장 안쪽으로 들어가서 앉아있으려니 서명 해주시는 분들보다는 슬쩍 쳐다보시고는 그냥 지나치시는 분들이 많으신 것이 농성장 바깥에서 볼 때보다도 더 눈에 띄었습니다. 농성장은 광화문역에 존재하되 차원은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사람들의 미묘한 무관심이 느껴졌습니다. 느긋하고 꾸준하신 공동행동 분들과 달리 저는 괜히 초조해져 “원래 이렇게 사람들이 서명을 잘 안 해주나요?”라고 몇 번을 여쭤보았는지 모릅니다. 의욕만 앞서 초보티를 여과 없이 드러내는 저에게 공동행동 분들께서는 “언제 장애인 관련 문제가 사회 중심 이슈였던 적이 있나요? 계속 이렇게 하다보면 되는 거죠.” 하고 차분하게 답해주셨습니다.

부양의무제와 장애등급제라는 어려운(?) 말만 뛰어넘고 나면 농성장은 금세 친근해집니다. 농성장에서 진행되고 있는 대표적인 프로그램은 100만인 서명운동과 10만인 엽서쓰기입니다. 엽서쓰기의 경우에는 엽서 구입과 작성을 통해 모금 참여와 적극적 행동을 동시에 할 수 있습니다. 농성장 등에서는 시민들이 작성한 엽서를 접수받고 모아 보내고 있습니다만, 엽서 자체에 정당 주소가 인쇄되어 있어 굳이 바로 작성해 접수하지 않더라도 언제든 우체통에 넣기만 하면 정당 정치인에게 손쉽게 보낼 수 있습니다. 이 엽서는 광화문 역 농성장 뿐 아니라 전국장애인철폐운동(http://www.sadd.or.kr/) 사이트에서도 구입할 수 있습니다. 또한 장애등급제ㆍ부양의무제 폐지 전단 뒷면을 통해 19대 대통령 후보들과 보건복지부 및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의원들의 트위터 주소를 배포하고 있어 시민들이 엽서뿐 아니라 SNS로도 의견을 피력할 수 있도록 돕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적극적 행동에도 불구하고, 참여 부족과 민감한 사안이라는 점이 맞물려 아직까지는 장애등급제ㆍ부양의무제에 관해 정부와 정치권에서 확실한 변화의 움직임을 보이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민주통합당의 정세균 후보만 8월 27일 농성장에 방문하여 정책간담회를 가졌을 뿐, 여타 후보들은 뚜렷한 반응이 없는 상태입니다. 특히 새누리당 같은 경우는 지난 총선부터 이 문제에 대해 묘한 무응답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현장에서 들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 날 천막 안에서 전단지를 접는 일을 맡았습니다. 제가 전단지를 접는 동안 근처 보험회사 노조 파업 현장에서 강연 및 서명운동을 하러 가셨던 분들이 엽서와 엽서 판매대금을 들고 농성장으로 돌아오셨습니다. 보험회사 노조 분들의 마음이 담긴 엽서더미에 기뻐하시는 공동행동 분들을 보며 뜨내기인 저까지 기뻤습니다. 제가 느낀 농성장은 지치지 않고, 꾸준히, 생활감을 가지고, 열심히 움직여 살아간다는 것이었습니다. 웃고, 이야기하고, 즐거워하고, 속상해하기도 하고, 농담하고, 피곤하면 눕고, 전화하고, 카카오톡을 하고, 자고, 누군가는 집으로 퇴근하고, 남은 사람들은 저녁밥 걱정을 하기도 합니다. 시위나 농성이라는 말의 느낌이 주는 비장함에 얼어붙어 있었던 제게 “이런 거, 비장하기만 하면 못 해요.” 라는 말씀은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예전에는 중증 장애인 여러 명에 비장애인 한 명, 이런 상황이 벌어지기도 해서 어려웠지만 지금은 대부분의 분들이 활동보조인과 동행해 요즘엔 그다지 힘든 것도 없다, 전에는 농성 물품이 들어오지 않아서 힘들었지만 지금은 좀 들어온 편이라 괜찮다 등등, 농성을 하며 부딪치는 어려움들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시는 모습이 대단하게 느껴졌습니다. 농성장에서 무엇보다 힘든 일은 서명운동이나 모금 등의 활동이 아니라 오랜 시간 앉아있는 일이라는 말씀에 이르자 저는 좀 부끄러워졌습니다. 삶을 위해 하는 농성이 삶의 일부임은 당연한 것인데도, 농성과 일상을 떼어놓고 생각하는 감각에 스스로가 너무 길들여진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앞으로 장애등급제ㆍ부양의무제 폐지 농성은 더 많은 사람들 그리고 다양한 콘텐츠와 만나 보다 많은 사람이 느끼고 공감하고 참여할 수 있는 모습으로 변모해갈 계획에 있습니다. 지금도 농성장과 서울시내 곳곳에서 일주일 내내 다른 프로그램들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현재는 유명인들의 거리특강, SNS 활용 특강, 서울 시내 투어 선전전, 기초수급자 상담, 집회, 기자회견 등이 요일별로 혹은 부정기적으로 이뤄지고 있습니다. 향후 문화제와 영화제도 개최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좀 더 많은 분들이 지나던 발걸음을 멈추어 참여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응답 2개

  1. 지나가다말하길

    광화문 역사안에 농성장이 생긴 건 역사 이래 처음이라네요.그 금사라기같은 곳을 노숙인, 장애인 단체가 차지하고 있으니 경찰과 행정부로서는 난감한 노릇이죠. 그러니까 더욱 뜻깊은 농성장입니다. 대한민국 수도 한 가운데, 광화문을 점령한 ‘가난한 자’들의 아고라이자 대안공간으로 거듭나길 바랍니다.

  2. 박카스말하길

    광화문역 농~성~장! 소식 잘 들었습니다. ‘공동행동’의 날 분위기도 잘 들었습니다.

    몇 년동안 묵살되어왔던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의 중요성이 많이 알려져서 이번 대선을 앞두고 꼭!!! 쫌!!! 바뀌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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