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실에서

꼼수와 죽음의 교차로

- 주노정

다음 주면 저는 반 년 넘게 해오던 알바를 그만 둡니다. 그만두면서 가장 아쉬운 건 역시 ‘돈’입니다. 돈 문제는 ‘생존’과 직결되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텐데요. 이제 저와 우리의 ‘생존 문제’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자 합니다.
이 일을 시작할 때, 저를 고용한 사람이 그러더군요. 스스로를 알바생이라고 말하지 말랍니다. 그 대신 ‘자원봉사자’라는 말을 쓰라고 그러더군요. 나름 ‘복지시설’이라 그러려니 했습니다. 그러고 몇 개월이 지나서야 그 사정을 들을 수 있었는데요. 제 ‘월급’은 ‘인건비’에서 나온 게 아니라 공부방의 ‘프로그램 (운영)비’를 전용해서 마련한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사람이 아니무니다~ 프로그램이무니다~”
우리 주위엔 나랏돈(세금) 받아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꽤 많습니다. 아시다시피 ‘그 돈’은, 어지간히 ‘꼼수’를 부리지 않으면, 제대로 ‘타먹는’게 쉽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제 고용주는 ‘꼼수’를 부려야만 했을까요. 공부방 직원에게 듣자하니 구청에서 알바생에 대한 ‘인건비’ 지원을 끊었답니다. ‘세비’를 절약해야해서 그랬다라 뭐라나. 그동안 그 나름 이유가 있어 지원 되어온 것일 텐데 말입니다. 추측컨대 구청이 원하는 건 이런 거였을까요. 죽더라도 무대에서 죽기를 원하는 하는 배우처럼, 일터에서 ‘과로사’로 죽어나가는 노동자의 ‘아름다운 모습’ 말입니다. 농담입니다만, 굉장히 무책임한 정책이죠. 나 몰라라, 배 째라는 식입니다. 이 지점에서, ‘비非합법’적인 길, 이른바 ‘꼼수’ 권하는 구청이라고 불러주고 싶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모두의 ‘그 분’ 말고, 이런 ‘꼼수’ 부리며 맘 편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저를 고용한 공부방 원장도, 세월이 아무리 지난들 마음 한 구석이 ‘켕기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나랏님’들 눈치도 보일 테고, 언제든 ‘저자세’로 나가지 않을 수가 없겠죠. 심하게 말하자면, ‘밥줄’만 안 끊어주신다면 기꺼이 노예처럼 ‘복종’ 할 기세로 말입니다.

‘돈 이야기’를 한 가지 더하자면 ‘등록금’을 빼놓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오래전부터 꾸준히 소식이 들려오는 ‘반값 등록금’ 말입니다. 요즘 대선 시즌이라 그런지 어떤 후보가 이런 말을 하더군요. “등록금 ‘부담’을 낮추겠다…” ‘부담’을 낮춰주겠다는 말이 이토록 부담스러운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요.
대학생 중에는 부모에게 전적으로 등록금을 지원받는 친구도 있을 것이고(공부 잘해서 성적 장학금 받아 다니라는 말과 함께 말이죠) 그렇지 못한(집이 가난하다든지, 부모와 사이가 안 좋다든지 여러 사정으로) 학생들은 빚을 내거나, 밤낮으로 알바를 뛰어서 등록금을 내고 있죠. 어마어마한 대학교 등록금 내는 것만으로도 사회 양극화가 충분히 ‘조장’되고 있다는 건 우리 모두가 아는 불편한 진실입니다. 그런데 때 마침 정부에서 반값 등록금 정책이라고, 아주 ‘획기적’인 등록금 인하 정책을 내놓았습니다. 이른바 ‘국가 장학금’입니다. ‘일촌 가족의 총 소득’을 바탕으로 그 ‘등급(분위)’을 나누어 가난한 순으로 장학금을 나눠주는 제도 말입니다. 이를테면 ‘장학금’을 놓고 대학생들이 싸우는 국가 주도의 ‘가난 배틀’이라고나 할까요. 가난을 증명하는 것도 억울한데, 그렇게 ‘엄선된’ 사람들 중에서 누가 더 성적 잘 받았는지 또 ‘경쟁’을 해야 합니다. 굉장히 ‘합리적’이죠. 다른 한편으로, 앞서 말한 장학금에는 해당사항이 없는 이른바 사각지대에 놓인 가난한 사람들은 어떨까요. 말하자면 부모에게 독립해서, 손 벌려가며 생활하지 않는데도 단지 부모가 벌어들이는 소득 때문에, 그러니까 내가 아니라 부모가 ‘덜 가난하다’는 이유로 국가에서 장학금도, 빚도 내주지 않는 그런 사람들 말입니다.
나라를 다른 말로 국가(國家)라고 하죠. 나라와 가족 사이, ‘국가’ 이 두 음절 사이엔 쉼표도, 거리감도 없습니다. 말 그대로 떼려야 뗄 수없는 사이입니다. 그래서 이 나라는 ‘사랑 가득한, 소통의 가족’을 강요하는 걸까요. 무슨 문제가 생겼다 하면, 그 모든 책임을 개인과 가족에게 떠넘기고는 어디론가 숨어버리니 말이죠. 왜 이 나라는 스스로 일어서보려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생각은커녕, 자꾸 방해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누군가에게 머리 조아리며 빌어먹지 않아도, 자기 힘으로 당당하게 먹고살 수 있는 그런 사람을 원치 않나봅니다. 그게 가족이든, 국가 기관이든, 자본 권력이든 무언가에는 ‘복종’하게 만들어야 그 직성이 풀리는 존재 같습니다.

지금, 광화문 해치광장에 장애인들이 모여 농성을 하고 있습니다. 시작한지 한 달이 다되어갑니다. 사회적 안전망의 역할을 하(겠다고 주장하)는 이 나라에,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존엄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부양의무제, 장애등급제 폐지를 말합니다. 국가 스스로의 책임을 방기하고, 장애인들을 더 가난하게, 더 수치스럽게, 더 모욕적으로, 나아가 죽음으로 몰아넣는 이 제도들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그 누구의 도움 없이도 스스로의 힘으로 살고 있는(살고 싶은) 장애인들이 밖으로 뛰쳐나왔습니다. 이번 위클리 수유너머 133호는 광화문 농성장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역사 뒤, 남은 사람들] 코너 기다리시는 분들이 많으실 텐데요. 한 달 정도 숨 고르는 시간을 갖습니다. 글 쓰는 권 보드래씨가 가을이 되니 너어~무 바쁘시다네요. 더불어 앞으로 이어질 연재에 대해서도 살짝 귀 뜸을 해주셨는데요. 3.1 운동을 넘어 그 외연을 넓혀서 근대 초기 인물들을 만나 보실 수 있을 거라는 말씀 전해오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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