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지가 쓰는 편지

하버지의 행복론 (9)

- 윤석원(전 전교조교사)

8 자문자답하기

홍아야, 만약에 인간이 반사체계를 스스로 바꿀 수 있다고 한다면 바람직하게 바꾸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바람직한 반사체계로 바꿀 수 있겠니? 하버지, 어떤 반사체계가 바람직하지? 그걸 알아야 그렇게 바꿀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가 있지 않을까? 그 그렇구나. 우리는 행복하게 살고 싶으니까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생각이나 언행을 반사하면 바람직한 반사체계지. 행복하게 만드는 반사체계로 바꾸고 싶다…… 좋아요, 앞에서 행복은 만족한 상태라고 했으니까. 우리의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으면 바람직한 반사체계네요. 근데, 그 반사체계가 어떤 욕구를 채워야 더 만족할 수 있어서 더 바람직한 반사체계일까. 그것도 이미 매슬로우의 욕구의 5단계설에 따르지요. 수준 높은 단계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반사체계일수록 더 바람직하겠네요. 그러니까 수준 높은 욕구를 만족시키는 반사체계로 바꾸어야 그만큼 만족해서 더 행복해지겠네요.

홍아야, 너는 똑똑해서 참 좋겠다. 우리말에 눈이 밝다는 말이 있는데 사물사이의 관계를 밝혀내는 관찰력이 있다는 뜻이야. 또 귀가 밝다는 말도 있는데 말과 말사이의 관계 즉 사물 사이의 관계를 잘 파악하는 이해력이 있다는 뜻이고. 너처럼 귀가 밝아 말귀를 잘 알아들으면 총명하다고 하지. 아직 듣지 않았어도 이미 관계의 관계를 통해서 다음에 나올 얘기를 먼저 알고 있어. 그래서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안다는 말이 생겼단다. 너는 귀 밝아서 내가 할 말을 앞질러 알 수 있으니 참 좋겠다.

홍아야, 너처럼 귀가 밝아 총명해지거나 눈이 밝아 지혜로우려면 먼저 경험체계 속에 들어있는 경험들이 관계에 따라 잘 정리되어 있어야 한단다. 네 경험체계가 잘 정리되어 있기 때문에 잘 보이고 들리는 거야. 또 잘 보이고 들리니까 그것을 관계에 따라 제자리를 찾아 경험체계에 저장할 수도 있어. 그래서 더 잘 보이고 들리고. 네가 지금 행복의 개념이나 매슬로우의 욕구의 5 단계설을 쉽게 꺼내 쓸 수 있는 것도 그것을 관계에 따라 제자리 저장해 두었기 때문이란다.

지금 우리는 경험체계 즉 반사체계를 의도적으로 더 잘 정리하여 더 잘 보이고 들리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단다. 더 잘 보이고 들리면 문제 상황을 더 빨리 그리고 정확하게 파악하여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게 되지. 그러면 우리에게 문제해결 능력 즉 지혜와 총명이 생기는 거야. 우리가 얻으려는 것이 바로 그거야. 지혜롭고 총명하면 환경이나 상황, 조건에 알맞는 반사행동으로 욕구를 충족시켜 행복해질 수 있으니까. 또 인류의 위대한 스승들처럼 남들도 그렇게 되도록 도울 수 있고.

그런데 정말 눈과 귀가 밝아지는 방법이 있을까? 누구나 지헤롭고 총명하고 싶지만 마음대로 안 되잖아. 방법이 없는 것이 아니라 방법대로 하기가 어렵단다. 방법이야 이미 나와 있잖아. 여태까지 얘기한 거. 경험체계를 잘 정리하는 거. 경험체계가 잘 정리되면 뭐가 밝아진다고 했었지. 눈과 귀. 그래서 뭐가 생긴다고? 문제해결 능력 즉 지혜. 아, 방법은 그거였네. 그런데 경험체계를 정리하는 것이 어렵다고?

그렇다면 먼저 경험체계를 정리하는 방법을 찾아야 하겠네. 어떻게 정리해야 돼? 자문자답을 잘 해야 돼. 자문자답이라고? 그래, 하버지에게는 자문자답이 초점을 놓치지 않고 이치나 관계를 따라 생각을 끝까지 밀고 가는 제일 좋은 방법이었어. 하버지의 수행 방법은 기도였단다. 잠들기 전에 누워서 잠들 때까지 자문자답으로 기도했어. 사실 다른 수행방법은 듣기는 했지만 써 본 게 없어서 소개할 수 없고, 별 수 없이 내 방식을 소개할 수밖에. 미안하다. 여러 가지를 소개해서 맘에 드는 것을 선택하게 했더라면 더 좋았을 걸.

“아버지, 오늘은 아무개랑 말다툼을 했어요. 아무개가 ~라고 했는데 아버지 같으면 뭐라고 대꾸하겠어요? 그랬어? 그런데 왜 그랬니? …… 나라면 ~라고 대답할 거야.” 보통은 이렇게 시작되고 진행된단다. 어떤 때는 혼자만의 엉뚱한 상념에 빠져있다가 문득 정신차리고 “아버지 한눈팔아서 죄송해요.”하고 다시 이어간단다. 어떤 때는 일찌감치 다 잊고 편안히 잠들면 될 것을 생각만 복잡해져서 아버지도 잃고 길도 잃고 엉뚱한 데서 방황하느라고 잠을 못 이룰 때도 많아. 또 어떤 때는 대화하다가 잠들어 버리는데 아버지가 수면제로 이용되신 것을 이해하여 주실 거라 믿어. 안 그러면 마음이 복잡해서 잠이 안 오니 자장가 불러달라고 졸랐을 거야. 그러나 상황이 정리되고 마음이 개운해져서 편안히 잠들 때가 훨씬 더 많았단다. 이것이 경험체계 즉 반사체계를 정리하여 문제를 해결하고 지혜로워지는 하버지의 수행법이란다.

그런데 하버지의 아버지는 누구야? 아, 그분은 내가 닮고 싶은 예수의 아버지란다. 나는 예수에게서 그 분을 소개 받았어. 그 분은 예수의 초자아이면서 하버지의 초자아이기도해. 하버지는 하버지의 초자아를 기독교의 전통에 따라 하느님 또는 주님 또는 아버지라고 높여 부른단다. 그러나 나의 하느님은 기독교의 하느님처럼 전능하지도 않고 변덕쟁이도 아니야.원래 초자아는 ‘사랑하는 대상을 닮아있는 나’지만 여기서 말하는 초자아는 ‘내가 닮고 싶은 사랑하는 대상’이야. 그분은 내가 만든 신이라 포이에르바흐의 말대로 ‘이상화된 나’ 또는 ‘이상화된 인간’이야.

종교 공동체는 이상화된 집단적 초자아를 신이라 부르지만 하버지는 특정한 공동체의 신을 따르는 것이 아니야. 신이라고 부르는 대상들의 모습은 신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집단적인 초자아 즉 그 종교·문화공동체의 이상화된 자기모습이란다. 만약에 신이 있다면 그는 인간이 이렇게 집단적인 초자아를 형성해가는 방식으로 자신을 찾도록 유혹했으리라고 하버지는 믿는단다. 나도 그러한 유혹에 빠져서 혼자서 찾은(실은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신이란다. 찾고 보니 내가 닮고 싶은 사랑하는 대상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이상화된 나였어.

하버지의 초자아가 하버지의 아버지라는 말씀은 너무 어려워서 아리송해. 그런데 하버지는 그분과 어떻게 자문자답을 할 수 있었어? 그분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 너도 그분 즉 너의 초자아와 자문자답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단다. 너의 초자아는 원초적자아의 모든 욕구를 알고 있는 네 전지자이며 또 네 욕구를 들어줄 지 말지를 판단하는 네 전능자란다. 그러니 물을 때는 네가 원초적인 자아로 가정하여 묻고 대답할 때는 네가 원초적인 자아에 대하여 전지하고 전능한 초자아로 가정하여 대답하면 돼.

그러면 묻고 있는 네 원초적인 자아 또는 타협적인 자아는 주관적인 자아가 되고 너를 이상화한 초자아는 객관적인 자아가 되어 너에게 대답하는 거야. 물을 때와 대답할 때 번갈아 서로 다른 자아로 분장하는 것은 너의 자아를 철저하게 분열시키자는 거지. 이렇게 분열시키는 이유는 자신의 반사체계 즉 경험체계를 더 깊이 들여다보고 속속들이 드러내어 더 잘 정리하기 위해서란다. 결국은 반사체계 즉 네 자아를 더 잘 정리하여 통합시키려는 거야.

하버지의 아버지는 아무래도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느님 아버지 같아. 왜 그런 거야. 그건 내 어린시절의 기독교 경험 때문이야. 홍아야, 이름이 주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야. 그러나 너는 얼마든지 달리 부를 수 있어. 부처님도 좋고 상제님도 좋아. 네가 맘에 드는 신을 하나 만들어 이름을 붙이든지. 네가 읽은 책 중에 존경할 만한 사람 이름으로 부르거나 네가 존경할만한 스승님을 하나 만들어도 좋고, 너를 사랑하는 엄마나 아빠 또는 하버지라고 불러도 좋아. 네 다른 이름인 홍아로 부를 수도 있어. ‘홍아야, 이런 경우인데 나 어쩌면 좋겠니.’라든지, ‘나를 가장 잘 알고 사랑하는 홍아님, 내가 지금 여기서 무엇을 어찌해야 하고 할 수 있습니까.’라고. 수안이가 묻고 홍아가 대답하는 거야.

다만 그는 주관적인 자아의 욕구를 가장 잘 알고 진심으로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정당한 욕구를 채워 만족하고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어. 또 주관적인 자아가 거부하지만 않는다면 그렇게 해주려는 객관적인 자아야. 그러나 주관적인 자아인 네가 어떤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 그에게 우주의 법칙을 깨뜨리라고 말할 수는 없어. 그는 너에 대하여는 전지전능자인지만 우주에 대하여는 전지전능자가 아니야. 그는 다만 사랑과 지혜로 너와 언제나 함께 있는 분, 너의 초자아야.

그렇지만 기독교인들이 기도하듯이 소리 내어 자문자답한다는 것은 많이 어색할 것 같아. 기독교인이 그분께 기도할 때는 대개 집중하려고 소리를 내지. 그런데 소리를 내어 말을 만드느라고 생각이 방해되니까 너는 생각만으로 자문자답하는 거야. 그걸 묵상기도라고도 하는데 너는 기도가 아니라 자문자답으로 묵상 또는 명상하는 거야.

묵상할 때 하나 유의할 것은 원초적 자아를 조금이라도 억압하면 안 돼.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제 맘대로 날뛰고 지껄이는 원초적인 자아를 인내심을 가지고 합리적으로 설득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자문자답이 되고. 반사체계가 개운하게 정리된단다. 조용한 자투리 시간을 활용하여 우리 자신을 정리하자. 묵상 시간은 길을 걸을 때도 좋고 차를 탓을 때는 눈을 감고 할 수도 있어. 하버지처럼 잠들기 전에 누어서 수면제로도 좋고.

공자님이 ‘내 나이 칠십 되니까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더라’고 말씀하셨단다. 여기서 법도란 윤리적인 기준이야. 그런데 나이 칠십이 되었다고 어떻게 저절로 두 자아가 분열하거나 갈등할 때가 한 번도 없이 언제나 하나로 통합되어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이는 이미 칠십 평생 동안 수행하며 반사체계를 아주 잘 정리해 놓았기 때문에 외부에서 어떤 자극이 미치더라도 그에 알맞은 언행으로 반사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뜻이야. 이 정도 내공이 쌓였으니까 제자들의 질문에 막힘없이 대답할 수 있었지. 그만하면 공자님이 지혜로웠다고 할 수 있지 않겠니. 홍아야, 우리도 공자님처럼 칠십까지 온전하게 통합된 자아 즉 온전하게 정리된 반사체계를 가지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자문자답하며 수행해보자.

하버지, 지혜로운 사람의 말씀을 듣거나 좋은 책을 읽는 것은 수행이 아니야? 홍아야, 지혜로운 사람과 대화를 나누다보면 깨달음이 생기는데 이 깨달음은 나의 경험체계가 한 번 크게 재조직되고 수정·보완되었음을 뜻해. 책을 읽다가 그동안 가졌던 의문이 확 풀릴 때도 있는데 그때도 글쓴이의 도움말로 수많은 경험들이 한 순간에 재조직된 거야. 이렇게 남에게 또는 책으로 배우는 것도 넓은 의미에서 수행이야. 그러나 우리에게 수행은 좁은 의미에서 남이나 책의 도움 없이 자문자답하면서 우리 힘으로 깨닫고 반사방식을 바꾸는 것을 가리켜.

그렇다면 어찌해야 자문자답을 잘할 수 있어? 알고자 하는 것들이 잘 들어나도록 스스로에게 질문을 잘 던져야 돼. 질문 속에 답이 들어있게 마련이니까. 이 말은 질문 속에 질문을 풀어가는 실마리가 들어있다는 뜻이야. 그러므로 질문 속에서 실마리가 잡히도록 질문을 잘 만들어봐. 그리고 한 번 잡은 실마리를 놓치지 말고 끝까지 따라가야 돼. 관계가 끝나는 곳까지. 아니면 어떤 법칙이나 원칙으로 귀납되거나 근거가 속속들이 다 밝혀질 때까지 그 실마리를 놓치지 말고 끝까지 추적해야 돼. 추적하다가 길을 잃으면 알고 있는 갈림길까지 되돌아와서 다시 물어야 돼. 그래야 문제해결 능력을 길러서 지혜로울 수 있으니까.

이를테면 서사구조를 분석하려면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 왜를 차례로 다 물어야 서사구조에 관련된 정보가 다 드러나잖아. 그러나 원인 분석이나 영향, 결과, 또는 근거나 전제 분석 등은 처음에 무엇을 묻는지에 따라 다음 대답과 질문이 결정되고 또 그에 따라 다음 대답과 질문이 결정 돼. 그러므로 한 번이라도 질문을 잘못하면 갈림길에서 길을 잃고 실마리를 놓치고 말아. 목적지가 아닌데도 길이 막히거나 끊어지거나 방향이 다르면 질문을 거슬러 올라가서 빗나간 자리로 돌아와서 다시 물어야 돼. 자문자답하다보면 그런 일이 여러 번 반복될 거야. 그러니까 알고 싶은 것이 드러나도록 질문을 잘 던져야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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