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지가 쓰는 편지

하버지의 행복론 (10)

- 윤석원(전 전교조교사)

9. 자아 실현

그런데 홍아야, 문제해결 능력이 생겨서 지혜로운 생각과 언행을 반사할 수 있다면 잘 정리되어 더 바랄 것이 없는 반사체계일까. 그래서 정말로 행복해질 수 있을까. 지혜로우니까 삶의 문제를 잘 해결하고 여러 가지 욕구를 충족시켜서 틀림없이 행복할 거야. 그러나 그 지혜가 이기적인 목적으로 사용된다면 다른 사람의 행복을 깨뜨리거나 빼앗을 수도 있어. 그렇다면 남의 불행으로 행복을 얻으려는 반사체계도 바람직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남의 불행에 대한 공감능력이 전혀 없거나 증오나 분노나 저주로 반사체계가 비뚤어져 있어서 남의 불행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행복을 빼앗긴 사람들의 불행을 보거나 그들의 원망이나 분노나 저주를 들어도 아무런 느낌이 없는 반사체계라면, 공감을 가지고 남들과 함께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은 아무도 바람직하게 여기지 않을 거야.

그렇다면 하버지가 바람직하다는 반사체계는 어떤 거야. 우리의 욕구를 충족시켜서 행복해질 만큼 지혜로운 행동을 반사할 뿐만 아니라 남들의 행복도 함께 증진시키려는 사랑하는 행동을 많이 반사하는 반사체계일수록 더 바람직할 거야. 거기에다가 우주 만물에 깃들어 있는 아름다움을 기뻐할 수 있는 반사체계라면 더욱더 바람직할 거고. 우리가 진선미에 대한 경험 가능성을 실현하여 반사체계를 지혜나 사랑이나 감성 등 바람직한 인간성들로 가득 채우는 것이 진정한 자아실현 아닐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삶의 목적은 자아실현에 있으며 자아를 실현한 만큼 행복해질 수 있다고 했는데 홍아야, 자아실현에 대한 네 생각은 어떠니?

자아실현……, 그럼, 실현할 수 있는 자아가 있다는 말이네. 그렇지. 실현 가능한 자아라……, 아, 하버지는 자아란 본능을 가리키고, 본능이란 개체가 타고난 가능성이라고 하셨잖아. 그걸 실현하는 걸 자아실현이라 하셨고. 그런데 매슬로우의 욕구의 5단계설에서 최고 수준의 욕구가 자아실현 욕구라는데 자아를 실현하면 가장 큰 만족을 얻어 행복해진다고 하셨어. 근데 나는 5단계의 자아실현이 무엇을 잘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서 어떤 욕구를 채우는 건지 모르겠어.

자아실현이 무엇을 잘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는 거냐고? 이제까지 우리는 그 얘기를 했는데? 삶의 여러 가지 문제를 잘 해결하여 욕구를 충족하고 행복해질 수 있는 능력인 지혜를 가지자고. 그리고 지혜와 함께 사랑과 감성까지 고루 갖추면 더욱 바람직한 자아실현이라고. 아, 1단계에서 4단계까지 어떤 욕구든지 그걸 충족시킬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면 그 능력이 생긴 만큼 자아가 실현되었다는 하버지의 말씀은 알아들어요. 그런데 하버지가 매슬로우의 욕구 단계 설에서 5단계에 또 자아실현 욕구가 있다고 하셨잖아요. 바로 5단계에서 실현해야 할 자아의 가능성이 무엇을 해낼 수 있는 가능성이냐고요. 5단계에서 실현해야할 가능성은 앞 단계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가능성과는 다른 종류의 가능성이어야 되잖아.

5단계의 자아실현이 어떤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는 거냐고 묻는 거니? 그래요. 아, 그건 진선미를 경험하여 진선미로 내면을 가득 채우고 싶은 자아가 진선미를 경험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는 거야. 공자님이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하셨어. 여기서 도(道)는 진선미를 하나로 일컫는 말로, 우주의 창조 원리이면서 운행의 원리이면서 또 모든 존재를 존재하게 하는 원리야. 이 말씀은 공자님이 진선미에 대한 경험 욕구를 채울 수만 있다면 만족했으므로 언제 죽어도 좋다는 말씀인데, 이는 자아실현에 대한 강열한 욕구를 극적으로 표현하신 말씀이야. 그러나 아무에게나 자아실현 욕구가 생명욕구보다 더 강열하게 일어나지는 않아. 그래서 나는 네가 진선미를 찾으려는 자아실현 욕구가 다른 어떤 보물을 찾으려는 욕구보다 더 강렬하기를 바래.

글쌔 난 아직 진선미 경험이 왜 그리 소중한지 그리고 그 경험으로 내가 얼마나 행복할지 잘 모르겠어. 왜 진선미를 경험하고 싶은 욕구를 가장 고차원적인 욕구로 설정했어?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을 것 같다.

매슬로우의 욕구 단계설에서 어떤 욕구를 채운 만족감 즉 행복에 상대적인 수준이 있댔어. 시간적으로 순간적이거나 단속적이 아니라 영속적인, 영역적으로 부분적이거나 국지적인 아니라 전체적이고 전면적인, 차원적으로 저차원적이 아니라 고차원적인 만족감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이 상대적으로 더 바람직한 행복이 아닐까. 생리적인 욕구나 안전감 욕구나 소속감 욕구나 자아존중 욕구 등은 이를 채워 만족했더라도 삶의 상황과 조건이 끝없이 변하게 마련이라서 그 만족감이 결코 영속적이고 전면적일 수가 없어. 그러나 진선미를 경험한 만족감은 죽을 때까지 사라지거나 빼앗기지 않으면서 계속해서 다른 하위 욕구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만족감이기 때문에 가장 고차적인 수준에 두었을 거야.

이를테면 지동설이라는 그 누구의 진리 경험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천체를 경험하는데 얼마나 커다란 도움을 주었니. 또 바퀴를 달아 수레를 만들면 마찰을 줄일 수 있다는 그 누구의 진리 경험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창조적이고 생산적 경험을 주어겠니.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그 누구의 선에 대한 경험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이웃 사랑을 경험하게 했니. 그리고 우리를 기쁘게 하는 아름다움에 대한 수많은 경험들 이를테면 그 누구의 명곡이나 명화 한 편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눈과 귀와 입에 오르내리며 얼마나 많은 기쁨을 경험하게 해주었니. 그리고 우리도 별을 바라보거나 들꽃 한 송이를 들여다보며 얼마나 기뻐했었니. 이런 경험들이 다른 욕구에 대한 만족과 행복보다 상대적으로 더 영속적이면 더 전면적이며 더 고차적인 만족과 행복을 가져다주는 경험들이라는 거야.

또 다른 이유는? 진선미를 경험할 능력이 있다면 언제라도 다른 하위 욕구들을 충족시킬 수 있기 때문일 거야. 이를테면 사냥이나 채집 등으로 인간이 의식주에 대한 생리적인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었던 것은 인간의 육체가 사냥이나 채집에 알맞게 진화해온 것이 아니라 다른 동물보다 진선미를 더 많이 경험하고 또 이를 축적할 수 있도록 진화했기 때문이야. 인간은 다른 동물들처럼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로 사냥하는 것이 아니라 사냥 대상의 생리나 생태에 대한 지식과 올가미나 덫 또는 그물을 만들 수 있는 지식으로 사냥했어. 이렇게 축적된 지식이 있다면 언제라도 쉽게 사냥하여 생리적인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었어.

오늘날과 같은 문명생활로 여러 가지 욕구를 언제라도 쉽게 충족하여 행복하게 된 것도 전적으로 진선미에 대한 인간의 경험가능성이 실현되고 그 경험이 축적되었기 때문이야. 그런 뜻에서 문명의 발달의 정도는 그 문명권에서 사는 사람들의 진선미 경험으로 자아를 실현한 정도랄 수 있어.

하버지 그럼 돈벌이에도 진선미에 대한 경험능력이 필요해? 돈이 많으면 생리적, 안정감, 소속감, 자존심 욕구 등 여러 욕구를 채울 수가 있지. 그래서 행복해지려고 누구나 돈을 벌려고 애써. 그런데 돈벌이는 마치 적은 노력으로 제방을 쌓아서 많은 물을 모으는 것과 같아. 돈의 흐름을 알고 작은 투자로 큰돈을 벌 수 있는 길목 찾아 그 곳을 막는 사업을 벌이잖아. 그러니까 돈벌이를 잘하려면 돈의 흐름을 읽고 투자할 길목을 찾아내는 진리 경험이 축적 되어야 돼. 권력이나 명예 등을 얻어 여러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도 그것을 얻는데 필요한 진이나 선, 미가 축적되어야 그것을 얻을 수가 있어. 돈이나 권력 명예 등은 모두가 진선미 경험 능력의 부산물이지만 진선미가 축적되지 않는다면 그 부산물도 생기지 않아.

그렇다면 4단계까지와 5단계의 자아실현이 어떻게 달라. 4단계까지는 진선미에 대한 경험 능력을 가지는 것 자체가 욕구의 목적이 아니라 다른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목적의 수단이었어. 거기까지는 여러 가지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부나 권력, 명예, 지식, 등을 가지는 것이 자아실현이고 목적이었고 진선미에 대한 경험능력은 그것들을 가지는 수단이었어. 그런데 5단계에 들어서면서 수단과 목적이 역전돼. 이제는 진선미를 경험하는 것이 자아실현의 목적이 되고 하위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소유물들은 수단이 되는 거야. 진선미 경험이 더 큰 만족감을 줄 뿐만 아니라 진선미 경험 능력은 언제든지 진선미를 이용하여 필요한 것들을 얻고 하위단계 욕구를 쉽게 충족시킬 수 있기 때문이야. 그러나 그 역은 아니야. 그래서 진선미에 대한 경험 욕구가 고차원적인 욕구가 된 거야.

자아실현 욕구는 자아를 가진 생명체만의 욕구일까? 자아가 무엇이냐는 관점 차이를 좀 정리해야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아. 포스트모더니즘은 인간의 자아란 허위의식에 지나지 않으므로 항상성이나 동일성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 자아를 해체·증발시켜 버린 거야. 그건 아주 좁은 의미에서 변화 과정의 반사체계만을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야. 그러나 심리학과 생리학, 뇌과학에서는 무조건반사체계의 항상성을 지키려는 주체인 자아를 전제하지 않고는 학문 자체가 성립할 수가 없어. 실재 자체가 가지고 있은 가능성의 체계인 항상성을 지키려는 주체가 있다면 우리는 인간만이 아니라 우주에 존재하는 실재들의 자아를 인정할 수밖에 없어. 그것은 어느 것이나 진선미에 대한 경험 가능성을 실현한 자아들이야. 따라서 그들에게도 자아실현이 있어.

산소 하나에 수소 둘이 만나 기체들이 액체인 물이 된 것도 어떤 자연 법칙이나 원리라는 진리를 실현한 거야. 그리고 물이라는 자아의 가능성은 때로는 물이나 얼음이나 수증기로, 때로는 눈이나 서리로 실현될 거야. 또 물은 때로는 눈의 기하학적인 문양으로 때로는 무지개로 그 아름다움을 연출할 수도 있어. 또 만물이 살아가는데 생명의 근원이 되기도 하니 물의 덕은 모든 생명에게 말로 할 수 없지. 하버지는 물활론(애니미즘)적인 관점에서 보면 물 분자에게도 진화과정에서 엔트로피를 이겨내고 물로써의 항상성을 유지하려는 주체적인 자아가 형성되었다고 믿는 거야. 그럼 바위에게도 자아가 있느냐고 물을 수 있지. 그러나 바위는 유지하려는 항상성도 없고, 당연히 그 항상성을 유지하려는 주체도 없어. 단지 그 안에 여러 종류의 궁극적인 실재들 즉 자아들이 어떤 계기 때문에 결합해 있는 결합체일 뿐이야.

하버지는 원자나 분자에게도 항상성과 이를 지키려는 주체로서의 자아가 있다는 거네. 그럼 사자는 어떤 항상성을 지니고 있어. 사자의 항상성은 사자의 가능성이 실현된 사자다움이지. 사자의 생리나 생태는 어떤 법칙이나 원리라는 진리가 사자다움으로 실현된 거야. 사자는 사자다움으로 위엄을 아름답게 연출하고 있지. 이 사자다움이 물소의 병약한 것을 치워서 결과적으로 물소 떼를 건강하게 만드는 선행(?)을 하고 있어. 우리가 볼 수 있는 사자다움이라는 항상성은 사자의 자아실현의 결과야. 물소는 억센 힘과 질긴 가죽으로 사자의 공격을 뿌리치는 데서 물소다움이 생겼어. 당당하고 믿음직스러운 물소다움은 사실 사자가 진화를 도운 거지만 물소는 물소대로 그의 자아를 실현한 거야. 물소다움이라는 항상성은 또 얼마나 아름다우니.

그러면 하버지, 사자의 사자됨과 인간의 인간됨 즉 사자와 인간의 자아실현에서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무얼까. 사자를 비롯하여 다른 동물들은 무조건 반사로 행동하지만 인간은 조건 반사로 행동한다는 사실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큰 차이를 찾을 수 있을 것 같구나. 그것으로 인간의 특징과 의미를 찾을 수 있으니까. 인간의 조건반사 가능성이 진화되었다는 사실은 인간이 그만큼 조건 속에 들어있는 진선미에 대한 경험 가능성이 확장되었음을 뜻해.

물론 다른 동물들 이를테면 사자도 조건 반사 행동을 하지만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야 겨우 하나의 조건에 알맞은 하나의 행동방식을 학습할 수 있어. 그러나 인간은 미리 조건에 맞추어 학습하거나 경험하지 아니했어도 조건이 변할 때마다 단번에 조건에 알맞은 행동을 반사할 수 있어. 이건 엄청난 차이야. 진선미를 경험하고 단번에 조건에 알맞은 반사행동을 할 수 있는 인간의 조건반사능력은 어쩌면 우주에서 가장 큰 경이일 수도 있어.

하버지는 인간의 조건반사 능력을 경이로 보지만 그것 때문에 생태계가 혼란에 빠져 있어. 만약에 문명이 인간이라는 종이 자아를 실현한 결과라면 문명으로 보아 진화의 법칙이 깨진 것이 아닐까? 진화의 어떤 법칙 말이니? 균형의 법칙. 인간이라는 종이 나타나기 전에는 자연 생태계가 종 사이의 견제로 균형을 이루어 어떤 한 종이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지는 못했잖아. 그런데 인간이 단번에 조건반사 할 수 있는 진선미에 대한 경험 능력을 가지고 문명을 건설하기 시작했어. 문명을 건설하기 시작한 지 수천 년 만에 인간이 문명의 힘으로 지구의 생태계를 마음대로 뒤흔들고 있잖아. 문명은 자연생태계의 자정능력을 넘어섰기 때문에, 인간 존재를 돌연변이한 암세포와 같은 존재로도 볼 수도 있어. 이미 깨어진 균형을 다시 회복할 수 있을까?

글쌔, 생태계는 끝없이 변화하는 것이므로 균형 상태로 보이는 것은 갑작스러운 변화가 없다는 말일 거야. 그러므로 네 말대로 생태계가 균형을 유지하는 것을 법칙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거야. 인간이 지배하기 이전보다 인간의 지배로 균형이 크게 무너진 것은 사실이야. 지금의 상태가 또 다른 균형을 찾아가는 과도기인지 아니면 인간이 핵전쟁 등으로 지구를 생명체가 더 이상 발붙일 수 없는 곳으로 만들어 모든 생명체와 함께 자멸하는 과정인지는 아무도 모르지. 만약에 후자를 향해 가고 있다면 인간이 자연과 조화를 유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자아실현일 거야.

생태계의 균형이 깨진 것을 진화의 법칙이 깨진 것으로 비약할 수는 없을 것 같아. 그리고 생태계의 균형을 깨뜨린 인간존재를 암세포와 같은 돌연변이로 볼 수도 없고. 원숭이들의 조건반사능력으로 볼 때 인간의 조건반사 능력은 그 연속성에서 생겨난 거지 돌연변이라는 비약이 아닐 수도 있어. 그리고 인간을 없느니만 못한 존재로 몰아가기에는 인간의 조건반사 능력이 너무도 경이로워. 위기인 것은 사실이나 인간이 하기 나름 아닐까.

그러면 인간의 진선미 경험 능력이 얼마나, 어디까지 진화할까? 진화과정에서 유인원에서 갈라져 나온 호모일렉투스(직립 원인)가 불과 백여만 년 또는 수십만 년에 만에 이 놀라운 인간다움을 실현했대. 만약 인간이 스스로 자멸하지 않는다면 진선미에 대한 인간의 경험 가능성에 따른 조건반사 능력이 어디까지 진화할 수 있을까. 앞으로는 진선미에 대한 인간의 경험 가능성의 진화가 갈수록 가속될 것이므로 얼마나 빠른 속도로 어디까지 진화할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을 것 같아. 아메리카에 처음 도착한 백인을 본 인디언이 백인을 신으로 경배했다는데, 지금의 우리가 보기에는 신으로 경배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미래의 인간의 진선미에 대한 가능성이 진화되어 있을 지도 몰라. 그때는 정복자같이 다른 인간이나 다른 피조물 위에 군림하지는 말아야 하겠지만.

과거의 역사는 문화권마다 진선미에 대한 경험 가능성의 실현 정도인 문화와 문명의 발달 정도가 달랐음을 보여줬어. 그런데 아무래도 더 발달한 문명권이 더 전면적이고 영속적이며 고차적인 만족을 누리는 삶을 살았을 거야. 이는 개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 아닐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진선미에 대한 경험을 삶의 수단이 아니라 삶의 목적으로 삼고 거기서 행복을 얻으려는 사람은 인간의 1%도 안 된대. 공자님은 15살에 배울 것을 결심했대.(志于學) 아마 자아실현을 결심했을 거야. 하버지도 그 나이 때에 돈벌이나 권세 등 부귀영화보다는 막연하게나마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이 삶의 목적이었던 같아. 하버지는 너도 자아실현이 네 삶의 목표일 거라고 믿어. 아리스토텔레스의 말대로 네가 자아를 실현한 만큼 행복할 거야. 하버지는 네가 자아실현하여 행복하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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