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당신들도 그럴 거지

- 성태숙(구로파랑새나눔터지역아동센터)

가만 보면 살면서 감사히 생각해야 할 일들이 적지 않다. 요즘같이 흉흉한 이야기들이 많이 오고가는 것을 보면 그래도 험한 꼴 안당하고 이제껏 살아온 것에 다시금 감사한 마음이 생길 뿐이다. 최근에 특히 아이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잔인한 일을 두고 ‘인면수심’을 하지 않고서야 어찌 그럴 수 있느냐고 공분들이 대단하지만, 난 왠지 괜히 짐승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 뿐이다. 그건 짐승만도 못한 짓이지, 짐승들이라고 그렇게 막 살까 싶은 그런 짓들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서 사는 여성들은 그런 문제에서 자유롭기가 쉽지 않은 것 같다. 그러므로 내게도 그런 일이 통 없었을 리 없다. 다만 감사한 것은 그래도 성폭력 정도는 아니고 가벼운 성추행 정도여서 가끔 “미친”하고 말 정도의 가벼운 흔적만을 남겼다는 점이다. 그래도 한 번씩 몸을 떨 정도로 강한 기억으로 남긴 것은 중학교 때 당한 일이었다.

시험을 앞두고 친구랑 독서실에서 함께 공부를 하며 밤을 보내자고 했는데, 갑자기 늦은 밤 친구가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때를 쓴 바람에 비롯된 일이었다. 버스로도 몇 정거장이나 떨어진 곳에 사는 아이가 갑자기 집으로 돌아가겠다니 난감했지만, 벌써 맘이 틀어져버린 나는 발딱 일어나서 데려다줄 테니 가자고 앞장을 섰다. 그때나 지금이나 쓸데없이 자존심 세우는 것은 여전해서 무서운 줄도 모르고 데려다주면 될 것 아니냐고 간 크게 나섰던 것이다.

아마도 10시가 훌쩍 넘어 11시가 가까웠던 시간이었는지 아무튼 꽤 깊은 밤이어서 친구를 데려다주는 길에도 인적이 드물었다는 기억이 어렴풋이 있다. 야멸차게 돌아서는 친구를 집에 데려다주고 입을 꼭 다물고 집으로 발걸음을 재촉하던 길이었다. 조금이라도 일찍 가겠다는 생각에 오던 길과는 다른 길로 접어들었다. 시장 골목을 다 빠져나와 조금 언덕이 진 주택가 골목길을 지나오는 길이었다. 시장은 이미 다 파해 한산한데 갑작스런 정전으로 사위가 짙은 어둠에 잠겨버렸다. 그 시절에는 곧잘 있는 일이었다.

이미 언덕 초입에 들어선 길이라 돌아갈 엄두를 낼 수 없었다. 앞에도 주택가 골목길이지만 뒤도 시장 골목길이다. 더욱이 시장 골목을 다 돌아나가 한길을 빙 둘러가자면 두 배는 시간이 걸릴 텐데, 아무래도 앞에 있는 골목길을 서둘러 가는 것이 좋겠다 싶은 판단이 들었던 것이다. 언덕을 반쯤 올라갔을 때 그의 형체가 저쯤에서 나타났다. 나는 그의 얼굴을 보지는 못했다. 모자를 썼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나는 왠지 그가 모자를 쓰고 있었던 것 같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호리호리한 실루엣으로 기억하고 있다.

20대였던 것 같고 30대를 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마주 오는 그를 보고 있노라니 꿀꺽하고 침을 집어 삼킬 만큼 긴장이 되긴 했지만, 돌아서 도망을 칠 이유도 딱히 찾을 수 없어 나는 서둘러 옆을 스쳐가려 했다. 그러나 어느 틈엔가 그의 손은 나의 팬티 속에 들어와 있었다. 그 순간에 내가 기억하는 건 ‘허억’ 비슷한 소리를 내며 숨을 죽였던 나의 모습이다. 어떤 끔찍한 일을 당하면 ‘아악’하고 비명을 지르는 것이 정상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분명히 숨을 죽였다. 아무 소리도 못하고 놀라서 눈이 뚱그래졌던 것 같다. 그러면서 어둠 속에서 그의 얼굴을 쳐다 본 것은 같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내 기억에 없다. 두려움으로 뻣뻣이 굳어진 내 몸뚱아리와 터질 듯이 요동치던 심장은 이렇게 세월이 지나서도 그 때와 엇비슷한 느낌을 전하고 있는데, 기억은 하얀지 까만지 아무튼 그렇다. 그가 무슨 욕인가를 했었던 것도 같다. 얼굴을 험상궃게 일그러뜨린 것도 같은데 그것도 자세히는 기억에 없다. 아무 소리도 못하고 숨을 죽이고 있었던 것이 분명한데, 그런데도 숨죽인 캄캄한 사방에서 비명소리가 요란히 들려오는 듯한 착각이 들기도 한다. 천운이 있었던지 그는 그러고 말았다. 나를 끌고 가 어디서 요절을 낼 수도 있었을 텐데 그냥 놔주고 제 갈 길을 갔던 것이다.

나는 평생토록 서너 번 정도 이 일을 간략히 언급한 적은 있었으나 단 한 번도 지금처럼 상세히 기억해본 적은 없다. 잊고 싶었다. 다만 잊혀 지지 않았을 뿐이다. 물론 그 따위 일로 몸이 더렵혀졌다거나 하는 어리석은 생각은 털끝만치도 해 본적은 없다. 미친놈한테 그 정도면 천만 다행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그래도 잊을 수는 없었다.

신문을 보면 ‘그러니….’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피해를 당한 아이들과 가족들은 오죽 하랴하고 다시 한 번 그들의 가늠되지 않는 아픔을 짐작해본다. ‘자식 잘 키워야지’하고 아들 녀석들을 보며 다짐도 다시 한 번 해본다.

세상이 이리 시끄러운데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공부방 아이들은 ‘섹스 어쩌고’ 하며 킬킬거리고 있다. 한 아이 엄마는 자기만 없으면 아이가 몰래몰래 야동을 본다고 걱정을 태산같이 한다. 글을 모르고 몸도 많이 편찮으신 할머니는 홀로 키우는 손주들이 학교에서 정보통신지원으로 받은 컴퓨터로 밤낮 야사시한 것들을 보고 있는 줄 꿈에도 모르신다. 아이들 하는 짓에 정말 걱정이 태산이다.

이런 사건들이 빈발할 즈음 우연히 새누리당의 대표급 국회의원들과 신진 의원들이 한담을 나누는 것을 가까이서 목격할 기회가 있었다. 그 날은 새누리당에서 성폭력 재발방지를 위해 물리적 거세안을 들고 나온 날이다. 새누리당 대표를 지낸 모 의원은 “남자를 다 없애버려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물리적 거세안에 찬성을 하는 건지 비꼬는 건지 애매한 발언을 하고 있었다. 신원공개에 양형강화에 화학적 거세에 전자 발찌 및 물리적 거세에 사형 이야기까지 나오니 정말 무시무시하다 싶은 것들은 총출동한 셈이다. 이제 성폭력범은 잡히면 끝장이라는 생각에 죽기를 각오하고 범행을 저지를 것 같다. 그러니 피해자들의 인명을 살상하는 일도 더 서슴지 않을 것 같아 걱정스럽기 그지없다.

하지만 이 모든 난리 북새통속에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다. 요즘에는 왜 이렇게 서민들 그 중에서도 최하층으로 전락한 사람들의 성범죄가 많이 발생하고 보도되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지역아동센터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그런 현상을 보면서 가해자도 피해자도 다 우리 아이들과 비슷한 처지에서 나오고 있으니, 아이들을 더 잘 돌보는 길밖에 이 악행을 막을 길이 없다고 모두 입을 모으고 있다. 별 볼일 없는 성장과정에, 별 볼일 없는 직장에, 외톨이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요즘 성범죄자들의 모습 속에서는 많이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이 몹쓸 짓을 저지르는 것도 모자라 재범도 서슴지 않으니, 사회 지도층들은 이런 사람들에게 할 수 있는 모든 엄한 벌을 내려 단단히 정신을 차리게 해야겠다고 생각하는것 같다.

피해를 입고 고통에 울부짖고 있는 피해자와 그 가족들을 생각하면 이들에 대한 단죄는 한 치도 틀림없이 죗값을 단단히 받게 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런 중 갑자기 한 성상납 연예인의 자살 이야기가 떠올랐다. 가난한 아이들에게 파렴치한 짓을 한 사람은 가난한 동네에서 기도 못 펴고 사는 그래서 그렇게 어린 아이에게 몹쓸 짓을 하는 못나디 못난 인간이지만, 그에 비해 꽃다운 그녀의 인생을 스스로 마감케 한 그들은 누군지도 모르는 베일 속으로 증발해버린 사회지도층 인사들이었다는 점에서 요즘 말마따나 ‘이건 뭐지’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짐승만도 못한 형제들의 못난 얼굴이 만천하에 공개되고, 그들의 더러운 발모가지에 전자발찌가 채워지고, 그들의 목구멍에 못난 욕망을 영원히 잠재울 화학약품이 들이부어지고, 그들의 거세와 사형이 논의되는 순간, 꽃다운 그녀를 짓밟았던 또 다른 그들은 조금이라도 떨었을까 궁금하다. 못난 형제를 붙잡아 광장의 손아귀에 맡겼던 경찰과 검사들이 과연 높이 있는 그들도 잡아들여 우리의 돌팔매를 맞게 해줄지 궁금해졌다. 그들의 낯짝을 볼 수 있는 날이 올까? 그들의 발모가지에 전자발찌를 채워둘 수 있는 날이 올까? 그들의 목구녕에도 산해진미 대신 화학적 거세의 약물 세례를 할 수 있는 날이 올까? 그들도 거세와 사형의 공포에 공평히 떠는 날이 올까 나는 잔인하게 궁금하다.

당신들도 그래야 한다. 그러기로 한 거니까….. 당신들의 성기가 엉뚱한 짓을 저지른다면 당신들의 것에도 가차 없이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 모두가 그러기로 한 것이니 말이다. 분명 그래야 한다. 당신들이 그랬다면 말이지……..

응답 2개

  1. 지나가다말하길

    잘 읽었습니다. 요즘 성폭력범에 대한 낙인, 감시, 거세 바람은 그렇게 하자고 떠드는 넘들 자신의 폭력적이고 음울한 욕망을 감추려는 게 아닐까, ‘저놈들이다’ 소리치면서 자신은 안심하고 빠져나가려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듭니다.

  2. 교동댁말하길

    잘읽고 갑니다. 글의 서두에서 달리기를 시작해서 마지막 문단에 이르러서는 심장이 터질듯이 복받쳤습니다. 긴 한숨으로 마무리 지어보려는 중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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